하나님의 타이밍

<출애굽기 4:10-20>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18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가 주저하다가 결국 순종하며 나아가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건져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 것이다. 이제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게 하리라.”

하지만 모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파라오에게 가며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리이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겠다 하셔도, 모세는 계속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두 가지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 그들이 믿을 것이라 하십니다. 하지만 모세는 오늘 본문에 나오듯 또다시 말합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명령하신 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사람입니다.”

모세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이스라엘 혈통이었지만 어릴 때 이집트 공주에게 입양되었습니다. 학식이나 교양면에서는 당대에 뒤쳐질 인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런 성장배경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언어적 소통에는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그는 이집트를 떠나 40년 가까이 미디안 땅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타국에서 나그네로 지내온 그 세월 속에서 어쩌면 그는 말하는 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 서는 일 자체에 자신을 잃었는지 모릅니다. 혹은 그냥 단순히, 원래부터 그는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자신 없어 뒤로 빼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이 말씀은 묘한 울림을 줍니다. 사람의 입을 지으신 분, 각 사람으로 하여금 말 잘 하거나 말 못 하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그러므로 얼마든 그분은 말 못 하던 자의 입에 역사하셔서 말 잘 하게 하실 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듭니다.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말을 잘 못 하게 하셨을까? 모세가 처음부터 말 잘 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힘겹게 설득할 필요도 없었을 것 아닌가?

또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 하나님은 저런 모세를 부르셨을까?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일을 시키시려면 처음부터 말 잘 하는 사람을 부르시면 되지, 왜 저 말주변 없는 사람을 부르시고 저렇게 구슬려 사용하고자 하시는 걸까?

우리는 그 답을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리고 그 맹인의 눈을 고쳐주십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겐 있는데 나에겐 없는 어떤 것’ 때문에 내가 불행하고 무력하다 생각하곤 하지만,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빈 자리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이며,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수 있다 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가난이 어떻게 복일 수 있을까요? 더 좋은 것으로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지기 때문입니다.

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슬픔과 아픔이 어떻게 복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께 이어주는 끈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그때에, 오히려 우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에 대해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우리의 예상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은 ‘카이로스’란 단어로 표현됩니다. 카이로스는 무르익은 시간, 꽉찬 시간입니다. 때가 무르익어 마침내 다다른 시간입니다.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마침내 결실로 맺어지는 시간입니다.

모세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생각하던 시점이 아니라 오히려 할 수 없다 생각하던 그 시점에, 하나님은 이제 때가 되었다 보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부르셨다기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그를 부르셨다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그에게서, 또한 그를 통해, 그분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보자면 모세가 뭔가를 이뤄낼 수 있을 것 같던 시점은 그의 나이 40세쯤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돌아볼 마음을 먹고 당차게 움직였습니다. 어떤 이집트 사람이 한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고, 그는 몰래 그 이집트 사람을 쳐죽이고 땅에 묻어버립니다.

그 이튿날 나가 보니 이번엔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일에 끼어들어 잘못한 사람을 타이릅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동포를 괴롭힙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합니다.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는 일이 탄로난 것을 알고 두려워 미디안 광야로 도망칩니다.

이후 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거기서 자식 낳고 살아갑니다. 첫 아들의 이름 ‘게르솜’은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이집트인 그룹에도 낄 수 없었고, 히브리인 그룹에도 낄 수 없었습니다. 쫓기는 신세였고, 배척당한 신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40년이 흘렀습니다. 그의 나이 팔십, 거창한 것을 꿈꾸지 않는 삶, 잊혀졌기에 오히려 편안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 돌연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너무나 큰 일을 맡기려 하십니다.

이미 좌절의 경험이 있는 모세입니다. 이미 배척을 경험한 모세입니다. 다시 돌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해낼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너무 잘 압니다. 마음 접은지 오래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해도 더이상 그 일에 뛰어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는 또다시 대답합니다. “오 주여 보낼 만할 자를 보내소서”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도 “됐다. 싫으면 관둬라. 다른 사람 찾아보지 뭐!” 하실 법도 한데, 오히려 하나님이 모세를 포기 못하십니다. 말 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열심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왜 하나님은 굳이 이 모세를 통해 일하고자 하셨던 걸까요?

모세에게서 모세 자신도 모르는 어떤 좋은 것을 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은, 속으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 때를 위하여, 너를 이 모습으로 빚으려고 40년을 기다렸는데, 어떻게 너를 포기하겠니!”

모세도 진심, 하나님도 진심입니다. 모세가 거절하는 것은 자기 한계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포기 못하시는 것은 그래서 모세가 적임이라 생각한 까닭일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론’ 카드를 꺼내드십니다.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모세에게 동역자를 붙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입이 되어줄 사람, 그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다리가 되어줄 사람을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투트랙으로 움직이십니다. 모세에게는 아론이 그를 볼 때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하시며 안심시켜 주시고, 또 아론에게는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따로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음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결국 모세는 부르심에 순종하기로 합니다. 모세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다 죽었음을 하나님은 그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러고보면 하나님은 모세의 순종에 장애물로 작용한 것들을 거의 다 제거해주신 셈입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에게 인사하고 40년만에 다시 이집트로 향합니다. 도망자로 나왔으나 사명자로 돌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이집트로 돌아가는 그의 손에는 이제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후 이야기는 많이들 아실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고 이적을 행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지도하에 이집트를 나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광야 사십 년을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모세는 120세를 살았는데, 그의 생애만큼 정확히 삼등분되는 인생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초기 40년을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로 살았고, 중기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았으며, 후기 40년은 시내 광야에서 지도자로 살았습니다.

그의 나이 80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모세는 자기 인생이 이전 40년과 별반 다르지 않게 마쳐질 줄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나이 120에 지나온 인생을 돌이켜 보며 모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모세의 생애 중기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았던 시절은 그의 인생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시간이었을까요?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말씀합니다. ‘온유’는 힘이 있지만 힘을 물릴 아는 능력을 말합니다. 혈기를 제어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굴복시킬 수 있는 자질입니다.

끝없이 불평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온유한 지도자 모세가 없었다면 이미 그들은 광야에서 끝장났을 것입니다. 미디안에서의 40년 나그네 생활을 생각하지 않고 바로 온유한 지도자 모세를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시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더 바쁘고 활발히 지내던 이전 시절에 비해 무의미하게 허송하는 시간일까요?

쌓고 채우고 소비하는 것만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하나님이 자신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말씀합니다.

어쩌면 지금은 채워짐을 위한 비워짐의 시간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명의 여정을 떠나기 위해 준비되는 광야의 시간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일에 부르시기 전에 우리의 힘을 빼십니다.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그릇을 준비하십니다. 채워지기 전에 먼저 비어지게 하시고, 비어진 우리의 공간을 당신의 임재와 능력으로 채우며 일하십니다.

내 생각과 욕망과 기준과 이상으로 나를 온통 채우고, 다른 사람까지 그것으로 다 채워버리고자 하는 모습은 얼마나 비극적인지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서도, 이렇듯 우리 안에는 비워짐이 필요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삶에 지친 사람들 찾아와 쉬어 가도록 우리 맘 속에 누군가의 자리 남겨두며 살아요”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은 ‘환대’(hospitality)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환대는 낯선 이가 들어와 적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에 따르면 환대는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그를 위한 공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 이전엔 한번도 서보지 못했던 그 자유의 땅에 그가 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속에 하나님을 위한 공간, 다른 누군가를 위한 공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닥치는 여러 사건들과 상황들 속에서 그 공간이 우리에게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모세의 마지막 40년이 그 이전과 다르게 펼쳐졌던 것처럼, 우리의 이후 인생도 이전과 같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다가올 부르심의 순간, 그 결정적인 하나님의 타이밍을 향하여 지금도 하나님의 시간은 무르익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 했습니다. 비워짐의 시간을 충실히 살아가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빚어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신뢰할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속에 당신을 위한 자리가 더욱 마련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