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항해하는 자 276

<사도행전 27 : 18-26, 33-39>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

33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39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로마 여정 중에 있었던 일을 묘사합니다.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한 바울은 재판을 받기 위해 다른 죄수 몇 사람과 더불어 로마로 가게 됩니다. 유대총독 베스도는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호송 임무를 맡깁니다. 본문의 기록자 누가와 외에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바울과 동행합니다.

루기아의 무라 시까지 일차 항해를 무사히 마친 일행은 거기서 이달리야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갈아탑니다. 그런데 바람이 도와주지 않아 배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여러 날 만에 간신히 그레데 연안의 미항(아름다운 항구)이라는 곳에 이릅니다.

항해가 지연됨으로 인해 계획했던 일정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이미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있었고, 그 시점에 항해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제안합니다. “여러분, 내가 보기에는 이대로 항해를 계속하다가는 짐과 배만이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선장과 선주는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기서 떠나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길 원했습니다. 백부장은 그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고, 배에 있던 대다수 사람들이 그걸 더 원했습니다.

배는 다시 출발했습니다. 때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왔습니다. “거봐, 떠나길 잘 했지!” 선원들을 닻을 올리고 그레데 해안에 바싹 붙어서 항해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났습니다. 배는 표류하기 시작합니다.

태풍에 몹시 시달리다 못해 이튿날에는 화물을 바닷속으로 집어 던졌고, 또 그 다음날에는 선원들이 배의 장비를 제 손으로 내던졌습니다. 목숨이라도 건져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폭풍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살아돌아갈 희망을 아주 잃고 말았습니다.

그 때 바울이 일어서서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시달려 온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여러분, 내 말대로 그레데 섬을 떠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이런 재난과 손실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기운을 내십시오. 배는 잃겠지만 여러분의 목숨은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어제 밤에 나의 주인되신 하나님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천사가 내게 나타나 말하기를,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섬에 밀려가 닿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아드리아 바다에서 표류한 지 열나흘째 되던 날 밤, 한밤중에 선원들은 육지에 가까이 왔음을 직감합니다. 끈에다 추를 달아 내려보니 물 깊이가 스무 길이었습니다. 좀더 나아가 다시 재어보니 열다섯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배가 암초에 걸릴 염려가 있었으므로 고물에서 닻을 내리고 어서 날이 새기를 기다립니다.

그 사이 선원들은 배에서 빠져나갈 속셈으로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면서 거룻배를 물에 띄웠습니다. 아무리 육지에 가까웠다 한들 그들 보기에 그 큰 배가 암초를 뚫고 육지에 무사히 이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만 살겠다고 그 일을 벌인 것입니다. 바울이 이를 발견하고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알립니다. 이에 군인들은 밧줄을 끊어 거룻배를 떼어버립니다.

통이 틀 무렵,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입니다. 자, 음식을 드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 누구도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빵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 떼어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용기를 얻어 모두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어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37절에서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의 수가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었음을 전합니다. 그들 모두가 배부르게 먹고 남은 식량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했다고 합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우리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날이 밝았습니다. 어느 땅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사람들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닻을 끊고 앞돛을 올려 바람을 타고 해변 쪽으로 배를 몰았고, 가는 길에 배가 부서졌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말대로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이백칠십육 명 모두가 살아서 육지를 밟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 바울 일행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했을까? 바울의 로마행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요나처럼 하나님의 명령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여서 바울이 그런 고난을 겪은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레데 연안 미항에서 그들이 내린 잘못된 결정이 이런 고난을 자초한 면이 있습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대신 바울의 말을 따랐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우리의 모든 결정이 그 분야 전문가의 말보다 목회자나 선교사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측입니다.

당시 선장과 선주의 말이 지닌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자신들의 전문성보다 자신들의 욕망을 따랐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 시기가 항해에 위험한 시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항해를 강행한 이유는 더 편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 시기에 항해를 하고도 운좋게 무사했던 경험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 겨울을 편하게 지내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전문성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요행에 기대어 그들은 무리하게 주장했고, 그와 똑같은 욕망 속에서 백부장과 승객들은 따라 움직였던 것입니다.

오히려 상식선에서 움직였던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그리고 환경의 편안함보다 사람의 생명을 우선으로 판단했습니다. 여기서 서로 충돌하고 있는 두 개의 가치는 전문성과 비전문성이 아닙니다. ‘편의’와 ‘생명’입니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과 생명 살리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삶입니다. 오늘의 우리 역시 이 두 가치가 충돌하는 현장 속에서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울 일행이 고난을 겪은 이유를 사람들의 그 잘못된 결정 때문으로만 보긴 어렵습니다. 그들이 유라굴로를 만난 일도, 그 광풍의 상황이 14일이나 지속된 것도, 또 결국 그들이 거기서 구원을 경험한 일도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울을 로마로 보내는 일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일하기 원하셨습니다. 바울과 함께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바울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길 원하셨습니다.

바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는 바울이 결국 목적지 로마에 도착하리라는 것과 더불어, 바울과 함께 항해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 주셨다는 말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바울에게만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항해하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도 있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보통 저 멀리 한 점을 찍어 놓고 거기를 향해 달려갑니다. 사업가들은 어떤 수익의 목표를 정해놓고, 학생들은 어떤 성적이나 학교의 목표를 정해놓고, 또 해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일정 수준의 생활안정과 자아실현의 목표를 정해놓고 거기를 향해 노력하며 달려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그 여정 중에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럼 우리는 기도하며 그 모든 어려움 잘 극복하고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바울을 로마행 배에 오르게 하신 하나님의 관심이 그를 로마에 데려다놓는 데만 있지 않고 그 로마행 배에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이 바울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일에도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가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옆에 두어 함께 있게 하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만남과 관계들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온전히 빚어가시며, 그 만남과 관계들 속에서 복음이 증거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선교에 온전히 헌신되어 있기만 하다면, 하나님은 어떤 순간,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건 우리를 통해 일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편안한 환경을 원합니다. 편안한 환경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일도 더 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언제나 내가 원하는 조건 속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두신 그 자리에 내가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전환된다는 뜻입니다. 내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내어드린다는 뜻입니다. 얼핏 보면 이것은 자유를 잃고 내가 사라지는 일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참된 자유’에 이르는 길이고 ‘참된 나’를 찾는 길입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우리 젊은이들이 되도록이면 부모님이 제시하는 길보다는 자기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라는 말이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내 마음대로”가 과연 진정 ‘나’다운 선택입니까? 앞에 선장과 선주, 백부장과 승객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경우 우리 마음은 어떤 욕망에 노예가 되어 있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내리는 결정이 실은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이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보다 나이가 더 많고 경험이 더 많은 어른들이라 해서 이 부분에서 더 낫다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에 이끌리느냐입니다.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십시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진리 안에서 해방을 경험할 때에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질병의 위협,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상황, 끝이 보이지 않는 생계의 고민… 이런 상황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소망을 빼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여러 날 동안 아무 빛도 보이지 않고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진 상황 속에서 바울이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소망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어둠을 밝히는 빛, 죽은 자를 일으키는 능력,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 또한 길을 만드시는 분이며,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보내시며 맡기신 일을 이루는 것, 전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증거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파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하나님이 보내신 곳으로 인식하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선교’입니다. 이 의식을 가지고 내 삶의 자리에서 복음이 증거되길 소망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선교사’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당시 바울과 함께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이 총 이백칠십육 명이었음을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숫자 276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또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관심이 우리가 누군지도 다 알 수 없는 그 276명 전원에게 머물러 있었고, 그들 모두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는 사실,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은 중요한 사람입니다. 지금 여러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자리에 나와 더불어 살게 하신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 나를 여기에 두시고 그들과 함께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7-39)

하나님께 보냄받아 이 땅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그분 가신 길을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 살아야 할 삶도 동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만남과 관계들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더불어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옆에 두신 사람들의 의미를 오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들 중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 있게 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 복음이 증거되는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