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믿음

본문: 눅17, 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Ježíšova cesta do Jeruzaléma je plná oklik a zdržení. Cíl je jasný, v Jeruzalémě se bude odehrávat rozhodující drama. Cesta k němu ovšem nevede přímo, ale skrz různá setkání. Pro nás, čtenáře evangelia, to zní jako pozvání: podívej, i tyto lidi zve Ježíš na svou cestu, i oni mají být vtaženi do toho rozhodujícího děje mezi nebem a zemí. Taky pro mne i pro tebe platí Ježíšovo pozvání, přestože nás od jeho života dělí dva tisíce let, přestože žijeme na jiném kontinentu, vjiné civilizaci. Ježíš si při svém putování do Jeruzaléma pro nás dojde i na ta nejodlehlejší místa.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우회와 지체가 늘 발생하는 그런 길입니다. 그러나 목표는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결정적인 드라마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곧은 길이 아니라 여러 만남들이 일어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만남들은 복음서를 읽는 우리들에게 „보세요, 예수님께서 당신이 가시는 그 길로 즉, 하늘과 땅 사이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미 그러나 아직인 사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그들을 초청하십니다“라고 말해주는 듯 합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비록 예수님의 삶과 우리의 삶이 2천년의 시간적 차이와 다른 대륙, 다른 문명 속에  살아가는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물론 나와 당신에게도 유효한 초청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우리에게도 찾아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Na své cestě zabloudí Ježíš i do Samařské země, která byla blízko a daleko zároveň. Zeměpisně blízko, do značné míry i nábožensky příbuzná, protože Samařané uznávali Tóru. Ale pro Židy to byli odpadlíci. Samařan znašeho příběhu je navíc ještě malomocný, takže je hned dvojnásobně podezřelý.

예수님은 길을 가시면서 가깝고도 먼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십니다. 사마리아 땅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물론 종교적으로도 토라를 인정했기 때문에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 땅은 배교자들의 땅이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문둥병자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두배로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Není úplně jasné, co vlastně mají novozákonní pisatelé na mysli, když hovoří o malomocenství. Podle některých výkladů to nemusela být nám dodnes známá lepra, ale nějaký jiný druh kožní choroby. Nakažlivá, odpudivá, ale ne nutně smrtelně nebezpečná. Co je vtuto chvíli nejdůležitější: byla – řečeno dnešním slovníkem – sociálně vylučující. Na nemocné se ostatní dívali skrz prsty, anebo je raději vůbec nechtěli vidět. Podobně minulý režim odklízel kamsi do izolace lidi spostižením, aby pohled na ně nenarušoval výhled ke světlým zítřkům. Navíc nad každým takto nemocným se vznášela otázka: nespáchal v minulosti něco strašlivého, že na něj Bůh seslat tak strašlivou nemoc? S tím vším museli malomocní žít.

신약성서 저자들이 문둥병에 대해 말할 때 실제로 어떤 병을 말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해석들은 신약성서의 문둥병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나병이 아니라 피부병의 일종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해석들은 신약성서의 문둥병은 전염성이 있고 역겹기는 하지만 죽음에 이를만큼 치명적인 병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문둥병이 사회로부터 소외를 일으키게 하는 병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을 손가락질하고 외면했습니다. 과거 공산정권은 장애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일의 희망에 걸림돌이 되는 시각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동떨어진 곳으로 격리시켰습니다. 게다가 모든 병자들 위에 이런 질문들이 맴돌았습니다: 얼마나 몹쓸 짓을 저질렀으면 하나님께서 저런 끔찍한 병을 보내셨을까? 문둥병자들은 이런 소리를 듣고 살아야 했습니다.

 

Ti, které Ježíš potkává, drží pospolu. Ostatně nic jiného jim nezbývá – když už jsou nábožensky a lidsky nečistí a společnost se jich štítí, aspoň se vzájemně podporují a cítí se možná bezpečněji. Tvoří takové malé ghetto. A je jim celkem jedno, že jeden znich je heretik. Když člověk žije za městem na smetišti, takové věci až tak neřeší.

예수님께서 만나시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는 것 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들로 낙인이 찍힌 자들이었으며 사회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지탱해 줄 수 있었고 그들끼리 있을 때가 더 안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작은 게토를 형성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한 사람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시 외곽에 있는 쓰레기 더미에서 살아간다면 누가 이방인이라고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Když k nim Ježíš přistupuje, správně by měli dodržovat nejen povinný odstup, ale také by měli volat: nečistý, nečistý – a tím ho varovat, aby se od nich vzdálil. Místo toho jej prosí o slitování. Přece jen se ale od něj ohleduplně drží poněkud stranou, aby ho neposkvrnili, nechtějí ho zjevně dostat do potíží.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들에게 다가오실 때, 그들은 정확히 정해진 거리를 유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서 예님께서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도록 경고해야 합니다. 다른 한 편으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겨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감염이 되시거나 어려움을 겪으시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Pozoruhodné je, že se v příběhu vůbec nemluví o tom, jak a kdy vůbec Ježíš malomocné uzdravil. Zjevně to není vpříběhu to nejdůležitější. Jako by už samotné setkání sJežíšem mělo tuto uzdravující moc. Uzdravení probíhá ve skrytu. Podstatná je jiná otázka: co se mnou to uzdravení udělá? K čemu mě přivede?

주목할 만한 것은,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들을 언제 어떻게 치료하셨는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언제 어떻게 문둥병자들을 치료하셨는가가 가장 중요한 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과 만남 자체가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치유는 그렇게 조용히 진행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치료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나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Ze všeho nejprve je setkání s Ježíšem přivádí do chrámu, a to na výslovný Ježíšův příkaz. Když se uzdraví třeba hluchý, tak hned on sám i všichni okolo můžou poznat, že najednou slyší. U kožních nemocí je to složitější, tam přichází na řadu expert, který jediný smí prohlásit člověka za uzdraveného a nábožensky čistého. Ježíš neposílá malomocné do chrámu proto, aby se tam pochlubil svým úspěšným lékařským zákrokem. Uzdravení lidé mají dostat oficiální potvrzení, že už zase patří do společnosti, že už jsou opět lidmi. A to mohou obdržet jedině u kněze, Ježíš sám jim ho nemůže dát.

먼저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명령으로 그들은 성전으로 가게 됩니다. 예를들어 귀머거리가 치유되면 그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갑자기 듣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피부병은 더 복잡한 문제인데,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이 병자가 치유되었고 종교적으로 깨끗하게 되었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성공적인 치료를 자랑하시기 위해서 문둥병자들을 성전으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병에서 회복된 사람들은 이미 다시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공식적인 확인을 받아야 했는데, 문둥병자들은 이를 제사장에게서 받을 수 있었고 예수님이시라도 이러한 확인을 그들에게 주실 수 없으셨습니다.

 

Představme si, že bychom byli na místě deseti uzdravených. Nejprve museli vážit dlouhou cestu ze Samaří do Jeruzaléma, tam opět nějakou dobu čekat, než se jich ujme kněz. Očišťovací proces nějakou dobu trvá, zákon předepisuje různé kultické procedury. A po tom všem by se měli znovu vydat za Ježíšem a složitě ho hledat? Vždyť on už mohl být mezitím zas někde úplně jinde.

우리가 열 명의 문둥병자들 중 하나라고 생각해 봅시다. 병이 치료된 후 우선 문둥병자들은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긴 여행을 해야 하고, 그곳에서 제사장들이 그들에게 정결의식을 행할 때까지 또 얼마 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율법은 다양한 정결의식을 규정하고 있는데 정결의식은 시간이 얼마 간 걸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정결의식이 행해지는 동안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셔서 완전히 다른 곳에 가셔서 계실 수도 있습니다.

 

Těch devět malomocných, co se kJežíši už zpátky nevrátili, bývá označováno za nevděčníky, kteří neumějí Bohu ani poděkovat. To je ale trochu zjednodušující, moralizující výklad: nezapomeňte za všechno Pánu Bohu poděkovat. To je samozřejmě pravda. Nikdy Bohu neděkujeme dostatečně, už jen proto, že kdybychom měli poděkovat za vše, co nám Bůh dává, nemohli bychom dělat nic jiného. Na dobré věci si rychle zvykneme a začneme je pokládat za samozřejmost, na kterou máme dokonce právo.

문둥병자들 중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던 아홉은 하나님께 감사치 않은 배은망덕한 자들로 묘사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라는 다소 단순하고 도덕적인 해석입니다. 물론 이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언제나 충분한 감사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 감사해야 충분한 감사가 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선한 것들에 금방 익숙해지고, 점점 그러한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심지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의 권리로 생각하게 됩니다.

 

Ale Ježíšova slova jdou ještě hlouběji. Nejde jen o nevděčnost. Ostatně, také těch devět zbylých malomocných jaksi Bohu poděkovalo, protože součástí očišťování bylo přinesení děkovné oběti vchrámu. Především jde o to, co se s jejich životem stane dál. Vrátí se prostě zpět do původních kolejí, do dob, kdy ještě byli zdraví? Bude na nich nějak znát, že do jejich života mocně vstoupil Bůh? Devět zdeseti po svém uzdravení mizí ze scény, jako by se nic nestalo. Problém je vyřešen, teď už zase můžou spokojeně žít, tak jak si to vždycky přáli. Ježíš zůstává v jejich životech epizodou, sice důležitou, ale pomíjivou. Kromě zdraví si ze setkání s ním nic neodnesli.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그러한 의미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히 감사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나머지 아홉의 문둥병자들도 어쨌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정결의식에 희생재물을 성전으로 갖고 오는 것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 말씀은 감사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문둥병이 치료되고 그들의 삶 속에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원래의 삶 즉, 문둥병이 걸리지 않았던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입니까? 어찌 되었든 그들이 문둥병에서 치유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강력으로 역사한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까? 열 명의 문둥병자 중에서 아홉은 문둥병에서 치유된 후 마치 그들의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 언급이 없이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문제가 해결됐고, 그들은 그들이 늘 바라왔던 대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에 에피소드로, 상당히 중요하게 그러나 그저 지나가는 무엇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서 건강해진 것 외에 얻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Ale je tu ještě ten desátý. Vrátil se po těch dlouhých dnech a vyhledal Ježíše. Velikým hlasem velebil Boha, padl tváří k Ježíšovým nohám a děkoval mu. U něj setkání sJežíšem nastartovalo novou životní etapu. Proměnilo se nejen jeho tělo, ale i srdce. Očista se mu dostala nejen na kůži, ale i pod kůži. Ježíš mu říká: vstaň a jdi, tvá víra tě zachránila. Tím zjevně nemyslí tělesné uzdravení, vždyť očištěni byli všichni, nejen ten desátý. Ježíš má na mysli záchranu celého života. Pro desátého se uzdravení stalo branou kplnokrevné víře, vstupenkou do Božího království. Jeden z deseti využil šanci. Využil, ale zjevně nemusel využít – Ježíš nikoho nenutí, rozhodnutí nechává na každém z nás.

그러나 여기 아직 열번째 문둥병자가 있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돌아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께 감사를 표했습니다. 열번째 문둥병자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의 삶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의 몸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도 변하였습니다. 피부 뿐만 아니라 피부 깊은 곳까지 정결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것은 분명히 육체적인 치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치유는 열번째 문둥병자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문둥병자들에게도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전인적인 구원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입니다. 열번째 문둥병자에게 문둥병의 치료는 진정한 믿음의 문이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입장권이 되었습니다. 열 명 중의 한 명만 기회를 잡았습니다. 열번째 문둥병자가 기회를 잡았지만 그 또한 나머지 아홉처럼 기회를 잡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으시고 결정을 우리 각자에게 맡기십니다.

 

V našem příběhu stojí vedle sebe stojí dvě pojetí spásy. To první je povrchní, ale celkem rozšířené: Spása je odstranění toho, co mi ztrpčuje život, odmetení problémů, návrat do normálních poměrů. Taková spása mi umožní, abych si svůj život opět mohl utvářet podle svých představ, abych si šel za svým cílem a na této cestě mi nic nepřekáželo. Ani Bůh už mi nemá dál překážet, poté, co splnil to, co jsem od něj očekával. Bůh tu funguje jen jako podpora mých projektů a plánů, jako záruka kvalitního života.

오늘 본문에는 두 개의 구원의 개념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피상적인 구원의 개념으로서 꽤 널리 퍼져있는 구원개념입니다. 이 구원 개념에 따르면 구원은 내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제거하고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한 구윈은 내가 내 생각대로 내 삶을 다시 세우고, 내 목표를 추구하며, 그 무엇도 내 앞길을 가로막지 않는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하는 구원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한 것이 이루어진 후에 하나님도 더 이상 나를 방해하지 않는 그러한 구원입니다. 이런 구원에서 하나님은 단지 보다 나은 삶에 대한 보장처럼 나의 프로젝트와 계획들을 지원해주시는 그런 분이 됩니다.

 

Spása, kterou nabízí Ježíš, je jiná. Jistě ani Ježíš nechce, aby nás něco trápilo, abychom měli problémy a byli nemocní. Proto také lidi uzdravoval a odstraňoval bolesti všeho druhu. Ale právě u toho to nesmí skončit. Proměna člověka má jít na dřeň, má být totální. Kdo věří, ten se přestává považovat za absolutního pána svého vlastního života, protože tím je jedině Bůh sám. Spása, kterou přináší Ježíš, mění životní směr, přehazuje výhybku, dává novou orientaci, staví život do nového světla. Ktomu samozřejmě patří také pokání – to nepříjemné uznání, že mnohé moje představy o životě byly mylné, že moje dosavadní cesta nevedla k pravému cíli, že jsem se dopouštěl toho, co bylo zlé vHospodinových očích. Spása není jen záchrana, ale také zboření toho, co před Bohem neobstojí, a budování něčeho nového.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위의 구원과는 다른 구원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문제에 얽매이고, 병이 들고 하는 것을 원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을 치료하시기도 하셨고 고통을 없애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변화는 근본적이고 완전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삶의 절대적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으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삶의 방향을 바꾸고, 삶의 주인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며, 새로운 방향을 주고, 삶을 새로운 빛을 향해 세우게 하는 그러한 구원입니다. 물론 그러한 구원에는 회개도 포함됩니다. 즉, 삶에 대한 많은 나의 생각들이 잘못된 생각들이며, 지금까지의 나의 길이 올바른 목표를 향하고 있지 않았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악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뼈아픈 인정입니다. 구원은 단지 어떤 문제해결만이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을 허물고 새로운 것으로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Není to poprvé ani naposled, co se Ježíš setkává s vírou tam, kde by to nikdo moc nečekal. Nevíme, jaké měl vyléčený Samařan představy o Bohu, ale na tom až tak nesejde. Podstatné je, že po svém očištění nešel dál vlastní cestou, ale přišel zpátky za Ježíšem. Tu cestu si neurčil on sám, on si ji – dobrovolně – nechal určit Ježíšem. On věděl nejenom, komu poděkovat, ale také komu svěřit svůj život. Devět zdeseti to nedokázalo – to je docela hodně, Ježíšův čin nedopadl na moc úrodnou půdu. Nechat se vyléčit, na tom není nic těžkého. Jít za tím, kdo mi otevřel novou budoucnost, to od člověka něco vyžaduje. To je cesta skutečného uzdravení.

아무도 예상치 못 한 곳에서 예수님께서 믿음을 보신 것은 오늘 본문 이야기가 처음도 아니고 끝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마리아인 문둥병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들을 갖고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근본적인 것은 그가 치료를 받고 난 후 그 자신의 길을 계속 가지 않고 예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길을 자기자신 스스로가 결정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결정하시도록 자발적으로 그 결정권을 내어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누구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알았을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 그의 삶을 맡겨야 하는 것도 아는 자였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 중에서 아홉은 이를 알지 못했고, 이러한 일은 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이를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빗대어 말한다면 예수님의 치료라는 행위가 좋은 밭에 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병을 치료하시도록 나를 맡겨 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치료 후 나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실 그 분께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그것이 진정한 치유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아멘!

(번역: 김영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