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손

<출애굽기 5:15-6:1>

5:15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16 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17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18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

19 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경험하기 전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절부터 나오는 내용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모세와 아론이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말하라 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내 백성을 보내라!” 간결하면서도 단호한 명령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은 ‘내 백성’이라 하십니다. 그들의 보호자요 후견인이요 대변자로서 하나님은 이집트의 최고권력자에게 그들을 놓아줄 것을 명령하십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완전히 데리고 나갈 계획이셨지만, 처음부터 파라오에게 그걸 요구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이집트 탈출 자체를 목적으로 하셨다면, 굳이 이렇게 파라오를 대면케 하실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얼핏보면 그저 종교적인 이유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정치적 의미와 효과를 갖습니다.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지배와 압제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호와’란 이름의 신이 끼어들어 이스라엘의 충성을 요구하고, 또 파라오에게 복종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파라오의 권위와 위신은 실추될 위기에 놓입니다.  

또한 당시 이집트인보다 수효가 많았던 이스라엘 자손이 떼로 움직여 이집트 영토 밖에 집결하는 상황은 실질적으로 파라오에게 정치적 위협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예배모임은 얼마든 정치적 쿠데타로 발전할 소지가 있었고, 혹여 주변국과 동맹을 맺어 이집트를 침공할 경우 제 권력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파라오는 말합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도대체 여호와가 누구냐? 파라오는 무시를 통해 저항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두 권위가 부딪치며 대립하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이 대립이 3절에 ‘히브리인의 하나님’, 그리고 4절에 ‘애굽 왕’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다시 말합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일어난 일, 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진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실까 두렵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경고입니다. 후에 그 이집트 땅에 일어날 일에 대한 책임은 파라오 당신에게 있다는 선전포고입니다. 

그러자 이집트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노역을 쉬게 만드느냐? 썩 물러가서 일이나 하여라!” 그리고 그 날로 공사감독들과 작업반장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그렇다고 생산량을 줄여서도 안 된다. 저들이 일하기 싫어서 제사 운운하는 것이니, 눈코 뜰 새 없이 일을 시켜 저런 허튼소리에 귀기울일 여유도 없게 하라!”

파라오의 목표는 현상유지, 이를 위한 전략은 이스라엘 대한 학대를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적혀 있는 말이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 말씀을 비틀어서, 힘없는 자들에 대한 학대와 착취를 정당화하는 거짓 이데올로기입니다.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언제나 이것은 불의한 독재정권의 전략이었습니다. 바쁘고 힘들게 만들어 진실에 귀먹게 하는 것,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참으로 좋은 삶인지 생각해보고 분별할 여유조차 못 갖게 하는 것.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너무 바쁜 사람들은 무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왕명이 하달되고 노역이 강화됩니다. 이집트인 공사감독들은 이스라엘 자손 작업반장들을 다그쳐 정해진 기일에 정해진 생산량을 채우라 요구합니다. 그리고 해내지 못했을 시에는 그 작업반장들을 매질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의 작업반장들이 파라오를 찾아가 항의합니다.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인 우리에게 이같이 하십니까? 이집트인 공사감독들이 우리에게 불의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명령 자체가 파라오에게서 나왔으니, 그가 그 호소에 귀기울일 리 없습니다. “이 게을러 빠진 것들아, 너희가 일하기 싫어 너희 신에게 제사드리러 가겠다는 것 아니냐? 당장 물러가서 명령받은 그대로 하여라!”

파라오가 문제의 원인을 그들의 게으름에 돌리자, 그들은 두렵고 다급해집니다. 자신들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음을 깨닫습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말합니다.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이 우리를 역겨워하게 된 것은 당신들 탓입니다. 당신들이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들을 심판하시길!”  

본문 21절에 “미운 것”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본래 ‘나쁜 냄새’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말은 나보다 힘이 센 누군가에게 용납되지 못할 상황에 처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이 이집트 최고권력자의 눈밖에 났음을 인식한 것이고, 그 문제의 원인을 그렇게 되도록 빌미를 제공한 모세와 아론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압제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모세와 아론을 보내셨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이스라엘은 더 고통스런 상황에 처하게 되고, 그들의 압제자 파라오의 호의를 잃은 것에 안타까워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보내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저주하는 상황입니다.

구원하신다면서요? 그런데 왜 상황이 나아지지 않죠? 우리의 고난을 살피셨다면서요? 그런데 왜 우리는 더 고통스럽고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거죠?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만 불어넣어 놓고 당신들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않습니까!

이에 모세는 여호와께 돌아와 호소합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이리로 보내셨습니까? 제가 파라오를 찾아가 당신의 이름으로 말한 뒤로 이 백성은 더욱 들볶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들을 건져줄 기미도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파라오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파라오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파라오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이제 곧 보리라! 때가 무르익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파라오에 대한 여호와의 반격이 곧 시작될 거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왜 바로 하면 안 됩니까? 파라오가 저렇게 기고만장해지지 않도록 바로 본때를 보여주시면 될 것을 왜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저렇게 고통을 겪지 않도록 바로 거기서 빼내주시면 될 것을 왜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마음이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으로 바라던 것은 이집트에서 나가는 일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좀 더 편하게 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삶의 틀은 바꾸지 않고 삶의 질만 개선하는 솔루션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시는 삶, 참으로 그들에게 유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참으로 복된 삶의 길로 인도하길 원하셨고, 또 그들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이스라엘 백성 자신이 그 일을 소망해야만 했습니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원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이집트에서의 삶보다 더 낫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확신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파라오를 건드리신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국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거기서 나가고자 하는 열망, 새로운 꿈, 새로운 소망, 새로운 상상력을 먼저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힘들어 합니다. 불의한 현실을 마주할 때, 고달픈 삶이 계속될 때, 왜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냐고 질문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비춰보면, 그때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작심하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생겨나기를.

그런 의미에서 이 출애굽기 5장의 상황, 답답한 고난과 침묵의 상황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꼭 필요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계속될 상황은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은 뭔가를 보여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6장 1절에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 최고권력자를 제압하는 그분의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강한 손은 이후 이집트 땅에 내려질 열 가지 재앙과, 또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 속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목격되고 경험될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파라오의 강한 손이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이집트 땅을 떠나라고 최종적으로 명령하게 될 사람도 이 파라오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파라오의 강한 손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손이 그 뒤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파라오의 강한 손은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강한 손이 그 뒤에서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그 파라오의 강한 손은 이스라엘의 몸과 마음이 그와 그의 땅에서 떠나게 만들고, 결국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일조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경전 속에 들어 있는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사람이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진리요 능력입니다. 그저 아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마음으로 그 말씀을 붙들고 삶으로 그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역대상 28장 9절에서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을 차기 왕으로 세우며 권면합니다.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하나님은 버릴 사람을 정해 놓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자기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 그 사람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버려지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기에,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여러분이 주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며 이루어지길 바라는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 현실 속에 들어가 있을 때 우리가 보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의 강한 손에 눌리고 이집트적 삶의 틀에 익숙해져,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더 나은 계획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두렵게 하는 힘들, 우리가 익숙해진 삶의 틀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들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겠지만, 적어도 다음 몇 가지는 노력하며 사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말씀을 따라 사는 일에 생명을 거십시오. 하나님의 강한 손을 신뢰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만을 소망하십시오. 세상의 방식을 따라 편하게 살겠다는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기로 결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런 삶으로 부르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기로 결단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당신의 강한 손으로 붙들어주시고 온전한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