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2년 2월 20일)
- 마태복음 11장 28-30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11,28-30.docx
<마태복음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쉼을 약속하십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저 말뿐인 위로를 위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건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참된 쉼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위안을 주는 28절만이 아니라, 실제 그 쉼을 누리는 법을 알려주시는 그 다음절들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란 누구를 말할까요? ‘수고하고’로 번역된 헬라어(호이 코피온테스)는 ‘스스로 많은 일들을 하여 계속해서 피곤에 지친 상태’를 말합니다. 계속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과 조바심에 얽매여 있는 상태라 할 것입니다. 비단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도 생계의 문제에 허덕이며 쉼없는 수고 속에 지쳐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한편 ‘무거운 짐 진 자들’로 번역된 헬라어(페포르티스메노이)는 ‘타인이 자신에게 지워놓은 무거운 짐 때문에 계속해서 지쳐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논쟁적 상황과 본문의 앞뒤 맥락을 고려할 때, 여기서 ‘무거운 짐 진 자들’이란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부과된 종교적 의무의 짐에 눌려 살아가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도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에 경도되어 삶이 피폐해져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 안에서 자유와 구원과 쉼을 얻지 못하고 눌려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다 이 ‘무거운 짐 진 자들’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의 초청입니다. 그들 모두에게 참된 쉼을 약속하십니다. 본문에 강조되고 있는 말은 ‘내가’(카고)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참된 쉼을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 하십니다. 그것이 쉼을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좀 의외입니다. 모든 멍에를 없애는 것이 답일 것 같은데, 예수님은 또 다른 멍에를 말씀하십니다. ‘쉼’과 ‘멍에’, 이 둘이 양립될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떤 멍에를 멘 상태에서 과연 우리가 쉼을 누릴 수 있을까요?
‘멍에’란 달구지나 쟁기의 채를 잡아매기 위해 소나 말의 목에 가로얹는 둥그렇게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구약성경과 유대전통에서 이 멍에는 ‘예속’과 ‘복종’을 상징하는 말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 랍비들은 흔히 말하기를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율법의 멍에, 하나님 나라의 멍에를 메고 다닌다 하였는데, 하나님이 유일신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로 작정할 때부터 이 멍에를 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율법의 멍에’가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 일에 방해가 되고 그저 무거운 짐으로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은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그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매개하는 종교인들이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더 나은 구원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참 구원과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모든 멍에를 거부하는 데 있지 않고 더 나은 멍에를 메는 데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멍에 메던 삶에서 멍에 없는 삶으로 이끄신 것인가요? 아닙니다. 악한 군주 파라오의 멍에 아래 있던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멍에 아래 있는 삶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20)
과연 인간은 멍에 없이 살 수 있는 존재일까요? 아니, 멍에 없이 스스로 잘 살 수 있는 존재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던진 이스라엘 백성이 과연 가나안 땅에서 멍에 없이 살았습니까?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하나님의 은혜로 청소되고 수리된 마음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채워져야 할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비어 있는 상태로 있다면, 다시 거기로 나쁜 것들이 들어가 그 마음의 상태가 전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나쁜 멍에를 벗어난 삶이라 할지라도 더 나은 멍에를 메고 사는 삶이 아니라면, 그 삶의 방향과 결과가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 젊은이들로부터 두 가지 비슷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은 본성적으로 사람이 악해서인가요?”, “사람이 나쁜 것을 욕망하게 되는 것은 왜죠?” 어떤 신학자들은 ‘원죄’와 같은 개념을 가지고 이를 설명하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지… 제가 확실히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은 무언가에 영향받으며 살아갑니다. 악한 것에 영향받으면 악한 모습이 되고, 선한 것에 영향받으면 선한 모습이 됩니다. 결국 방향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것에 영향받아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악순환 속에 있던 이 세상에 사랑과 생명의 선순환을 일으키시려 오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멍에’란 무엇을 말할까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이 말 속에서 예수님은 멍에를 ‘메우는’ 주인입니까, 멍에를 함께 ‘메는’ 동료입니까?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고, 아마도 예수님은 이 중의적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우리에게 그분의 멍에를 메게 하시는 주님은 잔혹하고 고답적인 주인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한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온유는 ‘힘이 있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 속에 그 힘을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주인은 소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고려치 않고 힘으로 위협하고 닥달하며 일을 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주인이 아닙니다. 기다려주실 수 있는 분이며 너른 가슴으로 품어주시는 분입니다.
겸손은 ‘기꺼이 자기를 낮추어 다른 이들과 같은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어떤 주인은 자기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답적으로 일만 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걸음에 동행하시며 우리 옆에서 기꺼이 섬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그런 주인의 멍에라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는 이 말씀을 또한 그분이 메고 계신 멍에를 함께 메자는 예수님의 초청으로도 들을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소 두 마리를 한 쌍으로 하여 쟁기질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 경우 소들은 긴 가로막대 아래 두 개의 목 구멍이 뚫려 있는 멍에를 함께 메고 밭을 갑니다. 영어에 yokefellow란 말이 있는데요, 서로 연결되어 같은 방향으로 가는 동료, 단짝, 배우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소 두 마리가 한 멍에를 메고 일할 때 좋은 점 중 하나는, 아직 일에 미숙한 소가 그와 멍에를 함께 메고 있는 다른 숙련된 소에게서 일을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멍에를 함께 메고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며 우리는 예수 제자의 삶을 온 몸으로 배웁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사랑’일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그리고 몇 절 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13-14) 예수님과 멍에를 함께 메고 간다는 것은 그분이 가신 사랑의 길을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남긴 ‘평화의 기도’는 예수님의 멍에를 멘 사람이 나아가고자 하는 삶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배우지 않고도 잘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멍에 메어보지 않았던 소가 멍에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듯,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삶도 우리 몸에 붙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누군가에겐 너무나 버겁고 엄청난 과업처럼 느껴지는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인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엔 너무나 버겁고 엄청난 과업처럼 느껴졌던 일이 언제부터인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이 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삶이 어느덧 너무 자연스러워져 버린 사람의 삶이 그와 같을 것입니다.
며칠 전 제 아내가 거실을 깔끔하게 치워놓았습니다. 그 거실은 사람이 들어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게 어지럽혀져 있던 거실이었습니다. 치워야겠다는 필요를 느낄 때는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벌써 한동안 그대로 방치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거실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아내가, 그런 일을 하려면 다른 사람보다 배는 노력해야 하는 제 아내가 말끔히 치워놓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날 오후에 저희 집에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였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에 이 마태복음 11장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하루 동안 많은 일을 했는데도 전혀 힘들거나 버겁다는 느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날 아침 단톡방에 이런 글귀를 적어 놓은 걸 보았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쉼을 얻습니다… 오늘 하루, 수고하지만 무겁지 않은 주님이 주시는 일들을 잘 감당하는 날 되게 하소서. 쉼이 있는 하루 되게 하소서.”
이처럼 우리의 삶은 일 자체가 힘드냐 쉬우냐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 일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 일이고, 또한 누구와 함께 하는 일이냐가 오히려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더 중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께 배우며 살아갈 때 우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그냥 흘려듣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멜 때 우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하십니다.
여기 ‘마음’이란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쉼은 육체적 안락함이 아닙니다. 비싼 리조트에서의 화려한 쉼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마음의 쉼, 심령의 평강입니다.
나라 멸망 직전 예레미야 시대 유다 백성들은 탐욕과 거짓 속에 살면서도, 괜찮다 괜찮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말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렘6:16)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다 말하는 가짜 평강 말고, 사람이 진짜 평강, 진정한 마음의 쉼을 얻으려면, 선한 길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리로 가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에는 ‘마음’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하나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곧 예수님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쉼이 있는 마음, 곧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자들이 얻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서 있는 삶의 자리에는 누군가가 들어와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바로 이 공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평화와 쉼을 누리고, 그들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환대의 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빚어집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께 배우며 따르는 사람에게 그 멍에는 멜 만한 것입니다. 그 짐은 질 만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과 한 멍에를 메고 함께 걷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이 놀라운 마음의 쉼, 심령의 평강을 실제적으로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빌립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6-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 인생의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께 우리 인생을 의탁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며 따르기 원하오니, 우리 삶의 모든 걸음에 당신의 평화와 안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