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8월 9일)
- 로마서 3장 9-18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다 죄 아래에 있다 - 롬3,9-20.docx
<로마서 3:9-18> – 새번역
9 그러면 무엇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낫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14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15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주 레바논 베이루트 폭발사고 희생자들과 세계 각지 여러 재해 및 사고 희생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매주일 로마서를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 본문에서 이제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말할 것입니다. 그에 앞서 이제껏 말한 내용을 그는 한 마디로 정리합니다: “다 죄 아래에 있다” 이것을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인간의 우상 숭배를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각종 나쁜 짓들을 말했습니다. 자기도 행하지 않으면서 남을 정죄하는 위선을 말했습니다. 거짓되고 허황된 말로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을 비방하는 잘못을 말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제 무슨 결론에 이르게 되는가?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나은 점이 있는가? 이론적으론 그들이 유리하지만 실제로 그에게 더 나은 모습이 있는가? 없다! 똑같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체코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모두가 다 똑같다. 다 같은 조건 위에 서 있다. 모두가 다 죄 아래에 있다!
All are under sin… 무엇 ‘아래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것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모두가 ‘죄의 권세 아래 있다’(RSV, REB)는 뜻입니다.
바울은 죄를 그저 추상적인 무언가로 보지 않습니다. 자체의 생명을 지닌 하나의 권세로 봅니다. 죄는 인류를 파괴하는 잔인한 폭군과도 같고, 우리를 위에서 내리누르는 무거운 짐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먹구름 아래 있을 때 우리는 하늘을 보지 못하고 햇빛을 받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권세 아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어리석고 비참해집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우리 모두가 죄 아래에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현대인들에게 ‘죄’는 인기 없는 단어입니다. 만약 제가 사람들 있는 데서 ‘죄’라는 말을 꺼내면 대부분 눈살을 찌푸리며 저를 옛날 사람 취급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죄’라는 말 대신에 ‘병’이란 말로 모든 걸 설명하려 합니다. 인류가 처한 곤경, 인간이 겪는 문제들을 일종의 질병으로 보려 합니다.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죄인’이란 말을 듣는 것보다 ‘환자’란 말을 듣는 게 좀 덜 거북하겠습니다. 누구도 병에 걸리기를 스스로 선택하진 않습니다. 그러니 자기 문제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겠습니다. 또 병에 걸린 사람은 자기 행동을 조절하기 쉽지 않습니다. 알츠하이머 환자는 잠깐 정신이 돌아오는 때를 선택할 수 없고, 조울증 환자는 감정의 그네타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니 환자들이 아파서 하는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일도 부당한 일 같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죄’라는 말 대신에 ‘위법’이란 말로 모든 걸 설명하려 합니다. ‘죄를 지었다’ 하지 않고 ‘법을 어겼다’ 한다는 것이죠. 인류가 처한 곤경, 인간이 겪는 문제들은 누군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선과 악을 선택할 능력이 있고, 자기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기가 자기 행위를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떻게 자랐고 현재 어떤 상황 속에 있는지는 고려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병’이나 ‘위법’이라는 말이 ‘죄’가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나타낼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지난 주 화요일에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폭발사고가 있었습니다. 질산암모늄인가요, 어떤 위험물질을 거기 오래 쌓아논 게 문제였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 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비극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무슨 병명을 붙이면 설명이 됩니까? 누군가가 법을 지키지 않아 그리 됐다고 하면 다 설명이 되나요?
지금 우리가 오랫동안 겪고 있는 코로나 상황은 어떻습니까? 한 사람의 잘못 때문인가요?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그것이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요? 또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느끼죠. 뭔가가 잘못돼 있다는 것을. 이건 아닌데, 뭔가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사는 이 세계도, 내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내가 어떤 상황에서 갖는 마음도, 이건 아닌데, 뭔가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분명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데…
성경은 그것을 ‘죄’라 말합니다. 모두가 죄 아래에 있다 선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개인의 문제이면서 인류 전체의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닌 불안과 관련된 문제이면서, 각자가 고의로 저지르는 잘못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죄는 ‘관계의 깨어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관계,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 우리가 전체 피조세계와 맺은 관계는 깨어집니다.
죄는 단순히 ‘하면 안 되는 일련의 행동들’이 아닙니다. 죄는 훨씬 더 근본적입니다. 죄는 우리 삶 자체와 연관되며, 죄의 핵심은 법의 위반이 아닌 관계의 깨어짐입니다. 인간은 피조세계를 이루는 그물망 속에 살며 다른 모든 피조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나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하지도 않고 나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죄로 인해 관계가 깨어진 상황에서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자유로운 선택의 공간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환경에 있고, 전에 내가 어떤 일을 겪었든, 여전히 우리는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고, 또 내게 일어난 일에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비극과 함께 사는 법을 익힐 수도 있고, 그 일로 인해 사실상 죽은 상태로 남은 생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용서할 수도 있고, 계속해서 그를 미워하며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죄는 하나님, 그리고 다른 사람과 깨어진 관계에 머무르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으로 들어서기로 선택하는 것을 회개라 합니다. 회개를 결단하면 쓴 약을 먹었을 때처럼 고통이 따릅니다. 하지만 이 약에는 분명 우리 삶을 구원하는 힘이 있습니다.
미국 성공회 신학자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는 그의 책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Speaking of Sin)에서 말합니다.
죄와 관련된 언어를 폐기한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여전히 소외, 진실의 왜곡, 지옥 같은 현실, 죽음을 경험합니다. 이를 가리키는 언어를 버릴 때 그 앞에서 우리는 그저 벙어리가 될 뿐입니다. 무어라 부를지도 모르는 사태가 우리 삶에 일어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 사태를 회피하는 것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에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구약성경을 통해 제시합니다. 마치 실에 진주알을 꿰듯 지혜서의 말씀들을 연속적으로 인용합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찼다.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여기서 바울은 크게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첫째로, 죄는 우리를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죄의 권세 아래 있을 때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에 사로잡힌 사람 안에는 하나님을 위한 공간이 없습니다.
둘째로, 죄는 우리의 모든 곳에 스며듭니다. 우리 신체와 정신의 모든 영역, 기능과 활동의 모든 범위에 이 죄가 스며들어 영향을 미칩니다. 바울은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목구멍과 혀와 입술과 입과 발이 어떻게 오작동을 일으켜 우리 삶을 파괴하는지를 묘사합니다.
셋째로, 죄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죄는 보편적이며 무차별적입니다. 그 사람이 어느 집단에 속해 있든,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여기서 죄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는 행위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Chatah라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로 ‘과녁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길을 잘 가다가 시선이 흐트러져 바른길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두 번째는 Avah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로 ‘잘못된 행동을 하다’라는 뜻이며, 종종 ‘죄악’으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가리키며, 하나님을 거스르려는 의도를 갖고 명령을 어기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세 번째는 Pasha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로 ‘반역하다’를 뜻합니다. 이 단어는 보통 ‘범죄’로 번역되며, 명백하게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이 세 단어 모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과녁을 벗어나는 것,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 명백히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 모두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인류가 처한 곤경을 바울은 ‘죄’라는 한 단어로 표현합니다.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중에 어떤 이들은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유대인 중에 어떤 이들은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 하나님을 거스르지만, 실상은 같다, 모두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단어를 듣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경험은 하나입니다. 죄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물 배후에 있는, 우리의 일부를 죽게 하는 경험을 들여다봅니다.
지금 내 모습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나’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아는 순간, 그 간극에 아파하며 그 고통에 ‘죄’라는 이름을 붙이고 더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순간, 우리는 어제까지의 내가 죽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어제까지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내가 되는 삶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각 사람 속에는 진정한 삶에서 단절된 경험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잔인하게 취급받았던 기억도 있고, 빛을 보고도 두려워 피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금지된 과일을 향해 손을 뻗었던 경험도 있고, 내 욕심과 안전을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이렇듯 생명의 원천에서 분리되는 모든 경험을 성경은 죄라고 부릅니다. 빛에서 멀어지는 길은 수천 갈래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어둠과 빛을 식별하고 어둠이 나를 덮으려 할 때 어둠을 몰아내는 일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느 베이유는 말했습니다. “모든 죄는 공허를 채우려는 시도다” 우리 내면에는 텅 빈 곳이 있는데, 이를 채울 수 있는 분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뿐입니다. 우리는 공허감을 견디기 힘들어 이곳을 무언가 다른 것들로 채워보려 하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런 헛된 시도를 중단하고 그 비어있음을 존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초대하시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 죄 아래에 있다’는 바울의 선언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이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부풀려지지 않은 마음으로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자기 PR, 자기 긍정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오늘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다 죄 아래에 있다’는 성경 말씀을 생각합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더 열심히 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