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믿음

<사무엘하 15:23-30>

23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24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27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읍으로 돌아가라

28 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29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

30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치던 상황의 이야기입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사람들을 모아 반역을 꾀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은 급하게 왕궁을 빠져나와 피난길에 오릅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도 레위인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와 그 피난행렬에 합류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제사장 사독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목숨이 위태로운 다급한 상황, 앞으로 어찌 될 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에 더욱 집착합니다.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려고 의지할 만한 것을 찾아 더욱 자기 옆에 두려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궤만큼 마음에 위안을 줄 만한 것이 또 없었을 것입니다. 대외적으로도 하나님이 다윗이 있는 곳에 계심을 나타낼 수 있는 정치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언약궤를 원래 자리에 도로 메어다 놓으라 말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궤를 그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건 아닐 것입니다. 그가 왕이 되고나서 간절한 열망으로 행했던 일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것이었으니까요. 궤가 성 안으로 들어올 때 그는 너무 기뻐서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췄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이렇게 하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그분이 나를 도로 인도하셔서 이 언약궤와 하나님 계신 곳을 다시 볼 수 있게 하시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않는다’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면 나는 ‘당신이 내게 선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소서’ 하리라”

이 부분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만일 내가 야훼께 은혜를 입는다면 다시 돌아와 제자리에 모신 이 궤를 보게 되지 않겠소? 만일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으신다면 어떤 처분을 내리시든 받아야지요.”

아무리 성스러운 언약궤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그가 지금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보시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포자기하고 있는 것인가요? 절망 속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소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기를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옆으로 데려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계신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예배를 드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심으로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계시고 그 다음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닥친 그 상황의 의미를 그때 다윗은 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이전에 지은 죄에 대한 형벌로 주어진 것이지 몰라… 어쩌면 이것은 이제 왕의 자리에서 그만 내려오라는 하나님의 싸인인지 몰라…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이것이다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상황의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 일이 결국 어떻게 마무리될 지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 일은 그의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그걸로 끝인가요?

다윗은 그렇게 결론짓지 않았습니다. 그의 죄와 그것의 파괴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진심으로 뉘우치며 긍휼을 구하는 그의 중심을 보시고 그에게 호의를 베푸시면, 어쩌면 다시 원래의 자리에서 그분을 뵐 수도 있을 것이고,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가장 선한 길로 그분이 이끄실 것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께 당연한 권리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듯이 말하고 행동합니다. 아닙니다. 그럴 권리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한 어떤 행동이 되돌릴 수 없는 최종 결론이라는 듯 말하고 행동합니다. 아닙니다. 그럴 권한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늘 다시 소망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실수나 잘못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위치는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본질을 붙들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침반의 붉은 바늘이 어디에서든 북극을 가리키듯, 다윗은 늘 다시 바라보아야 할 분을 바라보았고, 붙들어야 할 것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궤와 함께 피난길에 올라도 되는 일 아닌가? 그럼 마음에 위안도 받고, 정치적 효과도 얻고, 또 그 앞에서 ‘은혜롭게’ 예배도 드리며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다려도 되는 일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도 다윗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진심의 표현,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믿음과 소망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일과 세상적 성공과 인기와 풍요를 누리며 사는 일이 병존할 수 있을까? 이 둘을 다 잡으려고 하는 사람은 단연컨대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단호한 말씀과 함께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우선순위를 제시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고 약속의 말씀을 주시죠. “그리하면 필요한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일전에 이스라엘 장로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세가 기울자 다급한 마음에 하나님의 궤를 전장으로 메어오게 했습니다. 언약궤가 자기 진영에 있으면 싸움에서 이기리라 기대한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됐나요? 이스라엘은 패배했고 언약궤도 빼앗겼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여호와 하나님이 블레셋 사람들의 신보다 약해서?

그럴리가요.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아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차라리 블레셋 땅에 거하기를 선택하시고 거기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일전에 사울 왕은 선지자 사무엘에게서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그가 그때라도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사죄하고 은혜를 구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하나님의 시선보다 백성들의 시선을 더 의식합니다. 본질을 붙들지 못한 것입니다.

반면, 다윗에게는 오직 하나님만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면서도 그가 자기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산 길을 올라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백성들이 그를 어떻게 보느냐보다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그에겐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울며 걸어간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그 피난길에 만난 그의 신하들에게 이런 저런 일들을 지시했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며 그들의 아들들인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통해 그에게 소식을 전해주기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겠다고 나아온 모사 후새에게는 압살롬에게 숙이고 들어가 압살롬의 모사인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후에 이 지시는 적중했고, 압살롬의 패배와 다윗의 귀환을 낳는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 다윗은 그것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을 한 것 뿐이었습니다. 다윗의 말처럼,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셨기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이 사람 저 사람이 각자 이런 저런 일을 꾀하고 행한다 할지라도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지금의 그 상황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 상황을 마무리지으실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는 믿었습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시입니다.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옛날 다윗의 상황과 오늘 우리의 상황이 꼭 같진 않겠지만, 그날에 다윗이 발휘했던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지금 나는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의 미래는 무엇에 달려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여전히 우리는 좋은 것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얼마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다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섭시다!

깨끗한 믿음으로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분을 바라보고 붙들어야 할 것을 붙드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다시 깨끗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