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4년 1월 21일)
- 요한복음 1장 35-51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더 큰 일을 보리라 -요1,35-51.docx
<요한복음 1:35-51>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 경험했던 일들을 보여줍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거니시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이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그의 제자 둘이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 두 사람 중 하나였던 안드레는 그날 예수님을 만난 후 바로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가 말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리고 시몬을 데리고 예수께로 옵니다.
이튿날 예수님은 그 두 형제와 한 동네 사람 빌립을 만나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게 된 빌립은 이후 나다나엘을 찾아가 자신이 만난 그분을 전하고 친구를 예수님께로 데려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안드레가, 안드레를 통해 시몬이, 그리고 빌립을 통해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제자가 되는 과정은 이처럼 다른 누군가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가 직접 그분을 ‘보는’ 일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다’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세어 보니 열한(11) 번쯤 됩니다. 이것은 복음서 기자 요한이 이 ‘보는’ 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36) 자기 옆에 있던 제자들에게 그분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오는 그 두 사람을 보시고(38) 그들에게 “와서 보라”(39) 말씀하십니다. 이어 그들은 가서 보고(39)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합니다.
안드레가 데리고 오는 한 사람을 보시고(42) 예수님은 그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며 장차 베드로가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며 회의적 반응을 보이는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그저 “와서 보라”(46) 말합니다.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47)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어떻게 아시느냐 묻는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빌립이 그를 부르기 전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그를 보았다(48)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하자 예수님은 “내가 보았다(50) 하므로 믿느냐” 하시며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 믿고 제자가 된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분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그들이 보리라(51)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보는’ 이야기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증언을 받고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들이 그분에게서 무언가를 봅니다. 그 보는 경험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을 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예수님이 보십니다. 그분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 사람의 속에 있는 것까지 참으로 깊고 넓게 보십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가서 그분을 보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경험이 그들 속에 믿음을 창조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께 와서 보고 믿은 사람들, 그리하여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무언가를 봄으로써 그 눈에 빛을 받아, 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을 이제는 보게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보면서 삽니다. 육안으로도 무언가를 보지만 영안으로도 무언가를 봅니다. 사람마다 육신의 시력에 차이가 있듯이 영적인 시력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2:9-10)
누가복음에서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11:34-35)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지금 내가 어떤 눈으로 보며 살고 있나 생각하게 합니다.
뒤따라오는 두 사람을 보시고 예수님은 돌아보시며 물으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What do you seek? What are you looking for?)
예수님을 향해 오는 사람에게는 구하는 무언가가 있는 법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며 예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질문에 그 두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대답이 아니라 또 다른 질문 같지만 사실 이 질문 속에 이미 그들의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랍비’, 즉 선생이란 호칭으로 불렀다는 것은 처음에 그들이 예수님께 구한 것이 ‘가르침’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께 무언가를 배우길 바랐고, 세례 요한보다 더 나은 가르침을 그분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가서 직접 보는 경험을 통해 그들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여러 랍비들 중 하나로 치부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에 예수님을 ‘랍비’라 부르며 다가갔던 안드레는 그날 예수님께 가서 보는 경험을 통해 이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은 나다나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렛에서 어찌 메시야가 날 수 있단 말인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가 어찌 그리스도일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가서 보는 경험을 통해, 그저 괜찮은 ‘랍비’쯤 되는 사람이려니 생각하며 다가가던 그의 태도는 전면 수정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전의 회의적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너무나 엄청난 고백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게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봄(seeing)이 봄(seeing)을 부르는 것입니다. 가서 만나 보고 나니 비로소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서 보는 체험을 통해 그들의 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전에는 보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고 다시 보게 되는 일과 같은 기적이 그들의 삶 속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한 사람들은 그분을 바른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을 직접 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빛으로 세상에 오신 그분으로부터 눈에 빛을 받아 모든 것을 새로 보게 되는 일이 필요합니다.
물론 오늘의 우리는 그날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몸으로 직접 만나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그분을 볼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그저 예수님의 외양을 본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습니다. 그분에 대한 이전 사람들의 증언들을 담고 있는 성경을 통해 주로 그분을 접하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속에서 그분을 접하고 알고 믿게 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례 요한을 통해 안드레가, 안드레를 통해 시몬이, 그리고 빌립을 통해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접하게 된 과정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접하기 시작한 예수님에게서 이후 저는 그분이 참으로 누구신지를 알게 해주는 결정적인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제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제게 예수님을 증언해준 다른 누군가의 말 때문이 아니라 제가 친히 그분에게서 듣고 보는 경험을 통해 그가 참으로 누구신지 알기 때문입니다(요4:42). 이것은 마치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께 나아간 안드레가, 또한 빌립을 통해 예수님께 나아간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친히 만나 보고 난 후에 그분에 대한 인식과 고백이 바뀌게 된 과정과 비슷합니다.
빌립이 전하는 말에 회의적 반응을 보이던 나다나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로 나아간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의지로 예수님을 내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지만, 실은 예수님이 나를 그분에게로 끌어당기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적어도 나다나엘은 자기의 좁은 틀 속에 자신을 가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자신을 개방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초기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구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 두 사람은 “어디 계십니까?”라고 되묻습니다. 이 말을 통해 그들이 묻는 것, 그들이 알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어디’라는 말을 들으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어떤 장소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 그 당시 그분이 머물고 계시던 곳, 어떤 집, 어떤 숙소, 어떤 거처… 거기가 어디냐고 묻고 있는 걸까요?
이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질문에서 ‘계시다’로 번역한 헬라어는 ‘메노’(μένω)입니다. 이 단어는 어딘가에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머물며 ‘거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여 그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며 거하는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또한 예수 믿는 자들이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초대받아 그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며 거하는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많이 사용됩니다(1:32,33; 8:31,35; 14:10,17; 15:4,5,6,7,9,10) .
예를 들어,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μένω)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4:10) 여기,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는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메노’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내 안에 거하라(μένω)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μένω)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μένω)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여기서 ‘거하다’, ‘붙어 있다’, ‘있다’로 다 다르게 번역된 단어가 원어성경에서는 다 같은 단어 ‘메노’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어떤 장소에 있다기보다 어떤 관계성에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다시 말해, 이 ‘메노’(μένω)란 단어는 ‘상태적인 거함’ 혹은 ‘관계적인 거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장소적인 거함’을 나타낼 때는 주로 ‘오이케오’(οἰκέω)란 단어가 사용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어떤 장소에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장소에 있든 거기서 예수님과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읽다 보면, 복음서 기자 요한이 사용한 단어 하나 하나는 잘 선택된 말들이며, 사용된 단어들이 단순히 문자적 의미를 넘어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38-39절에 ‘계시다’ 혹은 ‘거하다’로 번역된 말들은 모두 헬라어 원어성경에서 같은 단어, 즉 ‘메노’(μένω)입니다. 이것을 감안하여 본문을 다시 읽으면…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거하십니까(μένω)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거하시는(μένω)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μένω)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그들이 예수님께 “어디 거하십니까?” 라고 물을 때 그 질문의 초점은 어떤 눈에 보이는 거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나님과 더불어, 또한 사람들과 더불어 어떤 관계성 속에 거하고 있는지에 있었던 것이고, 그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와서 보라!” 하신 것은 그분이 거하시는 그 관계성 속으로 그들을 초대하신 것이고, 이에 그들은 가서 그분이 하나님과 더불어, 또한 사람들과 더불어 어떤 관계성 속에 거하시는지 직접 보았던 것이고, 그것을 다만 관찰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어느덧 그 관계성 속으로 들어가 그 날 예수님과 함께 거하였던 것이고, 그 날의 경험이 너무나 특별하여 그 때가 언제였는지 그 시간까지 특정하여 기억하고자 했던 것이고, 그 날 그렇게 예수님께 가서 보고 함께 거하는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 초기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본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이 거하시던 자리였다면, 오늘의 우리 역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속에서 능히 그 거하시는 자리를 볼 수 있고, 또 거기서 그분과 함께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μένω)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1-32)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μένω)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μένω)”(요15:10)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μονή)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요한복음의 이어지는 말씀들 속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 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거하시는 자리가 어디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자리가 예수께서 우리에게 함께하자고 초청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내가 그분에 대해 이전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던 것을 보고 알게 되는 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한 내가 예수님께 나아가기 이전부터 이미 그분이 나를 알고 계셨고 또 보고 계셨음을 깨닫게 되는 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몬이 예수님께 자기를 소개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그가 요한의 아들 시몬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어쩌면 이것은 당시 그 시몬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정보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시몬이 누구인지에 관해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심지어 시몬 자신보다도 더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베드로/반석)라 하리라” 예수님은 그 시몬이 장차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또한 그 예수님을 통해 후에 그가 만나게 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혹은 어느 자리에 어떤 모습으로 거하게 될 것인지, 그 첫 만남의 순간부터 이미 내다보며 알고 계셨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정체성(identity)에 관한 질문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사는 질문이요, 특별히 청소년, 청년들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가 누구의 자녀이고, 어느 학교 출신이고,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고, 어떤 재능과 개성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열망으로 자신이 남들보다 뭘 잘 하고 어떤 면에서 다른지를 찾아내고 증명하려 애쓰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놓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우리의 신분을 인식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길로 부르시는지를 인식하고 그 길에서 진정 ‘나’다운 모습으로 빚어집니다.
시몬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베드로’(반석)라는 정체성은 아직 인식되지도 않은 상태였다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예수님께 가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이 맡기신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 그의 속에 감춰져 있던 그 ‘베드로’라는 정체성은 시나브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가는 일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일은 서로 동떨어져 있는 두 일이 아니라 하나로 엮여 성취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예수님 안에서 참된 나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또한 나다나엘이 그분께 자기를 소개하기 전에 이미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여기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겸손함과 정직함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란 뜻일 겁니다(시32:2).
그러자 나다나엘이 묻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빌립이 그를 부르기 전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그를 보았다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대답이 거기 오기 전까지 나사렛 예수에 대해 회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나다나엘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하고, 급기야 그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옵니다.
도대체 나다나엘은 그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때 그에게서 무엇을 보셨던 걸까요? 나다나엘이 그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고 있던 외적인 행동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거기 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서 보신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본문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사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혹은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혹은 멀리서 누군가가 보기에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거기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처럼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던 어떤 일을 눈여겨 보시고 그때 나다나엘이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고 있었는지 그 속에 있는 것까지 정확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2-3절에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다 알게 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다 아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믿게 된 자에게는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야곱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오늘 본문 마지막 절 속에서 예수님은 그렇게 예수님께 와서 보고 믿은 사람들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사다리가 되시고, 그 위로 천사들이 왕래하며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며 예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 너머의 세계로 여러분을 인도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와서 보라” 말씀하시며 우리를 그분이 거하시는 곳으로 초청하십니다. 그 초청에 응하여 나아갈 때 거기서 우리는 빛을 받아 마침내 보게 될 것이며 믿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에 보았던 것보다 더 큰 일을 계속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이 ‘봄’(seeing)의 은혜를 날마다 더욱 누리며 전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