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출애굽기 16:11-21>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21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신비한 양식 만나에 관한 내용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빵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모두 주려 죽게 하는도다”

먹을 것을 찾을 수 없는 광야에서 그들이 겪었을 곤고함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놀라운 것은, 그 곤고한 상황이 낳은 기억의 왜곡입니다. 과거 이집트는 그들이 학대와 압제를 당하던 장소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거기서 해방되기를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차라리 그때가 좋았어! 고기 가마 옆에서 노예로 살 때가 지금처럼 빵 없이 자유인으로 사는 것보다 나았어! 이 사람들이 바로 얼마 전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맞나요? 현재의 결핍이 기억을 왜곡하고 소망을 압도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양식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늘에서 비 같이 내려주겠다 하십니다. 정말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저녁에는 하늘에서 메추라기 떼가 내려와 진을 덮습니다. 아침에는 이슬이 마른 후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맺힙니다. 사람들이 서로 묻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던 양식이었습니다. 모세가 알려줍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이처럼 만나는 출처가 분명한 양식,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양식이었습니다.

만나를 주시며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만나는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매일 내렸고, 매일 거두라 하셨습니다. 또 “먹을 만큼만” 거두라 하셨는데, 이는 남기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양이면서, 또한 각 사람이 먹기에 충분한 양을 의미합니다. 거두는 자가 자기 장막에 있는 식구수를 고려하여 그날에 필요한 딱 그 만큼을 거두라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였습니다. 당연히 그랬겠죠. 장막마다 식구수가 달랐을 테니까요. 그런데 “오멜로 되어 본즉” 다시 말해, 각 장막의 식구수 만큼 오멜로 환산하여 거두었더니,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 합니다. 모두가 딱 맞게 거두고 충분히 먹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또 명령하셨습니다.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둔 사람들이 있었다 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었다 합니다. 전날 거둔 만나가 썩지 않는 기적은 오직 안식일에만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만나는 쌓아놓을 수 없는 양식, 그 날 하루만을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각 가정이 먹을 만큼 거둔 후에 햇볕이 뜨겁게 쬐면 만나는 스러졌습니다. 아침에 하늘 양식으로 풍성하던 그 광야 식탁은 해가 떠오르며 다시 원래의 척박한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다시 그곳엔 하늘 양식 만나가 풍성히 차려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사십 년 동안 이 만나를 먹었다 하니, 그들은 이 기적같은 일들을 사십 년간 매일같이 체험한 셈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어지는 17장에서 그들은 또다시 마실 물이 없다는 이유로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우리가 광야에서 목말라 죽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을 보니,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잘 모르겠다! 바로 그 날 아침에도 그들은 만나를 먹고 하루를 시작했을 텐데 말이죠.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이런 결핍의 상황을 주셨을까요? 그냥 필요한 거 미리미리 알아서 주셨으면 그들이 하나님 원망하거나 시험할 일도 없었을 텐데요. 어차피 주실 꺼였잖아요. 빵 가지고 불평하니 만나 내려주시고, 고기 가지고 불평하니 메추라기 내려주시고, 물 가지고 불평하니 바위에서 물 나오게 해주셨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그 없는 상태, 결핍의 상태를 겪게 하신 거죠?

신명기 8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2-3)

결핍의 상황이 없었으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더 잘 믿었을까요? 아닙니다! 매일같이 만나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매일같이 반복되는 기적은 그들에게 더이상 기적으로 인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결핍의 상황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믿을까요? 아닐 겁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더욱 굳건해지면서, 속으로 하나님을 더 우습게 여기며 살겠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결핍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결핍의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부요하심을 체험합니다. 만나를 주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그들이 체험케 하심으로, 사람이 과연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그들이 점점 깨달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때로 결핍의 상황을 허락하시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결국 체험케 하시는 것은 ‘부요함’이며 ‘넘쳐흐름’입니다. 하늘 양식 만나는 각 사람이 먹기에 충분할 만큼 주어졌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넉넉한 양으로 지면을 덮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떡이라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이에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이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삶의 상황 속에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이 세상의 경제는 ‘결핍’의 경제입니다. 결핍을 지향하는 경제라는 뜻이 아니라 결핍에 기반한 경제, 결핍에 의해 돌아가는 경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결핍이 두려워 일하고, 결핍이 두려워 쌓아둡니다. 결핍이 두려워 쉬지 못하고, 결핍이 두려워 나누지 못합니다. 이 결핍의 경제는 경쟁의 과열을 낳습니다. 끊임없는 비교가 이루어지고, 불만족의 요소는 계속해서 늘어만 갑니다.

반면 하나님 나라의 경제는 ‘풍요’의 경제입니다. 풍요를 지향하는 경제라는 뜻이 아니라 풍요에 기반한 경제, 부요함과 넘쳐흐름의 체험에서 발원하는 경제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이 풍요의 경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진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모두가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 발에 아낌없이 부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생겨난 초대교회는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유무상통의 공유경제를 실천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4절에 놀라운 구절이 나옵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그 이유가 다음 절에 나옵니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 바울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 있던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구제헌금을 준비하고 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격려하며 말합니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8:14-15)

풍요에의 집착은 역설적으로 그 사람 내면의 결핍을 드러내고, 없는 중에도 감사하고 자족하며 나눌 줄 아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 사람 내면의 부요함을 드러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은 우리가 받은 것이 모두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것이라는 고백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돌보시리라는 믿음에 기초합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그 전과 동일한 생활패턴 속에서 좀 더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소속과 정체성과 사명 가운데 전혀 다른 삶의 틀 속에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을 먹이시고 돌보시는 분입니다. 이 땅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각종 동물들과 식물들, 생명을 가진 그 모든 피조물들을 먹이고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경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의 경제의 수혜자들일 뿐 아니라 참여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는 것들로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생명들을 잘 먹이고 돌보며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결핍과 경쟁의 경제가 아니라 풍요와 나눔의 경제를 실천하는 공동체가 될 때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참되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패턴과 방식을 따라 성공하고 부자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따라 참되게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참된 삶이 세상과의 다름이 된다면, 그 다름이야말로 세상을 하나님 나라에로 초대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래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 양식을 비 같이 내려주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날마다 먹을 것과 쓸 것을 공급해주고 계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결핍의 상황을 맞기도 하지만, 그 때마다 다시금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경제는 온 세상 모든 생명들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제는 풍요의 경제, 나눔의 경제입니다. 하난님은 우리 모두를 이 하나님의 경제에 참여하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언제나 우리를 먹이시고 돌보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그 풍성한 은혜 안에 거하며,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우리 주위 사람들, 생명들을 잘 먹이고 돌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위한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