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사랑

<고린도후서 5:14 ~ 6:10>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성도 안에서 역사하는 사랑’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서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마치 앞에 언급된 아가페 사랑의 모든 속성들을 종합적으로 표현해놓은 느낌입니다.

이 내용을 두 부분으로 묶어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사랑’… 그리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는 사랑’…

오늘은 이 중 앞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딘다… 혹은,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한다…

여기 ‘참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앞에 4절에 “오래 참고”에 쓰인 단어와 다른 것입니다.

앞에 쓰였던 ‘마크로투메이’라는 단어는 불같이 성내는 것과 반대 개념, 즉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비함과 인내심’을 표현한다면,

여기 쓰인 ‘스테고’라는 단어는 ‘덮어주다’, ‘가려주다’, ‘품어주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잠언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 두 말씀은 사랑이 내포한 이 참음의 속성, 즉 ‘덮어주고’ ‘가려주고’ ‘품어주고’ ‘기다려주는’ 속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할 때 ‘견딘다’는 것은, 위험하고 곤란한 상황 속에서도 바른 자리에 굳게 서서 끝까지 잘 버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면 우리가 이렇게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다,

즉, 내게 해를 끼치는 사람도 끌어안으며 끝까지 바르고 굳게 설 수 있다는 의미겠습니다.

이 ‘참고 견디는 사랑’에 대해 고린도후서 본문을 통해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의 인생에는 고난이 많았습니다. 참고 견뎌야 할 순간이 많았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가 겪었던 고난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듣게 되면, 도대체 그런 조건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본문 6장 4-5절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많이 견뎌야 했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역경을 무수히 참아내야 했습니다.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도 겪어야 했고, 고된 사역으로 못 자고 못 먹는 때도 많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8절에서 바울은 그 일들을 좀더 상세히 소개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의 이 고난은 그가 주님께 부름받던 시점부터 이미 예측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16절에 보면, 아나니아를 그에게 보내시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그래서 바울은 그가 복음전도자로 살아가며 겪어야 했던 그 모든 고난의 의미에 대해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그 계속되는 고난의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에게도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참고 견디며 이겨낼 수 있었을까?

결국, ‘사랑’입니다!

그의 속에 역사하고 있던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이 그 삶의 동기이자 능력이었습니다.

본문 5장 14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매우 인상깊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여기 ‘강권하다’라는 표현은 무언가에 단단히 매이고 붙잡힌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의 내면을 강하게 붙들고 지배하며 놔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것, 그 고된 복음전도자의 일을 그만둘 수 없다는 것, 그와 다른 모습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시대 선지자 예레미야의 입에서도 비슷한 고백을 듣게 됩니다.

예레미야 20장 7-9절 말씀 찾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선지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동족의 파멸과 멸망을 예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다니니 사람들이 가만 있을 리 없습니다.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되었다 합니다. 가까운 이들조차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그것이 고통스러워 더이상 주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다시 손을 들고 만다 합니다.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자기 속에 들어와 있는 그 뜨거운 불덩이 같은 하나님 말씀을 토해내지 않고는 자기가 죽을 것 같아서 결국 또다시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선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내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는도다…

그 강권하시는 사랑에 붙들리고 매여서, 그는 모든 걸 무릅쓰고 그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더하여 그 사랑의 복음 전하는 일에 그 자신이 장애물이 되는 일 없게 하려고,

그는 스스로 남보다 더 많은 고난을 부러 감수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하였습니다.

그 ‘사랑의 강권하심’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일이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인 바 된 사람들이란 얘긴데,

여러분 이것이 사실입니까? 정말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내면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때론 감격스럽게… 때론 고통스럽게…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며 살지 않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그냥 확 받아버리고 싶은데, 왜 그러지 못하지요? – ‘그 사랑’ 때문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확 내쳐버리고 싶은데, 왜 그러지 못하지요? – ‘그 사랑’ 때문입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하는 동기가 됩니다.

참고 견디기 힘들 때마다 우리는 다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그 속에 담긴 사랑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다는 사실을… 그 속에 담긴 의로움을…

또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다는 사실을… 그 속에 담긴 그분의 소망을…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그렇게 죄에 대하여 죽을 때, 우리도 죄에 대하여 함께 죽었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세례의 의미가 바로 이것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우리는 죽었습니다!

로마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무관한 나, 그리스도와 따로 존재하는 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왜 죽으셨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내 하고싶은 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이전엔 그런 나로 존재하며 살아왔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나는 이제 죽고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는…

그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새로 태어난 나… 오로지 그뿐일 것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급진적 변화를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제 우리는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바라보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그저 저주받은 자, 징계받은 자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 사랑을 나타내신 주님으로 바라보게 된 것처럼,

이제 우리는 나 자신도, 다른 사람도, 또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세상적인 표준으로 바라보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바라봅니다.

또한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과,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관계 맺습니다.

이렇게 새로워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15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이렇게 다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으신 것은 더이상 우리가 내 이기적인 욕심과 혈기를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좇아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사는 자들이 되는 것…

하나님은 바로 이 방향으로 오늘도 우리를 빚어가고 계시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의 의미도 바로 이 선하신 뜻 안에 들어있는 줄 믿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따라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난 앞에서 절망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소망하면서,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딥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바울은 그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자기 삶에 놀라운 ‘선한 능력’이 나타나고 있었다 말합니다.

본문 6장 6절과 7절 함께 읽겠습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었고, 알아야 할 것을 알 수 있었고,

사람을 인내하며 품을 수 있었고, 성령 안에서 꾸밈없이 사랑할 수 있었고,

또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옳은 길로 걸어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난의 현실 한가운데 있었지만, 또한 이 선한 능력에 감싸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주목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 이하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또한 로마서 8장 35절 이하에서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바울은 그 치열했던 삶을 ‘영광’과 ‘수치’가 공존하고, ‘비난’과 ‘칭찬’이 공존하는 삶이었다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역설적인 삶을 묘사하고 있는 8-10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어떻게 이런 역설이 가능합니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놀랍게 일하십니다!

무엇이 참된 것이냐는 목소리 높인다고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되신 그분의 편에 설 때, 그 진리에 속할 때, 언젠가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 앞에 이름 내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 날에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해주시는 일이 중요하지요.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우리 힘으로 다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사나 죽으나 늘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삶이 평탄하여도 늘 기쁨 없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안 좋은 상황 중에도 항상 기뻐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분명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의 이유를 자기 안에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많은 걸 가졌어도 그것으로 주위 사람을 전혀 부요케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그가 정말 가져야 할 것을 아직 가지지 못했음을 반증합니다.

반면, 가진 것이 없어 보여도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실상 모든 것을 가진 자일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로마서 8장 38-39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하는 동기가 됩니다.

또한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무엇보다 사랑을 구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모든 상황 중에 늘 참고 견디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당신의 사랑이 우리로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가 그 사랑으로 참고 견디며 승리할 수 있도록 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