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9월 6일)
- 로마서 3장 27-31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믿음으로 말미암아 - 롬3,27-31.docx
<로마서 3:27-31>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속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움을 나타내셨고,
이 의로움의 토대 위에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 하였습니다.
이 바울의 메시지 가운데 유대인들에게 가장 거슬리는 대목은 무엇이었을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이었을 거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가장 지지를 받고 있던 구원 교리는
‘율법의 행위에 의한 칭의’ 교리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행하는 자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후에 그 사람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지 지금 알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지금 율법을 어떻게 지키며 사는가를 보면 된다.
유대인 대다수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바울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후에 그 사람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지 지금 알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지금 예수를 어떻게 믿으며 사는지 보면 된다.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기에 바울은 이토록 믿음을 강조하는 것일까?
오늘 본문에 ‘믿음’이란 단어가 다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By faith’,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를 믿음으로!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를 믿음으로!
28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율법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구원은 그렇게 진행될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우리가 응답하는 방식으로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미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일을 하셨습니다.
죄 아래 팔려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정말 할 일은 그것을 믿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실에 동의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 믿는 대상과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이 나의 구원이 됨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될 때,
이와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음이 확실해집니다.
한 사람 마음 안에서 일어난 보이지 않는 진실한 변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 속에도 의미있는 변화를 초래하고,
그 변화된 현실이 그 사람 본인에게도 감지됩니다.
참으로 믿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음을 느낀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히11:1)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나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이단들이 장난을 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새로운 현실을 증거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믿는 자는 압니다. 믿는 자는 느낍니다.
믿음은 복음이 그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켰다는 확실한 표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참으로 믿어 구원에 이르니,
우리에겐 아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믿는 자는 오직 예수 십자가만을 자랑할 뿐입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예수 이외에 다른 걸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가 예수 십자가 외에 다른 걸 자랑하고 있다면,
거기엔 문제가 있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예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우리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에 내포된 두 번째 의미는
‘모두가 예외 없이 믿음으로’입니다.
이방인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무엇인가?
예수를 믿음으로!
그럼 유대인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무엇인가?
그 또한, 예수를 믿음으로!
모두가 예외 없이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아니다!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복음은 하나님에 대해 독점권을 가졌다 말하는
일부 사람들의 교만한 주장을 무효로 만듭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온 세상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가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렸습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이제 그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시작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며,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
그가 지금 어떤 집단에 속해 있든 간에,
하나님은 그분이 행하신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분 앞에 바로 세워 주신다는 뜻입니다.
서울 종로 지금의 인사동에 승동교회라는 오래된 교회가 있습니다. 1893년에 미국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교회 역사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후에 이 교회 목사님이 되시는 분 중에 조선왕조 왕손 출신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재형 목사님이라는 분인데요, 어쩌면 왕이 될 수도 있던 서열의 왕손이었습니다.
이 분이 예수 믿기 전에 누구에게 전도를 받았냐면, 엄귀현이라는 이름의 한 마부에게 전도를 받았습니다. “나리, 황송하오나 오늘부터 예수를 믿으소서. 그래야 나리도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잖아요. 천민이 양반에게 이런 얘기 한다는 게 사실 말이 안 돼죠. 더구나 이재형은 보통 양반이 아니라 왕손이었으니 정말 어이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이재형은 버럭 화를 냈다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두었던 것 같습니다. 후에 먼저 기독교인이 된 그 아내의 권유로 이재형은 승동교회 사경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를 믿게 되죠.
어느날 예배당 뒤쪽에 앉아 가만 보니까 저 앞에 아는 얼굴이 있습니다. 마부 엄귀현이었습니다. 이재형은 너무 반가워서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그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형님! 이렇게 만나니 반갑구려. 내게 전도하던 엄가 아니시오.”
이에 당황한 엄귀현은 “나리, 저를 형님이라 부르다니요. 황송하옵니다. 그런데 나리께서도 예수를 믿으십니까, 할렐루야!”
여러분, 교회란 본래 이런 곳이고, 복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천민이 왕손에게 ‘형님’ 소리 들을 수 있는 곳이 교회이고,
왕손이 천민을 ‘형님’이라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사람들 사이에 놓인 차별의 장벽을 부숩니다.
예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존재가 됩니다.
믿음은 모든 인간적 차별을 초월한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시며,
한 믿음 안에서 우리 모두는 형제 자매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에 내포된 세 번째 의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세운다’입니다.
믿음을 강조한다는 것은 율법을 파기하겠다는 뜻인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율법대로 살지 않겠다는 뜻인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율법이 굳게 세워진다,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오히려 율법은 온전히 성취되리란 뜻입니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는 것은
율법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죄의 영향력 때문이었습니다.
죄가 선한 율법을 악용하여 사람을 억압하고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십자가 복음이 믿는 자들 속에서 역사할 때,
죄의 권세는 힘을 잃고 성령이 신자의 삶을 이끌어갑니다.
‘믿는 마음’은 복음에 의해 변화된 마음이며, 하나님께로 돌아선 마음입니다.
‘믿는 마음’은 하나님과 한 마음 한 뜻으로 걷는 일이 좋아진 마음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마치 체질이 바뀐 사람과 같습니다.
전에는 야채를 좋아하지 않고 전혀 먹지 않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야채 맛을 알게 되어 야채를 즐겨 먹게 되듯이,
복음을 믿게 된 사람도 이제 하나님의 뜻을 즐겨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하기 때문에 억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 있다보니 자연스레 그 길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세부규정에 집착했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기본정신에 집중하셨습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을 포괄한다 하셨고,
믿음으로 이 말씀을 따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이 길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된 사람으로서,
‘자유로운 사랑의 종’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지극히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을 위하여 봉사하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서로 모순되는 듯한 이 두 가지 진술이 어떻게 둘 다 참이 될 수 있을까?
비밀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유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체험 속에서 얻어지는 영적인 자유입니다.
본래부터 율법은 ‘행위로’라는 곡조에 맞춰 부를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라는 곡조에 맞춰 부를 때 가장 아름답게 들릴 수 있는 노래였습니다.
율법은 언제나 하나님의 율법이므로 폐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의 예수 따르는 삶 속에서 성취될 것입니다.
‘믿음’이야말로 율법이라는 가사를 가장 제대로 이해하는 곡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받아들이는 귀입니다.
믿음은 ‘눈’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을 참된 안목으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믿음은 또한 ‘손과 입’입니다. 말씀으로 듣고 영으로 본 것을
우리는 이 믿음의 입과 손으로 내 안에 받아들여 누립니다.
참으로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절묘한 장치입니다.
결국,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씀이 놀랍게 성취될 것입니다.
참으로 믿는 사람이 참으로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모두가 예외 없이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그 믿는 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법은 놀랍게 성취될 것입니다.
참되게 믿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 모두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하옵소서. 참되게 믿고 구원을 얻게 하옵소서. 은혜가 늘 우리 속에 역사하게 하시고,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