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7월 21일)
- 히브리서 11장 1-6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믿음의 삶 - 히11,1-6.docx
<히브리서 11장 1-6절>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성경은 믿음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2:8)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말씀합니다.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이 왜 중요한가?
본문 1절에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소망하는 바가 결국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우리는 소망합니다.
지금의 현실 그 너머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인내함으로 그 약속하신 것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또한 믿음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확실한 그 무엇을 마음으로 보며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보게 됩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을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직접 그분을 볼 수는 없지만 확실히 계시며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믿음의 눈을 들어 마음으로 보며 행하는 일,
그것은 당장에 사람의 눈에 보이진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포착되고 인정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조금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 겁니다.
실제 존재하는 것들에 비할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를 호흡하며 살아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을 앓고,
있는 줄 몰랐는데 있었던 무언가에 뒤통수를 얻어맞거나 새삼 감동하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법규나 계약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 보이지 않는 사랑에 기초해 관계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믿으며,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신뢰와 소망과 사랑에 기초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잠시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을 따라가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눈 앞에 하나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우리가 볼 수 있는 어떤 것, 선재하던 어떤 물질로부터 온 것일까요?
성경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 하고,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그 창조의 장면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이미 형성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게 보이는 한 예술가의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그것이 단지 흙이나 물감처럼 보이는 재료에서만 왔다고 생각하는 건 우스운 일 아닙니까?
오히려 그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영감과 재능, 그 보이지 않는 기원을 증거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입니다.
이어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의 예를 통해 ‘믿음의 드림’에 대해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지요?
하나님께서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예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물만 받으신 하나님, 그분은 무엇을 보신 것입니까?
그 예물 드린 사람의 마음, 그 보이지 않는 실체를 보신 것입니다.
이후 아벨은 형 가인의 손에 죽었고, 더이상 그는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가 하나님께 나타내었던 믿음은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날의 일을
지금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5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에녹의 믿음에 대해 말합니다.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에녹에 관한 기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서 눈에 띠는 내용은 그가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과,
이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더 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주석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세상에 보이게 존재하던 한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없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라진 자는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믿음의 삶이 그 보이지 않게 된 이의 이후 행방을 말해줍니다.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으므로,
아마 분명 그 이후로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믿음이 그가 있는 곳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히브리서 기자는 6절에서 다음과 같이 믿음의 삶을 권면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여기,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믿어야 할 두 가지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즉 그분의 살아계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 즉 그분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어찌보면 매우 단순한 것인데, 이 믿음을 실제로 늘 발휘하며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듯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도,
과연 저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이 맞는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에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오고, 또 그것이 오래 지속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에 불의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선량한 이들이 희생될 때…
다시 또 다시 터져나오는 질문: 하나님은 과연 계시는가?
이차대전시 아우슈비츠의 참상은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 사회 진보에 대한 기대를 한낫 비웃음꺼리로 만들어버렸고,
그 끔찍한 일을 야기한 원인이 단지 소수의 머리 뿔 달린 악의 화신들에게만 있지 않고,
그저 나와 내 가족을 위해 불의에 침묵하며 무딘 양심으로 생각 없이 살았던 사람들,
그저 위에서 시키는 일 열심히 하며 살았던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그 ‘악의 평범성’ 속에도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었고,
또, 비난의 화살은 하나님을 향해서도 겨누어지면서,
하나님이 과연 계시느냐는 질문, 계시다면 그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분은 어디서 뭐하고 계셨느냐는 질문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답은 무엇일까?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은 믿음으로 그분을 구하는 사람들 속에 살아계시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학살 수용소에 가면 소박하게 기념된 한 지하감옥 방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사형을 언도받고 그곳에 갇혀 있다 죽은 한 폴란드인 신부님을 기념하는 방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이차대전 중 그는 유대인과 난민들을 수도원에 숨겨준 죄목으로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감자 중 한 사람이 수용소에서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지휘관은 그 블록 수감자 중 임의로 열 명을 끌어내 처형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렇게 지목된 열 명 중에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끌려나오며 아내와 자녀들을 떠올리면서 울부짖기 시작하자,
콜베 신부는 조용히 앞으로 나서며 그 사람 대신 자기가 죽겠다고 자원합니다.
청원은 받아들여지고, 아사형을 선고받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로 3주가 지났지만,
그는 함께 갇힌 사람들을 격려하며 기도의 힘으로 여전히 살아 있었고,
결국 나치는 페놀을 주사하여 그들 모두를 살해합니다.
이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콜베 신부는 그렇게 죽었지만, 그가 걸어간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길이
그와 거기 보이지 않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지 않나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은 믿음으로 그분을 구하는 사람들 속에 살아계시다!
수용소 생존자 중 하나였던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이들 가운데서, 더욱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된 이들의 수는 신앙을 포기한 이들의 수를 훨씬 능가했다. 그들은 수용소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수용소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더 깊어졌다.
<인생>(Long Journey Home)이란 책에서 오스 기니스는
유대인이자 철학교수인 필립 할리에 의해 소개된 ‘르 샹봉’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르 샹봉은 3천 명이 거주하는 남부 프랑스의 한 마을로, 독일군 점령하에 있었습니다.
400년 동안 박해를 받아온 위그노 교도들로 구성된 이 용감한 주민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질 뻔한 5천 명 이상의 유대인 아이들을 구하고 숨겨 주었습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와 그 가해자들의 사악함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던 필립 할리는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이 르 샹봉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연구에서 최대한 ‘객관적’인 자세를 취하려 하였고,
그러다 보니 그 일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어느덧 무심해지고 냉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리는 남부 프랑스 산악 지역의 호트 루아르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 우연히 짧은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날도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어느덧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날의 일에 대해 그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가 처음에 르 샹봉에 대한 짤막하고 그다지 정밀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읽었을 때 눈물을 흘린 이유 중 하나는 잔인성과 반대되는 선의 구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 속의 살아 있는 존재들이, 그러니까 특정한 때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역사적 악몽의 시간 속에서도 선을 구현하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즉, 세상의 그 어떤 권위 있고 종교적인 윤리학자도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이후 할리는 한 유대인 구호기관에서의 강연 중에 그 르 샹봉의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 강한 프랑스 억양을 구사하는 한 여성이 일어나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녀는 할리가 소개한 마을이 호트 루아르에 있는 르 샹봉인지를 물었습니다.
할리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의미심장한 침묵이 흐른 뒤, 그녀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 세 자녀의 목숨을 구해 준 마을에 대해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청중을 향해 그녀는 말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폭풍우이고 번개이고 천둥이고 바람이고 비였습니다. 그리고 르 샹봉은 무지개였습니다.
아우슈비츠 대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못 본 체하거나 반대편으로 지나가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어디서 뭐하고 계셨느냐고요?
다 알 순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그분을 찾고 따르던 사람들,
그들 속에 함께 계시며, 바로 그 속에서 역사하고 계셨다는 사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은 믿음으로 그분을 구하는 사람들 속에 살아계신다는 사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불행에 대해, 누군가는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무력함, 하나님의 무관심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 말할지 모르지만,
그 같은 상황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구하며 찾고,
마침내 그곳에 함께하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드러낸다는 이 놀라운 신앙의 역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아닙니까?
예배로, 기도로, 봉사로… 혹은 삶으로… 혹은 죽음으로…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그들 중 일부만이 ‘하나님을 찾는 자’일 것입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것은 영어로 ‘seek’, 즉 ‘구한다’,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바라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투자합니다.
이것이 ‘구하고 찾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이들이 이 기본적인 것을 하나님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께 나아간다 하면서도, 실제 자기 삶 속에서 그분을 구하고 찾는 모습은 적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콜베 신부와 같은, 또 르 샹봉 주민들과 같은, 그 예수님 닮은 믿음과 사랑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나요?
혹시 ‘나는 그처럼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말하고 싶으신가요?
지나온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은 악은 그처럼 소위 ‘평범한’ 사람들 속에 기생하며,
그 평범해 보이는 악들이 한 방향으로 결집할 때 아우슈비츠처럼 끔찍한 일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동시에,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분을 구하고 찾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시며,
따라서 그 평범한 믿음의 사람들이 르 샹봉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선을 드러내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예레미야 29장 13절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여기 ‘온 마음으로’라는 표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이 오늘 나의 삶 속에 역사하길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온 마음으로’ 그분을 구하고 찾으십시오!
예수님도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다” 하신 후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을 구하라,
그리하면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거저 되는 게 별로 없듯, 영적인 세계에도 당연한 건 없습니다.
참된 예배, 깊은 기도, 순전한 봉사, 거짓없는 사랑…
그 무엇도 당연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 속에 담긴 ‘보이지 않는 것’을 하나님을 보십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행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일 것입니다.
때가 되면 그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나며 말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 믿음의 궤적은 다시 우리 뒤에 살아갈 사람들을 위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 보이지 않지만 약속된 그 하나님의 선물을 다른 무엇보다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하나님에게서 끌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장 좋은 것이 이루어지는 통로로 나를 내어드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등을 두드려주시는 곳이다
C. S. 루이스의 이 말을 저는 좋아합니다.
그 날에 주님 앞에 섰을 때 부족하나마 그분이 저와 제가 살아온 삶을 알아주신다면,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그보다 더한 영예가 또 있겠습니까?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우리 앞에 살다간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리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은 믿음으로 그분을 구하는 사람들 속에 살아계신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으라!
이것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늘 믿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늘 믿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