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4년 4월 28일)
- 요한복음 7장 1-18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 - 요7,1-18.docx
<요한복음 7:1-18>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시니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11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 시점이었습니다. 초막절은 유대인의 3대 명절중 하나로, 추수감사의 의미가 있는 가을절기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사십 년간 천막생활하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로 살았던 것을 기억하면서, 일주일간 자기 집 옆에 초막을 짓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에 감사하며 즐기는 기쁨의 절기입니다.
이 초막절을 앞두고 예수의 형제들, 곧 그의 동생들이 예수께 말합니다: “당신이 행하는 일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뭔가 큰 일을 할 것처럼 일어서더니 형님, 도대체 이 갈릴리 촌구석에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 세상에서 뭔가 하려는 일이 있다면 세상의 중심으로 가십시오. 사람들 많은 곳으로 가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야 뭐라도 이루어질 게 아닙니까?
그러나 그 시점에 예수께서 유대 지방으로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예루살렘에서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신 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호기심과 적대감이 고조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동생들의 제안대로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단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의 적대감이 후에 그분을 실제 죽음으로 내몰 것을 그분은 아셨지만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도 그분은 아셨습니다.
본문 6절에,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여기서 ‘내 때’란 예수님의 공생애 말미에 있을 일들, 즉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때를 말합니다. 메시야에 관해 예언된 그 모든 일들이 성취될 그 때(Kairos)를 말합니다. 아직은 그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동생들의 제안대로 움직이길 거부하신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처럼 사람들이 혹할 만한 모습으로 자신을 세상에 스스로 나타낼 생각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참되게 행하는 길에서 아버지께서 그에게로 이끄시는 자들에게 그가 참으로 하나님께 보냄받은 아들임이 알려지길 바라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볼 것이기 때문입니다(17).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행하는 일과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냐가 아닙니다. 그분이 행하는 일과 말이 얼마나 그를 보내신 이의 마음과 뜻에 일치해 있느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계속 이 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삶의 길은 그 시대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고 환영할 만한 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본문 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철저히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걸어간 그분의 삶이 그와 대조되는 세상의 악함을 폭로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미움 받고 배척 받은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중심, 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는 곳에서 활동할 것을 요구하는 그 형제들의 주장은 예수님이 어떻게 알려질 것인지에 대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무지의 원인을 복음서 기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더 많은 사람이 보게 된다면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신지 더 많은 사람이 이해하고 믿게 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요한복음이 계속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적을 본 무리들은 계속해서 더 많은 기적을 요구하고 자기들의 욕망의 틀 속에 예수님을 가두어 이용하려 합니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반응하여 그 좁은 틀 속을 빠져나와 새로운 지평 위에 서는 것이 구원인데 말이죠.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참되게 체화하고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될 것인가에 집중하기보다 세상이 혹할 만한 매력을 스스로 뽐내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을 내 교회로 불러 모을까에 집중하는 교회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길과 반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내가 세상에서 잘 되면,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위치에 서게 되면, 나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리라는 착각은 버리십시오. 순서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내가 영광스런 위치에 서게 되면 하나님이 덩달아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살아갈 때 그런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온전히 증거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형제들의 제안을 거절하시고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갈릴리에 남으셨던 예수님이 얼마후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올라가셨다 합니다. 이것은 앞선 예수님의 거절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감 자체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그들이 제시한 그 올라감의 동기에 대한 거절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동기에 의해 올라가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이 어딘가로 가시거나 가시지 않는 것, 무언가를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에 의해 조종되거나 제약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올라가신 예수님은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서도 거침없이 말씀을 전하십니다.
예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놀랍게 여기며 말합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이것은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능력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예수님 말씀의 소스가 어디냐에 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학파에 속하여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었고, 어느 집단의 입장을 대변하는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그 사람이 어디 출신이냐를 따지고, 진보와 보수,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다만 이것이었습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그는 다만 그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설교자들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보내신 이로부터 온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본문 1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여기 있는 우리는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입니까? 설교자인 저는 보내신 이의 뜻과 일치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있습니까?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은 각 사람의 곤경과 필요를 외면치 않으시지만 그들이 스스로 만든 욕망과 기대의 틀 속에 결코 갇히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자신이 처한 곤경 속에서 주님께 도움을 요청한다는 점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도 잘못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입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그 곤경에 대한 해결책과 구원의 길을 자기 스스로 설정해 놓고 주님을 그 틀 속에서만 움직이시도록 제약하고 조종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 곤경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거기서 벗어나는 일에만, 내가 바라는 그림대로 문제가 해결되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모습, 때때로 우리의 기도가 그렇지 않습니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조국의 멸망이 예고되고 있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시위대 뜰에 갇혀 있던 한 낙심한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부르짖으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도움과 구원을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응답하시리라 합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무엇입니까? 그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그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조국의 멸망,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끝이라 생각하는 그때에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구원을 베푸시리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7장에 ‘스스로’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는 자(4), 스스로 말하는 자(18), 스스로 온 자(28). 이 모두는 예수님께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셨으며, 그 보내신 이의 교훈을 따라 말하셨으며, 그 보내신 이에 의해 자신이 알려지길 바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14,18,22)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보냄받은 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 땅에 사셨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께 보냄받은 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증거합니다. 우리는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기에, 바로 그 영광을 바라며 그분 가신 그 길을 따라갑니다.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