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2년 4월 24일)
- 누가복음 24장 13-35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보지 않고도 믿는 자의 복 - 눅24,13-35.docx
<누가복음 24:13-35>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들어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던 날에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던 이유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길을 가면서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무엇에 대해서요?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14) 사흘 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 그리고 그날 아침에 들려온 소식,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없더라는 얘기에 대해서.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15) 여기 ‘문의하다’는 말을 NIV영어성경은 ‘discuss’란 단어로 번역해 놓았네요. 토론했다는 것이죠. 그 이해할 수 없는 두 사건에 대해 자기들 나름의 해석과 느낌을 서로 주고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옆으로 한 행인이 다가와 같이 걷기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예수님인 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는가? 여러 이유를 상상할 수 있지만, 누가는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힙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16)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행인은, 아니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과 보조를 맞춰 함께 걸으면서 슬쩍 말을 겁니다: “당신들이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오?” 그러자 두 제자는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그 자리에 멈춰 섭니다.
우리도 잠시 멈춰볼까요. 예수님의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봅시다. “요즘 살면서 주위 사람들과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받고 대답을 생각할 때, 여러분의 얼굴빛은 어떻게 변하고 있나요?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선 두 사람 중 하나의 이름은 ‘글로바’였습니다. 낯선 이름입니다. 열두 제자에 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다른 한 사람도 열두 제자에 들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답답하다는 듯 글로바는 말합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있다 오는 길이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알지 못한단 말이오?” 아이러니가 작동되는 순간입니다.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알지 못했던 건 그 행인이 아니고 그 두 제자였다는 것을. 그들은 요며칠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론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 일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행인이 다시 묻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이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일 말이오.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였소. 그런데 우리 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소.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소…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지가 벌써 사흘이나 지났네요…”
그들의 얼굴이 슬픈 빛으로 변했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기대와 희망이 물거품이 되었다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이제 다 끝났다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부활의 소식을 못 들어서 그랬던 걸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들었습니다. 새벽에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시체는 보지 못하고 천사를 보고 와서 전하는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후 몇몇 제자가 무덤에 가서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확인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 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왜요? 믿지 않았으니까! 여인들이 전한 천사의 말대로 예수님이 실제 다시 살아나셨으리라고 그들은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신들 참 어리석기도 하구려.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 어렵습니까.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을 성경이 이미 말하고 있잖습니까!” 누가 하는 말인가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시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이 말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행인의 입으로 듣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서 그 행인은 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두 제자에게 하나 하나 풀어 설명해줍니다. 그 설명을 듣고 있던 그 순간을 회상하며 후에 두 제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들은 그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들이 가려던 마을에 가까이 이릅니다. 그런데 그 행인은 더 가려는 것 같이 합니다. 아쉽지만 여기서 인사하고 헤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제자는 행인에게 거기 함께 머물기를 청합니다. ‘강권하여’라는 표현 속에, 그들이 얼마나 간절히 붙들었는지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 초청에 행인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OK!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날 저녁 그들과 함께 음식 먹을 때, 행인은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떼어 그들에게 줍니다. 보통은 초대한 집주인이 하는 행동인데, 초대받은 행인이 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가려져 있던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았다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시야에서 사라지십니다.
알아보지 못할 때는 보이던 그분이 알아보게 된 뒤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이지 않아도 된다! 보이지 않아도 그 마음에 너무도 확실히 계시니까! 보일 필요가 없는 봄, 보지 않고도 믿는 자의 복입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은 그날에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어떤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옆에 다가와 말을 거실지 모릅니다. “무슨 예기를 그렇게 주고받고 있습니까?” 그럼 우리는 마치 모든 게 끝장난 사람처럼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서 되물을지 모릅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 다 아는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르고 있군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모르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일 것이고, 우리가 알고 있다 생각하는 것은 사실 어설프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같은 성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 시대 누구도 그 일어난 일들을 성경에 비추어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임을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었음에도, 다른 더 마음에 드는 말씀들로 각자 희망하는 그림을 이미 마음 속에 그려놓고 있었기에, 성경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지만, 우리가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우리가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 내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판단하고, 그 안에서 토론합니다. 그 안에서 소망하고 그 안에서 노력합니다. 그것이 잘못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이고, 그것이 인생입니다.
제자들의 믿음 없음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은 그들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토론하고 소망하며 노력하는 것 자체에 대한 책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함에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고 그 소식들이 주위 사람들을 통해 들려오고 있음에도, 기존에 갖고 있던 신념과 소망의 틀에 갇혀, 더 나은 이해와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모습에 대한 책망이었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이해 속에서 서로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그곳에 주님은 그 대화에 끼어드는 어떤 누군가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실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어떤 주제에 대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무슨 얘기를 나눕니까?”, “무슨 일입니까?” 누군가 물어올 때, 그 질문에 대답하고, 또 그의 말을 경청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온전한 진리에 이르고 더 온전한 믿음에 이를지 모릅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마음으로 그분을 보게 된 두 제자는 왔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갑니다. 선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말이 있던가요? 보는 것이 달라지자 가는 방향이 달라집니다. 두려움과 슬픔 가운데 떠나왔던 곳으로 그들은 다시 가서 자신들이 만난 부활의 주님을 증거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주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전혀 다른 방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보이는 다른 누군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눈이 열리고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에 이른 후에는 눈으로 보는 것이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마음으로 그분을 보다 깊이 보며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내가 바랐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 낙심하고 슬퍼합니다. 그 상황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눈에 보이는 다른 누군가의 모습으로 다가오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닫혔던 눈이 열리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되고,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보지 않고도 믿는 자의 복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제자 도마에게 하셨던 말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신 말씀의 새로운 뜻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에게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분을 알아보고 새롭게 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