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1: 심령이 가난한 자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가난이 복이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부자라고 다 행복한 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이 더 복이 있다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예수님은 ‘가난’을 낭만적으로 미화할 의도가 없으셨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들을 선동하여 세상을 뒤집을 의도도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복이 있다 말씀하신 이들이 부자들이 아니었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이를 더 분명히 알 수 있는데, 누가복음 6장 20절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여기 “너희 가난한 자”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따라온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시고, 그들은 실제로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여기 ‘가난한 자’라는 표현 속에는 ‘물질적 가난’의 의미도 배제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제자들은 실제 물질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이 복이 있다 말씀하시는 가난의 상태란, 엄밀히 말해 ‘물질적 가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영혼의 가난’, 혹은 ‘마음의 가난’에 더 강조점이 놓입니다. 복음서 기자 마태는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 점을 보다 명확히 드러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 말씀하신 사람들, 그들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지지요? ‘심령이 가난한 자’란 어떤 사람들일까? 자기 속에 정말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인식한 사람들, 그래서 그 정말 있어야 할 무언가를 향해 타는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 그 빈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들이 진정 갈망하는 그 무언가란 다름 아닌 ‘하나님’일 것입니다. 17세기 철학자 파스칼은 말하였다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 세상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큰 공허가 있다.
그 공허는 주님께서 찾아오시기 전까지는 어느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4세기 신학자 성 어거스틴도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내 마음이 주님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 내 삶을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들, 그렇게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 의존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을 말할 것입니다. 이미 다른 것으로 자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찾더라도 그분이 자기 안에 전부가 되시기를 바라진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언제까지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로 만족할 수 있을진 의문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벼랑 끝까지 내몰린 사람들, 자기 안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사는 맛과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기꺼이 자기를 비우고 그 빈자리를 하나님으로 채우려 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운 존재로 빚어지기를 열망할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진정 필요하고 가장 좋은 것, 곧 ‘그분 자신’을 주고자 하시는데, 지금 있는 자, 지금 배부른 자, 지금 만족스러운 자는 필요없다고 이를 마다합니다. 반면, 지금 없는 자, 지금 주린 자, 지금 절박한 자는 그분을 향해 기꺼이 자기를 엽니다. 그렇게 역전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마침내 하나님으로 인해 부요해지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의 인생에 새 하늘이 펼쳐지고, 새 생명이 움트며, 새 기쁨이 샘솟습니다. 그렇게 가장 좋은 것, 가장 풍성한 것, 가장 배부른 것, 가장 든든한 것, 참으로 온전하고 영원하신 그분이 그 속에 거하시므로, 그 사람은 다른 것 많이 없어도 충분히 풍성하고 행복하고 너그러울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의 일상언어로 번역된 메시지 성경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지난 주간에 동안교회 청년 단기선교 일정이 잘 마쳐졌습니다. 체코와 한국의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함께 토론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봉사하고, 함께 예배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일정을 다 마치고 금요일 오전에 평가회 시간을 가졌는데, 한 자매님이 노숙인 식사봉사 중에 경험한 바를 나누어주었습니다.

봉사 장소에 도착하자마다 노숙인 한 분이 대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더랍니다. 얼결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긴 했는데, 이후 봉사활동 내내 그 악수한 손이 신경쓰이더라는 것입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자리를 옮겨 제가 나눠준 물티슈로 손을 닦고 이후 예배장소로 이동하였습니다. 시내 벽속의마르틴교회에서 성만찬 연합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은혜를 주신 것 같습니다. 주님의 빵과 포도주를 받으면서 자신이 이제까지 얼마나 나 중심적으로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이처럼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채우는 일일 것입니다. 나로 가득차 있을 때는 할 수 없다 느끼는 그것을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되면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로 가득차 있을 때는 다른 이에게 내어줄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되면 내어줄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처럼 자기 안에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사는 이의 삶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6:10)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으로 초청하셨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초청에 응하는 것은 언제나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인생 속에서 그처럼 심령이 가난해지는 순간을 맞이하곤 합니다.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다가 어느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장벽에 부딪혔을 때, 누군가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 실체와 직면하게 됐을 때, 내가 그간 의지하고 신뢰하던 것들이 한순간에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을 때, 때로는, 어느날 문득, 그냥 아무 이유없이, 참 삶이 재미없고 덧없다, 느껴지는 때도 있을지 모릅니다.

누구나 한번은, 자기 인생길에서 적어도 한번은, 그러한 순간을 맞이하지 않을까요? 작년 연말에 교우 중 한분이 스티브 잡스가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글을 공유해 주셨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사업에서 성공의 최정점에 도달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 삶이 성공의 전형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을 떠나서는 기쁨이라곤 거의 느끼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부’라는 것이 내게는 그저 익순한 삶의 일부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 병석에 누워 나의 지난 삶을 회상해보면, 내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주위의 갈채와 막대한 부는 임박한 죽음 앞에서 그 빛을 잃고 그 의미도 다 상실했다… 이제야 깨닫는 것은 평생 배굶지 않을 정도의 부만 축적되면 더 이상 돈버는 일과 상관없는 다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평생에 내가 벌어들인 재산은 가져갈 도리가 없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사랑으로 점철된 추억 뿐이다. 그것이 진정한 부이며, 그것은 우리를 따라오고, 동행하며, 우리가 나아갈 힘과 빛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것을 잘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은 전혀 그러지 못했음을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무언가를 잘 간직하고 기억하며 살아간다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중심을 잃고 혼란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또한, 내가 그토록 원하던 그것이 실은 공허한 것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험들은 그저 불행하고 비극적인 경험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만나게 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찾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심령의 가난 속에서 마침내 하나님을 경험하고, 지성에서 믿음으로, 기억에서 소망으로, 의지에서 사랑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과 같습니다.

내가 어떤 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그 심령의 가난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믿음을 향한 여정에 오릅니다.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로완 윌리엄스는 말합니다.


“신앙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해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내 안에 형성되는 것과 같다.”

결코 변하거나 떠나가지 않는 분, 내 인생길에 표지판과 이정표가 뜯겨 사라진 때에라도 절대 나를 홀로 버려두지 않는 분,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그처럼 신뢰할 만한 분임을 깨닫는 일로부터 신앙은 자라납니다. 그리고 이 신뢰 관계 속에서 우리는 더 큰 자유함 속에 진리를 향해 나를 개방합니다.

또한, 내가 누구이며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이 희미해지고 정체성이 혼란스러워졌을 때, 그 심령의 가난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소망을 향한 여정에 오릅니다. 믿음과 마찬가지로 소망도 관계 속의 소망입니다. 우리를 떠나가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 우리가 누구였으며 지금 누구인지 알고 이해하며 그대로 붙잡아 주시는 분, 언제나 사랑의 눈길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소망입니다.ㅍ때로 우리는 나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일관되지 못한 모습 때문에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누구며 저가 누군지 스스로 나서 단정지으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결코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시는 분의 눈으로 보면, 과거나 현재나 우리의 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 있으며 참된 것입니다. 독일 고백교회의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는 감옥에서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 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선 허세를 부리고,
자기 앞에선 천박하게 우는 소리 잘 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 것인가?

나는 누구입니까?
으스스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답하셔야 한다. 다만 확실히 믿는 것은, 하나님만이 나를 정확히 아시고,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으셨다는 것, 나는 영원히 그분의 것이라는 것… 이처럼 소망은 내가 보거나 아는 것만이 ‘나’라고 여기는 억측을 훌쩍 뛰어넘게 해줍니다. 소망은 하나님 눈에 우리는 내가 아는 모습 그 이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소망은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인정하게 하고, 그렇게 서로를 위해 인내하며 기다려줄 수 있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심령의 가난 속에서 의지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여행에 대해 생각해봅니다.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 물건을 사겠어!” 우리에게 익숙한 소비환경 속에서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고른다 생각하지만, 실상 내 의지와 열망에 방향을 제시하는 건 내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긴 쉽지 않습니다. 내가 정말 원했던 건 그것이 아님을, 그것을 얻었어도 난 아직 부자유함을 깨달았을 때, 그 심령의 가난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향한 여정에 오릅니다.
사실 가장 소중한 자유는 우리 자신이 될 자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대로 멋지게 자라갈 자유입니다.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시는 참으로 신뢰할 만한 분,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시고 한결 같은 눈길로 바라보시는 분, 우리가 누구인지를 영원토록 흔들림 없이 속삭여주시는 분,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부르시는 그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하나님 사랑이야말로 우리 영혼이 진정 갈망하는 그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두려움과 염려를 쫓아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헌신하여 살아 움직이게 하며, 생기로 충만하게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세상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기쁨과 평안으로 인도하고, 우리는 이것을 구원받은 백성이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천국의 삶이라 부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지금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없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며 기다리는 사람, 그래서 나를 비우고 하나님을 채우며 살려는 사람, 그렇게 심령의 가난함 속에 비로소 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그들이 바로 복이 있는 사람이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복을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