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7: 화평하게 하는 자

둘째로, ‘화평케 하는 자’로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내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 ‘평안’으로 번역된 말이나, 앞에 ‘화평’으로 번역된 말이나, 원어는 같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나의 평안’이란 표현을 쓰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지배했던 평화, 그분이 세상에 계시며 누렸던 그 평화를 그분들 따르는 우리에게도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십니다. 세상이 약속하는 가짜 평화를 거부하고 예수님 주시는 이 참 평화를 소유할 때, 우리는 근심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이 땅에 평화를 만들어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성경공부 시간 본문이었던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때 꼭 사마리아를 통과해 가고자 하십니다. 물론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긴 했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꺼리던 길이었다는 점에서, 이 예수님의 행동은 좀 이상하고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는 상종조차 않으려 했는데, 그렇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진 후, 사마리아는 북왕국의 수도가 됩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북이스라엘이 먼저 앗시리아에 멸망합니다. 이후 앗시리아의 이민정책에 따라 다른 지역 이방인들이 거기로 이주해 들어옴으로써, 사마리아는 절반은 북이스라엘, 절반은 이방이 됩니다. 이후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의 피와 종교로 혼탁해진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배척을 받았고, 이에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적대감이 점점 격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기원전 315년에 사마리아인들이 자체적인 예배처소를 그리심 산에 세우고, 이어 기원전 128년에 유대인들이 그 성전을 다시 허물어뜨리는 일이 일어나면서, 예수님 당시 그 두 그룹은 절대 상종해선 안 될 사람들, 그릇도 함께 써선 안 되고 음식도 함께 나눠선 안 될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땅을 굳이 통과해 가시고, 거기서 만난 한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청하십니다. 그리고 그녀와의 대화 중에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이 예수님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공고하게 존재하던 적대감의 장벽이 예수님 마음 안에는 애당초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찾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온 세상 모든 사람을 품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오직 그것만이 그분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여인이 그 마을에 들어가 전파함으로, 그곳의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고 거기 더 함께 계시기를 청함으로,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스토리와 같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장벽이 어느 순간 스르르 무너지는 기적, 무엇이 그곳에 이 ‘평화’를 만들어낸 것입니까?

예수님 안에 있던 평화가 그 시작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평화는 이처럼 내 안에서 시작됩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내 마음을 주장할 때, 그 마음을 따라가는 길에서 우리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편견과 차별 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에 평화의 씨앗을 심을 수 있습니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삶은 분명 헌신과 희생을 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한편으로, 그 평화가 우리에게 주어지도록 그분이 치르신 희생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말해 줍니다.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적대감 이면에는 이전에 서로 주고받은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이방인들을 멸시한 이면에는 그들로부터 당했던 압제의 역사가 있고,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을 미워한 이면에는 그들로부터 겪었던 배척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아직 사하여지지 않은 죄들이 아직 변제되지 않은 빚처럼 남아 있었기에, 그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는 일은 그처럼 멀게만 느껴졌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깨어진 인간관계 속에서도, 분단된 한반도 남북관계 속에서도, 그리고 다시 또 피흘리는 중동의 현실 속에서도, 그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면 평화란 아득히 멀리 있는 환상인 듯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평화를 만드는 일은 내 안에서 시작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그분을 거기 이르게 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사람에게 상대방이 베풀 수 있는 최대의 호의는 용서이겠지만, 자기 잘못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계속 악을 행하는 사람을 위해 그 피해를 입은 사람이 해줄 수 있는 최대의 호의는 여기 이 예수님처럼 그를 위해 기도하는 일일 것입니다. 초대교회 순교자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며 남겼던 마지막 말, 그것 역시, 그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7:60)

우리가 이 땅에서 평화를 만드는 길 중 하나는 이처럼 내게 해를 가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화평케 하는 자의 삶으로 부르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행하셨던 화평의 사역을 오늘 우리도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이어가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죄로 가득찬 세상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산다는 게 무슨 뜻일까? 다시 또 다시 생각해 보지만,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서셨던 그 자리에 나도 서는 일과 관련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다시 또 바라볼 뿐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평화,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평화,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고 마침내 부활의 아침을 가져오는 평화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을 그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로 부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을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