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있는 사람

<마태복음 5장 1-10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지금 여기서의 삶이 모두 만족스럽다면 사람들은 구원을 소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픔이 있으니 치유를 바라고, 결핍이 있으니 채움을 바라고, 불완전하니 완전해지길 소망합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은 고해(苦海)라”, 즉 ‘고통의 바다’라 하고, 어느 서구 작가는 인간 실존을 ‘실낙원’, 즉 ‘낙원을 잃어버린 삶’이라 묘사한 바 있지만, 이런 어려운 말들 알지 못해도,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 세상이 완전한 곳이 아니라는 것과, 우리 모두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자연스레 깨달아갑니다.

‘성선설’, ‘성악설’, 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났는가, 악하게 태어났는가, 때로는 선하게 행동하고 때로는 악하게 행동하는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도대체 어느 것이 본질일까 옛 철학자들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그런 뜬구름 잡는 얘기 그만하고 보다 실제적인 얘기를 하자, 중요한 것은 인간과 세상을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 아니냐며 그 일에 호기롭게 달려들었던 사람들조차도 그 이후에 펼쳐져간 역사 속에서 또다시 아득함을 느끼지는 않았을지…

이 지점에서 다시 고개를 드는 질문: 진정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 이 세상을 떠나 저기 다른 어딘가로 가는 데 있을까? 아니면, 이 땅을 낙원으로, 나 자신을 초인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또다시 계속해나가는 데 있을까? 에이 다 귀찮고, 그냥 현실에 만족하며 이대로 살다 죽을란다, 하는 게 차라리 나은 걸까?

성경이 말하는 ‘구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 그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좀 더 와닿게 설명해보려는 욕심에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기독교적 의미의 ‘구원’은 지금 여기로부터 바로 저기 어딘가로 옮겨지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개 보이는 것에만 신경쓰다보니 하나님 나라가 여기 안 보인다고 저기 있으리라 추측하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뒤 미래의 언젠가 들어가게 될 나라가 아닙니다. 또한, 기독교적 의미의 구원은 이 땅을 낙원으로, 나 자신을 초인으로 만들려는 노력의 끝자락에 놓여 있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인간이 자기 욕망과 지혜와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기독교적 의미의 구원은 지금 이 모습의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가 침투해 들어오고, 지금 이 모습의 우리 속에 하나님이 들어오심으로써, 지금 여기에서부터 우리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전히 같은 곳에 발을 디디고 있지만 이전과는 다른 것에 지배 받으며 사는 것, 여전히 문제와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지만 거기에 이전과는 다르게 반응하며 사는 것, 여전히 쉽지 않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지만 그들을 이전과는 다르게 대하며 사는 것, 여전히 연약함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전에 얽매여 있던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 여전히 불확실한 현실을 통과해 가지만 그 와중에도 확실한 진리를 붙들고 나아가며, 끊임없이 의미있고 가치있는 무언가를 건져올리며 살게 되는 것, 이를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여기 우리 마음과 삶 속에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기독교적 의미의 구원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말의 의미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온전하고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마지막 때 최종적으로 이루어지겠지만,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한 산 위에서 전하신 설교의 앞부분입니다. 소위 ‘팔복’이라 불리는 이 내용은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은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여덟 번에 걸쳐 ‘복’을 선포하십니다. 어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 하시고, 그에게 주어지는 복이 무엇인지를 말하십니다. 한국 사람들 참 ‘복’ 좋아하지요.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제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신에 “새해 복 많이 나누세요!”로 인사하면 좋겠다고 제안했었는데요, 나중에 서로 인사하시는 거 보니까, 거의 대부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로 인사하시더라구요.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우리 교우들 마음 속에 복 받기를 바라는 열망이 크구나! 그래서 제가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복 받길 바라는 저 열망을 꺼뜨릴 게 아니라, 참된 복을 소망하시도록 도와드려야겠다!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오늘 말씀을 잘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내용은 누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누가 복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그 자격요건을 적어놓은 목록이 아닙니다. 일례로,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위로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애통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이 내용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일종의 도덕목록도 아닙니다. 심령의 가난이나 마음의 청결은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말해주는 것이지 그 사람의 윤리적 수준을 말해준다고 보긴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 무엇인가?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이 있는 사람, 그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 속에 하나님이 오시기를 갈망하며 기다리는 사람, 그가 바로,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지 아십니까? 하나님 자신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팔복의 핵심은 하나님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신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고, 그 속이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지는 것이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그처럼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받게 될 복은 하나님 그분의 다스리심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그처럼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받게 될 복은 하나님 그분의 위로입니다. 온유한 자가 그처럼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받게 될 복은 하나님 그분이 예비하신 땅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그처럼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받게 될 복은 하나님 그분의 풍성하심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처럼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받게 될 복은 하나님 그분의 자비로운 돌보심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그처럼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받게 될 복은 하나님 그분의 임재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그처럼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받게 될 복은 하나님 그분의 친밀하심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그처럼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받게 될 복은 하나님 그분의 영광스런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 있는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다른 자격요건은 없습니다. 이 복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은혜로 주어지는 복,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주시는 복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어렴풋이나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눈뜬 사람이라는 걸 암시하고, 그렇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은 그의 책 <삶이 메시지다>에서 이렇게 적고 계십니다.

“우리 존재가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그리움이 엄습한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그리움을 품고 살다가 어두운 방에 비쳐드는 빛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의 숭고한 사랑에 눈뜬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 무리는 어떤 무리인가? 예수님이 갈릴리와 수리아에서 행한 치유사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역시나 자기 삶의 문제들을 해결받길 기대하며 또다시 여러 지역에서 몰려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시고 산에 오르시니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거리’가 생겨납니다. 때때로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에 바로 응답하지 않으시고 이처럼 ‘거리’를 만드십니다. 이 ‘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하게 합니다. 이 ‘거리’는 ‘무리’와 ‘제자’를 구분짓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에 목이 말라, 기꺼이 그분을 따라 산을 오른 사람들, 그들이 ‘제자’입니다. 스승이 어디로 가든 따라가며 꼭 그 스승과 같은 모습으로 빚어져가는 사람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입을 열어 가르치십니다. 진정 복된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앞으로 제가 설교할 때마다 총 여덟 주에 걸쳐 이 여덟가지 복 하나 하나를 다루며 설교하려고 합니다. 본문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라 산을 오르는 마음으로 진정 복된 삶의 길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