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4월 14일)
- 요한일서 3장 1-12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 - 요일3,1-12.docx
<요한1서 3장 1-12절>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사랑으로 행하는 삶’에 관한 성경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1960년대 히피 운동을 이끌던 사람들은 ‘자유연애’를 강조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간단한 말을 써서 플래카드를 내걸기도 했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진정한 삶은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틀지지 않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사랑은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곡해한 것 같습니다.
즉, “사랑”이라 불리는 모든 것에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히 사랑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인자와 긍휼로 가득 차 계시다는 뜻입니다.
요한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그들이 ‘사랑’을 말하고, 그것을 행하자 권면할 때,
그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께 속한 사랑,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내신 사랑,
그렇게 비로소 우리가 경험한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이 또한 내 본성과 능력으로부터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겸손히 주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 사랑을 힘써가자는 의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서 또한 말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속한 참 사랑에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 오늘 본문을 통해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1서 3장의 전반적인 구성은 이렇습니다.
1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2절에서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얻게 되는 것들에 대해 말합니다.
‘죄에 대한 승리’,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하나님 앞에서의 담대함’이 그것입니다.
오늘은 이 중 첫 번째 주제에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1절에 말씀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How great is the love!
여기 ‘어떠한’이란 표현의 배후에 있는 헬라어는 ‘포타펜’(potapen)입니다.
이 말은 다른 나라에서 온 어떤 것, 즉 이전엔 경험치 못했던 처음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낯선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졌고,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요한1서 4장 9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그리고 요한복음 1장 9절에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죄의 권세에 팔려 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희생을 통해 값주고 되사셨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 그분께 속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그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점점 빚어져 갑니다.
우리가 그러하도다!
호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재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하신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그분 사랑 안에서 그분 자녀답게 빚어가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지면서 그리스도인은 점점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갖게 됩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세상은 그들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들의 행동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새로 태어나게 한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의 눈엔 낯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세상이 다 이해해주길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의 자긍심은 사람들의 인정에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자녀라 부르신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누구입니까? …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먼 미래의 어느 때 그렇게 될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우리가 그러합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어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장래에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것은 아직 확실히 나타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장래에 우리는 때가 되어 우리 모두에게 나타날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미 지금 여기서도 우리는 그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는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그때 그분 눈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 것인가?
지금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내가 과연 그분이 보시는 ‘나’에 얼마나 근접한 모습일까?
이 생각을 하면 후에 주님 앞에 서는 일이 영 자신 없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격려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는 노력을 끝까지 포기치 않고 계속해 나간다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 모습 속에 그분 닮은 모습이 있게 되리란 의미일 것입니다.
여러분, 나다나엘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의 스토리를 기억하십니까?
소년 어니스트는 그 마을 앞산의 큰 바위 얼굴을 늘 사모하고 동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자랍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마을에 그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이 나타나리란 전설이 이루어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시간이 흘러 그 마을 출신의 저명한 사업가, 군인, 정치인, 시인이 차례로 왔다 가지만, 어니스트는 그들에게서 큰 바위 얼굴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실망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양을 등지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어니스트를 보던 시인이 갑자기 놀라움 가운데 외칩니다. “보시오! 어니스트 씨야말로 저 바위 얼굴이랑 같지 않은가요?” 이에 사람들은 비로소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났음을 알고 놀라지만, 정작 어니스트 본인은 더 훌륭한 다른 사람이 저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일 것이며, 그런 분이 반드시 나타날 거라고 차분히 말을 끝내며 연단에서 내려옵니다.
때가 되어 반드시 나타날 그분을 바라보고 사랑하고 소망하며 사는 사람은
이처럼 어느덧 그분 닮은 모습이 되어 영광 중에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산다는 건 무슨 뜻일까?
3절에 말씀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이 사셨으므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 만날 소망 중에 사는 신자는 자기를 깨끗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에서 깨끗하게 한다는 뜻일까요?
죄에서, 혹은 죄 짓는 삶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4절에 말씀합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hamartia)는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사람들에게 ‘옳음’, 즉 ‘의’에 대한 과녁과 기준을 제시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그들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죄악된 존재인지를 결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줄이 얼마나 굽었는지를 알아보려면 일직선의 모서리에 갖다 대 보아야 합니다.
여기 ‘불법’이란 말의 헬라어 표현은 “하나님의 법을 반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법은 단순한 법의 부재가 아닙니다. 법에 대한 적극적인 반역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죄를 범하는 것’과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신실한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특정한 죄를 ‘품고’ 있지 않으며, 죄 범하기를 ‘택하지’ 않습니다.
죄를 범한 신자는 회개하고, 고백하며, 그리하여 용서를 경험합니다.
반면, 계속 죄를 짓는 사람들은 그 잘못 가던 길에서 좀처럼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계속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어 5절에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죄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는 사실 외에, 그리스도인이 죄를 미워해야 할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 알면서도 계속 죄를 짓는 것은 그 희생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범죄의 종국적인 결과인 영원한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은 신자들을 이전의 죄악된 삶에서 돌이킬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며 여전히 죄가 없으시므로 당연히 전적으로 죄를 반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백성이라 하는 사람들이 죄를 반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어 6절에 말씀합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 안에 거한다’는 표현은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와 가지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그 원줄기에서 생기를 빨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그분의 생명을 받아 죄의 권능에서 해방됩니다.
죄 안에 거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빛과 어둠의 관계처럼 상호배타적입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요한은 다양한 유형의 거짓 교사들과 맞서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죄가 없고 죄 지을 능력도 없다고 말하며, 그처럼 자기들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함을 과시했습니다.
그들을 향해 요한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죄가 없어야”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무죄함’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요한1서 1장 8절과 10절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의 경험과 양심은 신자들의 삶에도 아직 죄가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죄를 짓는 때에 그것을 인지하고 다시 진심으로 돌이켜 회개함으로써, 또한 그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분에게서 오는 용서를 다시금 감사로 받아들임으로써, 계속 죄악된 삶을 사는 일을 그칠 수 있습니다.
요한1서 1장 9절에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신학자 존 크리소스톰은 말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인간다운 것이다. 그러나 죄를 고집하는 것은 인간다운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탄다운 것이다.
또한 당시 어떤 거짓 교사들은 그들의 죄악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그것이 하나님께 대수로운 일이 되지 않는다 주장했습니다.
그들에게 사도 요한은, 결코 그렇지 않고, 죄는 하나님께 대단히 중대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요한1서 1장 6절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계속 죄를 짓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이것은, 한 번이라도 죄를 지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그가 만약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다면, 그는 그만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없는” 상태로 있기를 힘씁니다.
그들은 “계속 죄를 짓지”는 않는데, 이는 그들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그것을 교묘히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어 7절과 8절에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는 말은, 의를 행하는 것이 그 사람을 의롭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에게 은혜로 주어진 의로움이 자연스레 그들을 의로운 행위로 이끈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좋은 나무입니다. 열매가 나무를 좋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열매는 그것을 맺게 한 좋은 나무를 나타낼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합니다.
여기 ‘멸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부수다’, ‘취소하다’, ‘무효화하다’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자면,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그의 악한 짓들을 아예 없애버리시는 것이 더 사리에 맞을 수 있겠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탄의 궤계를 폭로하시고 그 허황된 권세를 파하심으로써, 사람들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될 수 있는 참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멸하러 오신 그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연루되어서는 안 될 말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어 9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비록 육체가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결코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는 영지주의 이원론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성경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사람이 일단 거듭나면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려 합니다.
때문에 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무효로 만들지 않기 위해 죄를 지었다는 고백을 결코 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경험과 양심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죄는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리스도인조차도 때로 거기에 넘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참 신자들 안에는 죄를 짓지 않으려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열망은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 그분의 생명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합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는 그 부모의 유전자를 그 속에 가지고 태어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하나님의 씨’, ‘그리스도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난 아기는 연약하고 그 잠재된 좋은 것들이 발현되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도 연약하여 때로 죄를 짓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들 속에는 의로우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잠재되어 있기에, 그것이 잘 계발된다면 그 삶이 점점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또한 성령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 안에 심겨진그 하나님의 생명이 그의 삶 속에서 더 온전히 역사하게 됩니다.
이어 10절에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사도 요한은 단호히 이야기합니다.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거나, 아니면 마귀에게 속해 살아간다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를 분간하려면,
그가 의를 행하는지, 즉 그의 삶이 하나님이 옳다 여기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또한 그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는지, 즉 다른 사람에게 주님 사랑을 나타내며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되리라 합니다.
여기 ‘의’라는 단어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하나님 자녀의 특징으로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의를 행하는’ 사람이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행하는 의에는 결코 사랑이 빠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참으로 옳은 것,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고 부여된 ‘하나님의 의’는
자기를 드러내려는 의가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고 희생하는 ‘사랑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행하는 사랑에는 결코 의가 배제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결코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불의에 불의로 맞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참 사랑,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지고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무시하거나 용인하는 사랑이 아니라,
죄를 멸하기 위해 기꺼이 그 값을 치르는 ‘의로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11-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은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자 분개했습니다.
그 분노가 죄의 노예가 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하나님이 우려하며 경고하셨지만, 결국 가인은 끝내 돌이키지 못하고 동생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이 가인의 사례는 사람 안에 생겨난 분노가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해하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C. S. 루이스가 말했듯, 어떤 사람도 불의 자체를 사랑해서 불의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불의를 불의가 아니라고 믿어버리는 과정을 통해, 불의를 의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자기기만을 통해, 마치 의를 행하듯 불의를 행하는 경우가 아마 대부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행위를 있는 그대로 달아보십니다.
우리는 가인 같이 하지 말고, 죄를 지었을 때 바로 회개하며, 형제 사랑의 길로 다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에 동참하는 사순절, 특별히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며 맞이하던 수많은 사람들,
그때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할 왕으로 오셨음을 어렴풋이 인지했지만,
그 일을 위해 그분이 어느 자리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실지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어떠합니까? 어떤 소망과 기대로 주님을 바라보며 경배하고 있습니까?
현실의 불의는 그 시대뿐 아니라 오늘 이 시대 속에도 존재합니다.
우리의 실제적인 삶 속에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불의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길 위해 기도하며, 또 필요하다면 그 현실의 불의에 단호히 저항할 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렇게 용감히 행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현실의 불의를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그 동안 행해져 왔던 무수한 악과 불의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독재자들이 그들에게 저항하는 목소리를 잠재우는 방식이 그러했고, 또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 그 일을 합리화하고 미화하는 방식이 그랬습니다.
모두가 ‘저보다 내가 의롭다’는 전제 위에서 행해진 폭력들이었고, 또 그 불의한 일이 오히려 ‘의로운’ 일로 가장되거나 착각되어 행해진 사례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 우리에게 다시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불의는 바깥 현실에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
불의는 저기 저 사람 속에만 있지 않고 여기 내 속에도 있다는 것,
불의는 저 거슬리는 사람을 쳐내버림으로써 다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 안에서 불의를 몰아낼 때, 또 그 불의의 결과로 누군가 치러야 할 대가를 내가 함께 사랑으로 담당하려 할 때 비로소 무력화될 수 있다는 것…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불의에 불의로 맞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죄를 없애시려고 죄 없으신 그분이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을 행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사순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려고 당신이 우리 대신 저기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베푸시고 가르쳐주신 사랑, 그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을 저희도 행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