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본문에 청지기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의 양을 줄여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청지기들이 다른 누군가가 하나님께 지은 죄의 무게를 줄여줄 수 있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는가?

지난 주간에 청년들과 함께 기독교 사상가 C. S. 루이스의 책 <순전한 기독교> 중에 ‘용서’에 관한 챕터를 함께 읽고 얘기 나누었습니다. 이 글에서 루이스는 ‘용서’의 실천을 이웃 사랑의 실천과 연결지어 고찰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 속에는 ‘원수 사랑’도 포함되는데, 이것은 ‘그에게 호감을 느끼라’든가 ‘그에게서 매력을 찾으라’는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실제로 악하기 짝이 없는 사람을 마치 그렇지 않은 듯 여기라는 말이 아니란 것입니다. 옛 성현들은 악한 사람의 행위는 미워하되 그 사람 자체는 미워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와 관련해서 루이스는 아주 인상깊은 통찰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어떻게 어떤 사람의 행위는 미워하면서 그 사람은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몇년 후, 제가 평생 동안 그렇게 대해 온 사람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비겁함이나 자만심이나 탐욕은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계속 자신을 사랑해왔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그런 것들을 미워한 이유는 바로 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지르는 종류의 인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토록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잔인한 행동이나 배신 행위에 대한 미움을 티끌만큼이라도 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런 일을 미워해야 하며, 그런 일에 대해 나쁘다고 했던 말을 단 한 마디도 철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일을 미워할 때, 자기 자신에게서 똑같은 것을 발견했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미워하라고 합니다. 즉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저질러야 했을까 안타까워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든 치유되어 그의 인간다움을 되찾기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주 재미있는 예를 드는데요,

신문에 아주 흉악한 범죄 기사가 났다고 합시다. 그런데 다음날, 전날의 보도 내용이 전부 사실은 아니라거나 그렇게까지 악한 범죄는 아니라는 식으로 내용이 바뀌었다고 합시다. 그 때 ‘정말 잘됐다.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니 다행이야’ 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까, 아니면 김이 샌다는 생각이 들거나 더 나아가 그 범죄자들을 정말 악한으로 취급하는 더없는 즐거움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나머지 전날 실린 기사를 더 믿으려 합니까? 만약 두번째 경우라면 종국에는 마귀가 되는 길에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것은 검은 것이 좀더 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나중에는 회색도 검게 보고 싶어할 뿐 아니라 급기야는 흰색까지 검게 보고 싶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모든 것 – 하나님과 친구들과 우리 자신까지 포함해서 – 을 어떻게든지 악하게 보려고 고집하게 될 것이며, 그 짓을 영영 그만두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순전한 증오의 세계에 영원히 갇혀 버리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의 잘못도 벌하지 말라는 뜻인가?
루이스의 대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벌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원수의 행동을 정죄하고 그에게 벌을 주며 죽일 수도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도덕과 보통 관점의 차이는 무어란 말인가? 거기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영원히 살 것을 믿는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 즉 영혼의 내부를 천국의 피조물로 만들 수도 있고 지옥의 피조물로 만들 수도 있는 그 작은 흔적이나 꼬인 자국입니다. 따라서 전쟁이나 사형처럼 불가피한 경우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미워하거나 미워하기를 즐겨서는 안 됩니다. 불가피한 경우 벌을 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 적의나 복수심이 결코 자리잡지 못하도록 그런 마음을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결심만 하면 다시는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제 말은 이런 마음이 고개를 쳐들 때마다 날마다, 해마다, 평생토록 그것을 쳐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시도할 수조차 없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적을 죽이거나 벌해야 할 때라도 자기 자신에게 품는 마음을 그에게도 품도록 –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며 이 세상에서든 다른 세상에서든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도록,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도록 – 애써야 합니다. … 여러분 자신에게는 사랑할 만한 부분이 있어서 사랑합니까?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그 대상이 여러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자아들을 이와 똑같은 이유로, 또한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