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4년 1월 14일)
- 요한복음 1장 1-18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빛으로 오신 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요1,1-18.docx
<요한복음 1:1-18>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의 서두 부분입니다. 음악으로 치면 prelude, 서곡에 해당하겠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오늘 본문의 문체가 산문보다는 시나 노래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의 뒷부분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핵심 용어들과 개념들이 이 본문 속에 압축적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며, 쓰여진 시기는 AD 100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중에 가장 늦게 쓰여졌으며, 기술방식, 자료, 신학도 다른 세 복음서와 큰 차이를 보입니다.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의 탄생 이야기나 세례 요한의 선포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천지창조와 역사 이전부터 존재하던 말씀이 세상 및 인간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전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무슨 말로 얘기를 시작하시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기 어렵다 느끼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쓸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여기 사용된 말들이 모두 익숙한 단어들이었을 것입니다.
여기 ‘말씀’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로고스’입니다. 원어성경에 ‘로고스’로 되어 있는 말을 우리말성경은 ‘말씀’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글성경이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로고스는 곧 하나님이시니라
‘로고스’가 무엇입니까? 잘 모르시죠? 저도 잘은 모릅니다. 뭔가 철학적인 냄새를 풍기는 어려운 말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 헬라문화권 사람들에게 이 단어는 많이 들어본 말이었고 대략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도’(道)라는 말 들어보셨죠? “도를 아십니까?” 이런 질문도 받아보신 분 있을 겁니다. ‘도’가 뭐죠? 뭔지 잘은 몰라도 대략 이런 것이겠다 연상되는 뭔가가 우리 동양인들에겐 있습니다. 어떤 ‘근본적인 원리나 이치’ 같은 것…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 ‘십자가의 도’란 말에서 ‘도’로 번역한 헬라어가 ‘로고스’입니다.
일단, 주후 1세기 동안 서로 다른 종교들과 철학들과 문화들간의 경계가 유동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헬레니즘 문화에서 태동한 말이 유대교 학자들의 글이나 기독교 사도들의 글에서 사용된다 해서 전혀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초기 스토아 학파에서 로고스는 ‘우주의 이성적 원리’(the rational principle of the universe)를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필로(Philo) 같은 유대인 사상가는 이 말을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계획’(the creative plan of God that governs the world)을 말하는 방식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당시 헬라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익숙한 용어였던 이 로고스를 그가 전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그분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왜 복음인지를 설명하는 수단으로 선택하여 사용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로고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그가 있었습니다. 그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들 속에서 사도는 그가 ‘로고스’라는 말로 표현한 그분이 세상 및 인간과 어떤 관계 속에 있는 로고스인지 하나 하나 설명을 덧붙여 나갑니다. 그리고 17절과 18절에서 마침내 그 로고스의 정체를 분명히 밝히는데, 그 로고스는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어성경 번역자들은 이 ‘로고스’라는 헬라어를 왜 ‘말씀’이라는 한국어로 번역했을까? 일단 이 ‘로고스’라는 말에 정확히 대응되는 한국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체어를 찾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선택된 단어가 ‘말씀’입니다. 이것은 영어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대부분의 영어성경들이 이 Logos를 ‘the Word’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이것은 매우 탁월한 번역 같습니다. 이어지는 내용들 속에서 보는 것처럼, 그 로고스는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일에 관여한 존재로서 생명과 빛, 은혜와 진리로 묘사되는데, 이런 표현들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묘사할 때 사용되던 표현들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을 여는 이 말씀은 성경을 여는 첫 말씀 창세기 1장 1절을 연상시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두 말씀은 모두 세상이 창조되기 전, 역사 이전의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 로고스, 그 말씀, 그 그리스도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 역사 이전, 곧 영원에 속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로고스, 그 말씀, 그 그리스도는 그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로고스와 데오스, 말씀과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이 말은 그 두 분이 다른 분임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이어서 사도는 또한 말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 로고스, 그 말씀도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두 분이 어떻게 같은 하나님이란 말인가? 이 지점에서 어떤 분들은 자연스럽게 ‘삼위일체’ 교리를 떠올릴 것입니다. 18절에 말씀하듯,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그의 독생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두 분이 어떻게 하나인지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 아들이 아버지 품 속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설명 속에 들어 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선언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본체시다(빌2:6), 그 말씀은 온전히 하나님이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표현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보았다면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들었다면 하나님께 들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뜻입니다.
그 로고스, 그 말씀, 그 그리스도가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관여했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사도는 그리스도와 만물의 관계를 하나의 긍정적 진술과 하나의 부정적 진술로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 그리고 지어진 것 중에 그가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Christ)와 창조세계(creation)의 관계는 지금으로부터 이천 년 전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훨씬 이전, 즉 세계가 창조되던 시점인 태초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공동번역). 만물의 존재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초점이 창조세계 일반에서 인간에게로 옮겨집니다. 생명을 주고 유지시키는 능력,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능력이 사람들을 비추는 빛으로 상징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현재시제입니다. 생명의 빛은 계속해서 비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과거시제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 즉 어둠 속에 있던 이들에 의해 빛이 거부되었던 일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 ‘깨닫지’로 번역한 헬라어는 ‘카타람바노’(καταλαμβάνω)입니다. 이 단어는 두 개의 의미 꾸러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깨닫다’, ‘이해하다’(understand), ‘영접하다’(accept)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의미 꾸러미이며,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행동을 묘사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기다’(overcome), ‘정복하다’,(master) ‘빨아들이다’(absolve)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의미 꾸러미이며, 제압하고 없애버리는 행동을 묘사합니다.
따라서 본문 5절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고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제압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둘 다 가능한 해석이며, 어쩌면 사도 요한은 이 중의적 의미를 확보하고자 의도적으로 그 단어를 사용했는지 모릅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이 자연히 사라질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빛이 내게 비치지 못하도록 스스로 그 빛을 가리는 움직임이 있을 수 있고, 심지어 그 빛을 아예 꺼뜨려 없애버리려는 움직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꾀했던 것은 그들 가운데 비쳐든 생명의 빛을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그 빛을 꺼뜨려버리려는 그들의 기도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사라질 것 같던 그 생명의 빛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온 세상을 더욱 밝게 비추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에 초청받아 쓰임받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를 “증언하러” 온 사람이라 말합니다. 무엇에 대해서요? 그 빛에 대해서! 자기의 증언을 통해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사도 요한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 세례 요한이 그 빛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달이 빛을 비추지만 달이 빛의 원천은 아닙니다. 빛의 원천은 태양입니다. 달은 그 태양빛을 반사하여 빛을 비추고 있을 뿐입니다.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의 관계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빛의 원천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합니다. 빛의 원천을 증거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마침내 참 빛이 세상에 비치었습니다. 생명의 원천이요 빛의 원천이신 그분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빛이 세상에 왔다는 말은 과거시제로(엘코마이), 그 빛이 각 사람을 비춘다는 말은 현재시제로(프호티조) 쓰여 있습니다. 이천 년 전 세상에 왔던 그 빛이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각 사람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위대했던 태초의 한 순간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다시 빛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 속에 있던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다시금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는 일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4:18) 그리고 몇 절 뒤에서 또한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5:14)
그리스도의 오심은 어두운 세상에 다시 빛이 비침입니다. 생명의 빛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하기 원하십니다. 모두가 그 빛을 받아야 합니다. 각 사람 마음에 그 빛이 비쳐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10절에서 사도는 그 빛 되신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를 통해 생겨났는데도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가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놀라운 복음이 있습니다. 그분을 영접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커녕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이제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를 얻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은 이 세상의 방식과 같지 않습니다. 혈통에 의한 것도 아니고 인간적 욕망이나 의지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이루려 한다고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하신 일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이 깨달아지고 믿어질 때 선물로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출산과 탄생의 과정이 아니지만 분명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 태어남의 과정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은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새 삶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 그 앞 1절에 언급된 ‘로고스’, 즉 ‘말씀’이라는 단어가 또다시 등장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 언급된 모든 단어가 중요합니다. 그 로고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그 앞에까지 ‘계시다’, ‘있다’, to be로 표현되던 그 말씀에게 최초로 ‘되다’, to become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원 속에 계시던(be) ‘하나님’이 이제 ‘사람’이 되어(become) 시간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그분이 이제 ‘우리 가운데’ 거하시러 오신 것입니다.
여기 ‘우리’라는 말이 처음 등장합니다. ‘세상’ 가운데 거하셨다고 하는 것과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이처럼 ‘우리가…보았다’ 말함으로써 이 진술의 성격은 관찰에서 고백으로 전환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본 사람들, 곧 신앙공동체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말씀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사도 요한은 다른 신앙인들과 더불어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 세상에 계셨던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현존을 보았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광, 은혜, 진리 등의 말을 통해 사도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영원 속에 계시던 하나님의 독생자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육신을 입고 이 시간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의 오심과 거하심,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심 자체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과 행적, 우리에게 자기를 나타내심 자체가 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것은 복음서 기자 요한의 고백이며, 또한 모든 시대 신앙공동체의 고백일 것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는 순간에 받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는 더 이상 은혜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더 큰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상상치도 못할 더 큰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라 한 것입니다.
방황하던 대학시절, 복음을 전해 듣고 저는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앞이 막힌 것 같은 내 인생의 돌파구가 어쩌면 예수님 안에 있을지 몰라!” 은혜로 주어진 이 작은 기대와 소망이 저에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며 복음의 의미와 가치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 그 받은 것이 너무 소중해서 도저히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살 수는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전보다 더 큰 은혜가 그렇게 저를 복음에 더욱 헌신된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의 다함없는 보고였고, 마르지 않는 샘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은혜 위에 은혜였습니다.
오늘은 이곳 프라하 꼬빌리시에서 한국어예배가 드려진 지 24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말하자면 한국어예배공동체 생일인데, 생일이면 응당 낳아준 부모에게 먼저 감사를 표하는 게 도리겠지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 이곳에 모여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은혜로 스물 네 해를 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생각해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이 교회가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실까?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이 곳을 찾는 각 사람 마음에 잘 비쳐 들게 하는 교회, 가난한 심령으로 이 곳을 찾는 자 누구나 차별없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짐과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교회,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 주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 속에 무엇보다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하시길 초청하고 기도하며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며 증거하는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받으며 늘 은혜 위에 은혜라 고백할 수 있는 교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프랑스의 여류사상가 시몬느 베이유의 말처럼, 무한한 시공간이 우리를 하나님과 갈라놓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을 향해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주를 가로질러 우리에게 오십니다. 무한한 시공간을 넘어서, 무한히 더욱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으러 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려주러 오신 하나님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계시던 분, 그분이 이제 우리 가까이로 오셔서 각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십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