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의 인생

<사사기 13:1-5, 24-25, 16:30-31>

13: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4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5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

24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

16:30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삼손 다 아시죠? 삼손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괴력의 사나이였죠. 힘으로는 당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죠. 여자에 약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을 범하고 비참한 신세에 처해집니다. 하지만 죽기 전 마지막으로 괴력을 발휘하죠. 그 복수와 함께 생을 마감합니다.  

이런 삼손의 인생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한 개인으로서 삼손은 닮고 싶은 인물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가 삼손과 같은 인생을 살길 바라십니까? 사람들이 자기 자녀 이름을 성경인물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 이삭, 다윗 같은 이름이 인기가 많죠. 그런데 자기 자녀 이름을 ‘삼손’이라 짓는 경우를 보신 적이 있나요?

성경은 블레셋 압제기에 이십 년간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였음을 말합니다. ‘사사’란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기 전 백성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던 사람을 말하죠. 이스라엘 공동체 입장에서 삼손은 훌륭한 사사로 평가될 수 있을까요? 아님 실패한 사사라 말해야 옳을까요? 삼손에 대한 평가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닐 겁니다. 삼손을 통해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기드온과 삼손은 여러모로 대조적입니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 생각했던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전 그를 부르신 분이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이 맞는지 줄기차게 확인하려 했죠. 하지만 그렇게 확신에 이른 후에는 담대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때문에 그를 통해 이루어진 일들 속에서 사람들은 그의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눈에 띄는 탁월함을 지니고 있었고, 언제나 그 탁월함은 충동적이고 즉흥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가 괴력을 나타내는 장면에는 언제나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강하게 임하였다’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그 힘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본인 말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삼손 안에서 역사하고 있었지만, 그의 탁월함 속에서 사람들이 본 것은 그 탁월함 뿐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탁월함은 놀라운 성취를 가능케 하지만, 또한 사람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삼손을 일찍부터 나실인으로 부르신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나실인’이란 특별한 서원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사람을 말합니다. 탁월함을 나타내는 사람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진 자임을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는 장치를 마련해 두신 것입니다.

기드온의 경우와 달리 삼손의 부르심은 그가 태어나기 전 그의 부모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불임의 상태에 있던 한 여인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아들을 약속하며 말합니다.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사람이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 할 때 요구되는 것을 민수기 6장은 다음 세 가지로 말합니다. 포도주와 독주, 포도로 만든 것들을 입에 대지 말 것,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 것. 그런데 삼손의 나실인 서원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특징적입니다.

첫째, 나실인으로 부름받은 삼손 본인에게 명확히 부과된 금지사항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것 하나뿐입니다. 둘째, 삼손의 어머니에게도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는 금지규정이 부과됩니다. 셋째, 삼손 자신이 아닌 그의 부모가 서원해야 했습니다. 넷째, 기간을 정해서 하는 일반적인 나실인 서원과 달리, 삼손은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1:7)이 되었습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다시 묻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1:12) 머리 안 자르는 것 외에 보다 자세한 양육지침을 주시면 좋겠다 요청한 것이죠. 이에 대해 여호와의 사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아이를 어떻게 기를까요’ 라는 물음에 ‘아이 엄마에게 명령한 것들을 다 지켜라’ 라는 말로 대답한 것이죠.

그 여인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 합니다.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 합니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과연 그 아이는 어떤 사람으로 자라났을까요?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한 블레셋 여자에게 반합니다. 그와 결혼하겠다 합니다. 그 부모는 반대합니다. 왜 이방여인하고 결혼하려 하느냐? 그러나 삼손은 막무가내입니다. 결국 부모가 못이기고 삼손과 함께 딤나로 내려갑니다. 가는 길에 삼손은 한 포도원에서 젊은 사자를 만납니다. 사자가 그를 보고 포효합니다. 그 순간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합니다.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입니다. 삼손의 괴력이 처음으로 발현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달려 있는 구절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자기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14:6) 왜 알리지 않았을까? 어떤 학자는 그 일이 일어난 곳이 ‘포도원’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던 삼손이 포도원에서 사자를 맞닥뜨리던 그 순간에는 왜 혼자였을까? 이는 포도로 만든 것들을 먹지 말라는 일반적인 나실인 규정을 지킬 마음이 삼손에게 없었다는 것과, 그럼에도 그가 그의 어머니에게 부과된 그 규정을 의식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후에 다시 딤나로 내려가는 길에 삼손은 그 사자의 주검을 봅니다. 그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 것을 보고,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지지 아니하였다’(14:9) 합니다. 이유는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또다시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일반적인 나실인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는 지침을 받은 그의 어머니로 하여금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삼손은 이를 의식한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삼손의 부모가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받은 명령을 잘 지키려 노력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노력의 의미와 중요성이 그 아들 삼손에게 동의되게 하는 데는 실패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그 명령과 지침을 압니다. 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따르거나 지킬 마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삼손은 자기 힘의 근원이 삭도를 대지 않은 긴 머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압니다. 하지만 들릴라가 줄기차게 졸라대자 결국 그나마 붙들고 있던 그 마지막 끈 하나마저도 손에서 놓아버립니다.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6:17)

결국 삼손은 머리가 다 밀리고 아무 힘도 쓰지 못합니다. 사사기 기자는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그가) 깨닫지 못하였더라”(16:20)고 기록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합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의 힘의 근원은 그의 긴 머리 자체가 아니라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헌신이 없는 탁월함은 이처럼 어느 순간 방향감각을 잃고 좌초합니다.

하나님이 삼손을 나실인으로 부르신 것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공동체적 차원이 삼손의 인생에 또다른 의미를 부여합니다. 앞서 기드온이 부름받던 당시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노략질에 의해 고통을 겪던 시기였다면, 삼손이 부름받던 당시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정치적으로는 물론 문화-종교적으로도 먹혀버린 시기였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완전히 팔려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삼손은 자라서 행동적인 사람이 되었으나, 그의 행동은 동족 이스라엘을 섬기거나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열망과 깊이 연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다분히 자신의 욕망과 충동에 이끌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에 해를 가합니다. 하지만 대단한 역사의식에 기반해 하는 일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15:11) 상대의 행동에 대한 반작용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영이 삼손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우리가 기대할 만한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말입니다. 여기에 어떤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 있을까요? 사사기 14장 4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삼손 시대에 이스라엘은 너무나 주변세계에 순응한 나머지 풍파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기꺼이, 아니 심지어 간절히 블레셋 사회와 결합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복수하려고 올라왔을 때 유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리고 삼손을 향하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활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어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줍니다. 교회와 세상 간에 아무런 충돌도 없다면 그것은 세상이 교회를 점거해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에 먹혀버린 교회, 비단 삼손 시대의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블레셋을 향해 줄기차게 ‘내려가는’ 삼손의 모습은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고 블레셋을 향해 끊임없이 추락하는 당시 이스라엘의 자화상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꼭 문제가 발생합니다. 삼손과 블레셋 사람 사이에 트러블이 생깁니다. 당할 때마다 삼손은 분노 가운데 블레셋을 들이받습니다. 늘 충동적으로 움직입니다. 이런 한심한 사사지만 그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틈을 벌리십니다.

이렇게 삼손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여할 뿐 아니라 또한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죄에도 관여합니다. 그래도 그의 인생이 이스라엘의 사사다웠던 순간이 딱 두 번 있습니다. 한번은 레히에서, 한번은 가사에서입니다. 두 번 다 오직 하늘을 향한 길밖에 없어 하나님을 찾았던 순간들이었습니다.

동족 유다 사람들에 의해 결박된 채로 블레셋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던 레히에서 다시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합니다.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삶과 같이 끊어집니다. 나귀 턱뼈를 집어 들고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이기 시작합니다. 시체가 한 더미, 두 더미, 어느덧 천 명을 죽입니다. 무슨 히어로물 보는 것 같습니다. 싸움이 끝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며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합니다. ‘턱뼈의 산’이란 뜻입니다. 이제 그곳은 삼손이라는 히어로의 영웅적 행적을 기억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힘을 쓰고 난 후 삼손은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 됩니다. 여호와께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 우묵한 곳을 터뜨려 물이 솟아나게 하십니다.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한 삼손은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부릅니다. ‘부르짖는 자의 샘’이란 뜻입니다. 어쩌면 그 순간이 삼손이 자기의 무력함을 인식한 최초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 날의 일이 ‘턱뼈의 산’으로 끝나지 않고 ‘엔학고레’로 이어졌기에, 그때부터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하나의 사건은 이 암시적인 말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16:22)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블레셋 사람들의 머리가 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의 힘과 머리털의 길이는 이제 관련이 없어졌다, 한번 머리를 깎음으로 해서 서원은 깨어졌고 이제 여호와는 그를 떠났다 가정했음에 틀림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삼손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며 삼손이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자 건물이 무너지고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다 합니다. 삼손의 죽음과 함께 많은 것들이 함께 죽었을 것입니다. 잘못 세워졌던 것은 무너져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개인과 공동체에게도 해당되는 얘깁니다.

삼손의 인생은 우리에게 비극적인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헌신이 없는 탁월함은 무의미합니다. 그런 탁월함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이미 많습니다. 삼손을 나실인으로 부르신 하나님이 그에게 바라셨던 것이 그저 머리에 칼을 대지 않는 것 정도였을까요? 거기서 시작해 그가 하나님을 체험하고 언젠가 자발적으로 자기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길 그분은 바라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든 블레셋 사람이든,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탁월함보다 먼저 거룩함입니다. 의무감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진리 안에서의 자유로 인도하고, 또한 거룩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 복음의 은혜를 누리며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시고, 예수님 닮은 거룩함을 입게 하셔서, 하나님 주신 좋은 것들이 하나님 나라 역사에 귀하게 쓰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