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1년 1월 24일)
- 창세기 26장 1-25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신앙에 이르는 길 - 창26,1-25.docx
<창세기 26:1-25>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6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1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8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3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 인생을 사는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어떤 사람은 겪는 상황들 속에서 점차 참된 신앙에 이르고, 또 어떤 사람은 좀처럼 그리 되지 못합니다.
신앙이 삶을 위해 있는 것인가, 삶이 신앙을 위해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은 한번쯤 던져볼 필요가 있지만, 답은 둘 중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길에서 복된 삶에 이르고, 복된 삶의 길에서 참된 신앙에 이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었다 해서 그 아들 이삭도 자동적으로 믿음의 사람이 되리란 법은 없을 겁니다. 대를 이어 전수되는 것은 약속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고, 믿음이 생겨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친히 새로 빚어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과정은 그분이 택하신 사람이 신앙에 이르는 여정과 겹쳐집니다.
이삭이 살던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몇십년만에 다시 찾아온 큰 흉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데리고 블레셋 사람의 땅 그랄로 이주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전에 아브라함에게는 ‘떠나라!’ 하셨었는데, 이번에 이삭에게는 ‘머물라!’ 하십니다. 문맥상, 당시 이삭은 이집트로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복주심과 땅주심에 관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그 앞에 조건이 붙습니다: (네가) 이 땅에 거류하면…
자기 인생에 닥친 위기를 잘 넘기는데 블레셋 땅보다는 이집트 땅이 나을 것이라고 이삭은 생각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있는 곳에 머물러 있으라 하시고, 그렇게 하면 그에게 복을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그에 따라 이삭은 자신의 인간적 판단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하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앞에 약속을 주신 근거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맹세로 주셨던 약속을 이제 그의 아들 이삭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삭에게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순종 때문이라 말씀하십니다.
얼핏 보면, 이삭은 아버지의 순종 덕분에 가만히 앉아서 복을 받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때 이삭이 받는 것은 단지 ‘약속’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그에게 다시 주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이것도 아버지 덕인 것은 사실입니다. 아브람이 순종을 보이기 전에 은혜로 먼저 약속을 받았던 것처럼, 이삭도 그가 순종을 보이기 전에 은혜로 먼저 약속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조건부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실제 성취되느냐 안 되느냐는 이삭의 반응에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기에 그가 받은 약속이 그 아들에게도 유효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삭의 순종 여부가 다시 그 다음 세대에 대한 이 약속의 유효성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의 삶과 무관하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이삭의 삶을 통하여 성취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삭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자, 그렇다면 이삭은 어떻게 했을까? 6절에 그의 첫 반응이 나옵니다: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이집트로 가지 않고 지금 있는 그곳에 머물러 있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일단 순종의 반응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 사람들이 아내 리브가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이삭은 그녀를 자기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아리따운 그녀를 자기 아내라고 하면 그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이와 똑같이 행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삭의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하나님은 분명 그에게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삭의 삶에 필요한 안전과 행복과 생활기반에 관한 약속이라 할 것입니다. 이 약속에 비추어보자면 이삭의 그 행동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삭은 별 생각없이 그렇게 행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 삶의 문제와 연관시키지 못하고 그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방식을 따라 그리 행동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것이지 약육강식의 정글같은 세상에서는 거기서 통할 무기로 싸워야 한다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 중에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말씀이 책 속에만 있고 삶 속에 스며들지 못하는 문제, 머리에 지식으로만 있고 행동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문제가 늘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고 있는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추궁하지요. “네 아내를 왜 네 누이라 하였느냐? 내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를 건드려 죄를 지을 뻔했다.”
때때로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때때로 그들의 행동은 우리들의 행위보다 의롭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사형을 받으리라” 이 엄한 칙령을 통해 아비멜렉은 자기 땅에 들어온 이방인에게 호의를 베풉니다.
만약 이 상황이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이었다면 이삭은 그 시험에 낙방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험이라기보단 깨달음의 기회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이삭은 분명 뭔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를 통해 배워 새롭게 될 수 있다는 것과, 우리 안에 믿음이 생겨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아비멜렉의 호의로 이삭은 그 블레셋 땅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됩니다. 거기서 이삭은 농사를 지었고 그 해에 백 배의 소출을 얻었다 합니다. 기근의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축복이란 말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겁니다. 그는 부자가 되었고, 점점 재산이 불어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 합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우는 일이 벌어집니다. 전에 호의를 베풀었던 아비멜렉조차도 이삭을 불러 말합니다: “네가 우리보다도 훨씬 강해졌으니 여기서 떠나라!”
17절에 이삭의 반응이 나옵니다: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아무 말 없이 그 땅을 나와 인접한 변두리 골짜기에 다시 장막을 칩니다. 나그네의 설움이 느껴지는 대목이지만, 이제 힘이 있음에도 힘을 물릴 줄 아는 온유함이 보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삭이 달라졌다는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들 속에서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거주지를 옮긴 이삭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물 문제’였습니다. 그 많은 식솔들과 가축들이 먹어야 할 물이 필요했습니다. 전에 그랄에 살 때 사용하던 우물들은 블레셋 사람이 다 메워 버렸고, 지금은 그 지역에서도 쫓겨난 상황이기 때문에, 이제 이삭은 새로운 물의 공급처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자, 이 상황에서 이삭은 어떻게 했을까요? 18절에 보니까,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고 합니다. 이 때 다시 판 우물들이란 어디에 있던 어떤 우물들을 말하는 걸까요?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그것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메워 버린 우물들을 말한다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우물들은 블레셋 사람이 이삭을 시기하여 메워 버린 저 그랄 지역의 우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블레셋 땅에 살던 시절에 그 땅 여러 지역에 팠던 것들로서 이후 그가 죽었음을 알고 블레셋 사람이 메워 버린 우물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왜 이삭은 그 우물들을 다시 팠을까? 1번) 전에 물이 나왔던 곳이니까 다시 물이 나올 가능성이 더 높다 생각해서. 2번) 전에 아버지 소유였으니까 다시 파서 얻게 되면 후에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기 용이할 것이므로. 3번) 그의 아버지와 함께하셨던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과 앞길을 의탁하며 인도하심을 구하는 마음으로.
답이 뭘까요? 정답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셋 다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셋 다 아닐 수도 있겠죠. 제 나름 가능한 답들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이삭은 그렇게 아버지가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판 다음,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다 합니다. 그 우물에 대한 자기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서 걸어갔던 길을 되새기며 이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앞길이 막막할 때,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살 길을 찾아야 할까요? 매일의 신문기사 속에서, 각 분야 전문가들의 분석과 통찰 속에서, 미래학자들의 전망 속에서, 주변 사람들이 사는 방식 속에서, 분명 우리는 도움 되는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 속에서 우리는 참으로 우리를 살리는 물, 참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이란 말 속에서 저는 ‘성경’을 연상합니다. 성경은 어떤 책일까요? 우리 앞서 살다간 신앙의 선조들이 그들 삶의 자리에서 목말라 하나님을 찾으며 파내려간 우물들이며, 또 거기서 솟아나온 생명의 물들이 아닙니까? 그 수많은 옛 우물들이 성경 안에 존재하지만, 이삭처럼 그것을 수고하며 다시 파지 않으면 우리는 그 생명의 물을 마실 수 없을 것입니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이삭은 전에 아버지가 팠던 그 옛 우물들에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전에 아버지와 함께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함께하심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그는 계속 우물을 팠을 겁니다. 당시 이삭에게 우물을 파는 일은 단지 생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삭이 옛 것에만 집착했던 건 아닙니다. 이삭의 종들은 그들이 머물던 골짜기에서도 팠고, 거기서 샘 근원을 얻었다 합니다. 이 ‘샘 근원’의 문자적 의미는 ‘살아 있는 물’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콸콸 솟는 샘줄기’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종들이 이렇게 좋은 샘을 찾아내자,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며 그 물을 자기네 것이라 우기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붙이죠. ‘다툼’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더이상 다투지 않습니다. 물러나 다른 곳으로 가서 또다시 우물을 팝니다. 그러자 목자들 사이에 또 다툼이 생겼고, 이에 그 우물 이름을 ‘싯나’라 합니다. ‘대적함’이란 뜻입니다.
이삭은 또다시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팝니다. 이번엔 다투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붙이죠. ‘장소가 넓다’, ‘마침내 여호와께서 우리 앞을 활짝 열어 주셔서 우리도 이 땅에서 번성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이삭은 좌절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본문 2절 말씀 속에서 한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이삭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하나님은 이삭에게 그가 있을 곳을 명확히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랄에서 수치와 축복과 배척을 다 경험하고, 이후 그곳을 나와 그랄 골짜기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이삭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시는 땅에 이르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불확실성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을 향해 떠났던 것처럼, 이삭 역시 불확실성 속에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을 향해 계속 움직여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같은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기에 그들은 불확실성과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또다시 거처를 옮겨 브엘세바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이삭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예비하신 곳이 바로 그 곳임을 깨닫습니다.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칩니다. 그랄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이삭이 걸어온 길은 그가 참된 신앙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에서 그의 믿음은 자랐고, 마침내 그곳에 이르렀을 때 그는 전보다 큰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이 그의 신하들과 함께 이삭을 찾아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우리가 보니)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다!” 참으로 믿는 사람에게서 그의 주위 사람들은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삭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믿기만 하면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해주시리라는 것을 성서는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만백성이 복을 받으리라’는 복음을 미리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갈3:7-9/공동번역)
성경에 적힌 약속의 말씀들이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한 약속의 말씀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역시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복을 이어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각 사람에게 약속된 복입니다.
하지만 주어진 것은 약속일 뿐,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그 약속된 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삭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 원리는 동일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잘 읽고 순종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실 뿐, 우리 삶에 필요하다 생각되는 세세한 정보들을 다 가르쳐주시진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현실을 뚫고 나가는 가운데 믿음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그 길의 끝에 이르렀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금 어디에 이르렀든지, 다만 그 길 위에 계속 서는 일이 중요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 안에서 우리를 이 신앙에 이르는 길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하나님이 있으라 하시는 곳에 있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곳으로 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말씀에 순종하며 참된 신앙에 이르기 원합니다. 우리가 옛 우물을 다시 파게 하시고, 당신의 생수를 마시게 하시며, 신앙의 길 위에서 더 온전한 모습으로 빚어지게 하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