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 설교 – 2018. 03. 04

본문: 사도행전 16장 16-34절

 

1. 오늘 본문에는 매였던 것에서 해방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연속해서 나옵니다. 귀신 들려 점치는 일을 하던 한 노예 소녀는 그 귀신의 지배에서 해방됩니다.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는 그들을 묶고 있던 족쇄에서 해방됩니다. 상관의 책임추궁이 두려워 자결하려 했던 간수는 그 공포와 절망에서 해방됩니다. 그들은 모두 곤궁에 처해 있었지만, 오히려 그 상황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삶 속에 해롭게 끼어드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보니 서로에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기대치 않은 사람을 통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2. 바울 일행이 기도하러 가는 길에, 점치는 귀신들린 한 소녀가 뒤를 따라오며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댑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며칠을 그렇게 하자 괴로움을 느낀 바울은 결국 돌이켜 예수의 이름으로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냅니다. 우리는 이 일이 바울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실제론 바울이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내키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악한 자에게서 오래 고통받아온 그 작은 소녀가 그날 거기서 풀려나기를 바라셨습니다. 바울이 기도하러 가는 길에 그렇게 한 존재가 끼어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길에도 그렇게 한 존재가 끼어들 수 있습니다.

3. 놀랍게도, 그곳에 구원이 가까이 이르렀음을 먼저 선포한 사람은 바울이 아니었습니다. 그 귀신들린 노예 소녀였습니다. 그녀의 점치는 능력으로 재미삼아 혹은 자랑삼아 그렇게 몇날며칠 외쳐댔을까요? 저는 그리 생각되지 않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라도, 노예라도, 소녀라도,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살아있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소리칩니다. 물론 그 표현은 세련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투박할 수 있고, 때로는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정체성 형성기에 청소년들은 세련되게 저항하는 기술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위협적인 누군가에게 흡수되어 사라지지 않으려고 때때로 기이하고 밉살스런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본문에 소녀는 특유의 발달된 직관으로 자신이 살기 위해 무언가 행동해야 할 때가 이르렀음을 알아챘던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은 진정한 내가 아니라고, 내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다고, 나를 좀 봐달라고… 어쩌면 그녀는 들키지 않기 위해 그처럼 마치 점치는 듯한 화법으로 계속 싸인을 보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계속 외면당했지만, 그래도 포기치 않았고, 마침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4. 하지만 그 소녀를 둘러싼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았습니다. 그녀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사업에 큰 손해가 미친 것을 알고는,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리들에게 고발합니다. 내세운 명분은 사실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 여행자들이 와서 그 도시에 혼란을 끼치고, 로마시민인 자신들을 이상한 유대종파로 개종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곳 사람들의 반-유대인 정서를 부추기고, 바울과 실라를 법적으로 고발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 이익’ 뿐입니다. 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존중의 마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무엇이 내게 이득이 되는가’를 중심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그들은 마치 ‘돈의 노예들’ 같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양심을 무디게 하고, 거짓말을 지어내게 하고, 사람들 사이에 적대감을 조장하고, 무고한 생명에게 위해를 가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노예로 부리던 소녀는 마침내 구원에 이르렀지만, 이 돈의 노예가 된 어른들은 구원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많이 맞은 후 옥에 갇히고 족쇄에 채워집니다. 그것은, 한 소녀에 대한 어른들의 착취, 그 도시에서 공공연히 행해지던 불의에 대해 바울이 방해꾼으로 끼어들면서 발생한 고난이었습니다.

5. 이처럼 힘있는 자가 자기 욕망과 이익을 위해 힘없는 자를 착취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자신이 과거에 어떤 영향력 있는 남성에게 겪었던 성적 피해를 폭로하는, 여성들의 미투운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없이 울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아프게 인식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자연도 인간의 탐욕과 착취에 의해 신음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최근들어 그 이상징후가 더 뚜렷하게 감지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세상에는 마치 돈이면 다 되는 듯, 사람이 마치 상품처럼 마음대로 이용하고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존재인 듯 생각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복음은 한 인간을 이렇게 대하는 것에 단호히 저항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한 사람 한 사람의 유일무이한 가치와 대체불가능성을 주장합니다. 내 앞에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가 애통하는 소리를 외면치 않는 것은 그 사회의 구조악에 눈뜨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바울과 실라처럼,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고난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6.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밤에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령이 그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죄수들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신기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며 땅이 흔들립니다. 이어 모든 문이 열리고 모든 매인 것이 벗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 상황에 끼어드신 것입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깜짝 놀라며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합니다. 그때 바울이 소리칩니다. “당신 몸을 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다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자 간수가 들어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겠습니까?” 바울이 대답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당신과 당신 가족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 ‘예수’ 앞에 ‘주(主)’라는 말이 붙어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그날 간수와 그의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7.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이 질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방금 전 그 일을 겪고서야 간수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갇혀 있고 매여 있던 것은 바울과 실라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는 것을, 실상 구원 받아야 할 존재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지도 족쇄에 매여 있지도 않았지만, 자기 소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세상의 가치관에 갇혀 있었고, 그가 ‘주(主)’로 섬기는 상급 권력자에 대한 두려움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직무에 심각한 결함이 생겼다고 느꼈을 때, 그는 이제 모든 게 끝장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문이 열리고 족쇄가 벗어졌지만 죄수들이 달아나지 않고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 그들은 분명 갇혀 있었고 매여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갇혀 있지 않고 매여 있지 않은 것 같은,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간수는 그들에게서 새로운 세계를 본 것입니다. 그들 속에 무언가 새로운 생명이 역사하고 있음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좋고 온전한 것임을 인지한 것입니다. 그가 처한 곤경이 그가 속한 세계의 실체와 한계를 보게 하였고, 마침내 그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 새로운 생명에로의 구원을 갈망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8. 사순절, 예수님의 십자가 순례에 동참하는 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을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들을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도 포기할 수 없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태18:10,14)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한 사람에 관한 여러 사실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하나님 눈에 고귀한 존재이며,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구원이 필요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이 필요함을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처한 삶의 곤경 속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본문에 노예 소녀처럼, 다소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신호를 보내는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구원이 그들 가까이에 있음을 일깨워줄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 자신이 지금 얽매여있는 것들로부터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래서 한 사람을 좀더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아마 우리는 구원의 빛을 더 잘 비춰주는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과 실라처럼, 우리에게 임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생명을 증거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순절, 십자가를 바라보는 절기에, 새롭게 하시는 주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