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 설교 – 2018. 05. 06

7. 또한, 하나님은 야곱을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가셨습니다. 5절에서 야곱은 에서에게 자신을 ‘주의 종’이라 호칭합니다. 형을 ‘주’로, 자신을 ‘종’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얼핏보면 형의 호의를 얻으려는 처세술 같습니다. 그런데 이십 년 전 그가 형에게서 가로챈 장자의 복이 뭐였는가를 생각하면, 그게 단순한 처세술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문제의 그날, 아버지 이삭은 이렇게 야곱을 축복합니다.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기를 원하노라”(27:29) 그러므로 지금 야곱이 자신을 에서의 ‘종’이라 하는 것은, 그가 과거에 욕먹어가며 쟁취했던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8. 야곱이 아직도 덜된 사람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장자의 특권을 누리려고 별짓을 다하고, 그 힘든 시간을 견뎌왔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제 와서 이걸 포기할 순 없지!” 그렇게 자존심을 부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리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속임수로 장자의 축복을 받아낸 야곱은 그후 마음 한켠에 의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받은 축복도 과연 유효할까? 하나님께서 과연 내게 복을 주실까, 오히려 벌을 내리시진 않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무거운 마음으로 도망길에 오른 야곱을 노상에서 만나주십니다. 그럼에도 그를 복의 통로로 사용하겠다 하시고, 그가 어디로 가든 함께 하겠다 약속하십니다. 자격이 없는 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9. 이처럼 못된 사람에게 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가? 다 이해되진 않지만,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건 그처럼 값없이 주어진 사랑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후 야곱은 입에 ‘은혜’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이 됩니다.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그는 기도 중에 고백합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32:10a) 지나온 시간 속에 분명 힘들고 억울한 순간이 많았음에도 불평보다 감사가 앞서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자신이 이처럼 가족을 얻고 재산도 갖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10. 이 은혜의식이 그를 겸손한 행동으로 이끕니다. 형에게 나아가며 그는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힙니다. 물론 형의 호의를 얻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이 속엔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에서가 먼저 자신을 ‘내 동생’이라 부를 때까지 그를 ‘형님’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내 주’라고 부릅니다. 앞으로의 자기 운명은 형에게 달려있음을 겸허히 인정하면서, 무력함 가운데 형의 처분을 기다린 것입니다.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8b) 참된 화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처럼 서로 겸손하고 진실하게 은혜를 구하고 또 은혜를 베푸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자비와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소리없이 나의 연약함을 용납해주고, 또 소리없이 나의 짐을 함께 져주는 사람들 덕분에 지금 이만큼이나마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11. 끝으로, 하나님은 야곱을 ‘용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가셨습니다. 화해로 가는 성숙의 길에서 그가 배워야 했던 마지막 과목은 ‘담대함’이었습니다. 형 에서가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에 야곱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형의 마음을 풀어보고자 예물을 앞서 보내고, 가족들 먼저 강을 건너게 한 뒤, 그는 얍복 나루에 홀로 남습니다. 그리고 밤새 어떤 낯선 존재와 씨름을 하게 됩니다. 그 씨름의 결과 야곱은 허벅지 관절에 부상을 입지만,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고, 또한 축복을 받습니다. 이후 에서를 향해 나아가는 야곱의 모습에는 전에 없던 담대함이 보입니다. 3절에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그는 비록 다리를 절며 걸었지만 가장 앞에서 걷고 있었습니다.

12. 화해에 이르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이의 얼굴을 대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나를 미워하는 것 같은 이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입니다. 에서가 실제 어떤 마음을 먹고 오는 중인지 알지 못함에도 지레 겁먹은 야곱처럼, 우리 역시 그런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화해의 여정에서 뒷걸음질치곤 합니다. 그러고보면, 화해의 여정이란,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낯선 존재, 그 표정을 예측할 수 없는 상대와의 밤새운 씨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처음엔 당황스럽고 겁이 나지만, 막상 붙어보면 해볼만한 것… 처음엔 그가 내게 엉겨붙어 마지못해 맞붙지만, 나중엔 오히려 내 편에서 그를 놓아주지 않게 되는 것… 야곱은 그가 밤새 씨름했던 상대가 하나님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낍니다.

13. 이 하나님 체험이 그의 마음을 바꾸고 태도를 바꿉니다. 이제 그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형님과의 만남을 마치 하나님과의 만남처럼 여기게 됩니다. 형님의 반응이 어떠할 것인지에 상관없이 그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듯 형님께 은혜를 구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형님과의 화해를 이루고나서, 본문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비단 에서의 호의에 감격해서 하는 말만은 아닐 것입니다. 야곱은 겸손함과 담대함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듯 형님의 얼굴을 대면하러 나아갔고, 마침내 그 형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14.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나뉘어진 나라가 굳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헤어진 사람들이 굳이 다시 만나야 하는가? 깨어진 관계가 굳이 다시 회복되어야 하는가? 서로 다른 피부색과 언어와 문화와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굳이 이렇게 함께 모여야 하는가? 이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미움과 다툼, 상처와 분노, 분리와 대립이 있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은 세상 끝날까지 화해를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도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지금보다 더 자족할 줄 아는 사람, 더 겸손한 사람, 더 용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그렇게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