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3월 8일)
- 이사야 6장 6-13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이상한 소명 - 사6, 6-13.docx
<이사야 6:6-13>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는 유다 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였습니다.
예언자란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사야 6장에는 그가 하나님께 예언자로 부름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성전에서 이사야는 놀라운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모습,
그 환상 속에서 이사야는 자신이 저 광대한 하늘 성전에 서 있음을 인식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그렇게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 만군의 여호와를 뵙습니다.
그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부정함을 의식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때 스랍 중 하나가 제단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대어 그를 정결케합니다.
그리고 정결케 된 그는 그 천상의 회의를 주재하던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이사야가 주저없이 나섭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리고 이어지는 9절과 10절에 주목합니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상한 소명입니다.
가서 그들이 깨달아 돌이켜 고침 받도록 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서 그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존재임을 일깨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보고 듣고 깨닫고 돌아와 고침 받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초기 예언자들은 회개와 계시의 설교자들이었습니다.
사무엘, 엘리야, 아모스, 호세아…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선을 행하면 살리라’ 외치며,
백성들의 무딘 마음을 깨우쳐 돌이키게 하고자 애쓴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 이사야는 ‘反계시’와 ‘反회개’의 예언자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깨달아 돌이켜 고침 받는 것을 저지하는 역할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소명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그런 일을 꾀하신다는 사실도 의아하지만,
굳이 그런 일을 하라고 한 사람을 불러 보내신다는 사실은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받을 자들, 즉 ‘이 백성’이 당시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를 알면,
우리는 이 소명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5절에 ‘입술이 부정한 백성’으로 표현된 유다 백성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사야 1-5장 속에 하나님의 눈에 비친 그들의 실상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는 백성이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깨뜨리고, 선악과 진위 기준을 뒤엎은 백성이라 합니다.
이 얘기를 당시 유다 사람들에게 했다면 아마 그들은 헛소리 집어치우라 했을 것입니다.
웃시야 시대 유다는 경제적으로나 군사력에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고 모든 게 잘 풀리고 있는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시대 유다인들에게 유일하게 골치아픈 문제는 주전 750년경 그들의 왕이 무시무시한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강성해지자 그는 교만해졌고, 급기야 왕이 해서는 안되는 일도 서슴없이 하려 했습니다.
그 일로 그는 나병환자가 되었고, 별궁에 격리되었으며, 아들 요담이 대신 왕좌에 앉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웃시야는 백성들 사이에서 여전히 영광과 명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계속 통치자로 인정을 받았고, 그의 이름은 유다 국력과 안정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었을 뿐, 하나님이 보시는 유다의 실상은 달랐습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5:8)
웃시야 이래로 형성된 지주계급과 농업경영자들의 토지겸병과 독점에 대한 정죄입니다.
당시 농업생산의 다량이 수출되고, 대신 지배층의 사치품과 군수물자가 수입되었습니다.
그 자신만만한 상황에서 지배층들은 향락에 빠져들며 영적인 감수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5:11-12)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 하나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어리석고 거짓된 모습이었습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5:20-21)
그처럼 문명의 보화가 떠받들어지는 분위기에서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쉽게 빠져들었습니다.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2:7-9)
그와 더불어,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억압과 착취가 행해졌습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멧돌질하느냐” (3:15)
이사야 5장 7절의 말씀이 이 모두를 요약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멀쩡하고 대단한 존재 같으나 실상은 병들어 있던 그들의 왕처럼 그 백성은 병들어 있었고,
더 심각한 것은, 자신들이 문제가 있음을 그들은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
자신이 무지함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든 배우려 할 것이고,
자신이 병들었음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든 고침 받으려 하겠지만,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있으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
심히 병들어 있으면서도 괜찮다 괜찮다 하며 치료 받길 거부하는 사람,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천상의 어전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은 이것이었습니다.
그 백성이 자기 지혜와 자기 고집대로 행하다 뼈저리게 고통을 겪게 두자!
그래서 그들이 귀 먹고 눈 먼 자였음을 후에 스스로 인정하게 하자!
그때에야 진심으로 뉘우치며 돌아와 고침을 받게 하자!
이 일을 위해 한 예언자가 그 백성에게 가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듣게 하기 위해… 들어도 깨닫지 못할 엄청난 진실의 전달자로!
또한 그들이 보게 하기 위해… 보아도 이해 못할 심오한 표적의 계시자로!
이후 이사야는 유다의 왕과 백성들에게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일들,
하나님께서 민족들 가운데서 계획하신 일들을 말하거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 게 옳은지 알려줍니다.
그러나 말해줘도 그들은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너무 밝은 빛은 눈을 멀게 하고 너무 큰 소리는 귀를 멀게 할 수 있듯이,
이사야의 말과 표적들은 하나님께 속한 너무도 엄청난 진실을 품고 있는 것이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눈 멀게 하고,
더욱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귀 먹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 결과로,
그 백성은 계속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며 외세에 의해 고통을 겪게 될 것이고,
이사야의 예언은 봉함한 책으로 남아, 후에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을 밝혀줄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는 그 백성이 나름 안다고 주장하는 것들을 분쇄하는 역할로 부름받은 셈입니다.
지혜자의 지혜와 총명은 정상적인 경우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멀어진 경우에 구사되는 지혜와 총명은 오히려 올무가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말씀을 우리는 곱씹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염려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그들이 회개하고 치유받길 그분이 원치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어줍잖은 회개, 진심이 안 담긴 회개를 그분이 원치 않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말씀의 행간에서 우리는 그런 일시적이고 불충분한 회개조차도
하나님의 중대한 결정이 흔들리게 할만큼 그분께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암시와 더불어,
이미 그 회개 가능성의 지점을 넘어버린 백성의 멀어진 마음과,
그러므로 그들을 제대로 치유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언제까지 그들이 그 무지하고 탈선한 상태에 있을 것입니까?
또 언제까지 제가 이 환영받지 못할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까?
그 땅의 성읍들과 가옥들과 토지들이 황폐하게 되고,
주민들 다수가 유배되어 영토 대부분이 황폐하게 될 때까지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후에 있을 앗시리아의 침략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드리워집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그 심판의 불이 온 땅을 휩쓴다 해도, 반드시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그루터기’, 새로운 하나님 역사에 쓰임받을
‘거룩한 씨’가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가?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 먼저 우리를 정결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그분의 메신저로 보내고자 하셨고, 그에게 그 일을 맡기기 전에 먼저 그의 입술을 깨끗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에,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개인과 공동체를 그분의 일로 부르시기 위해 먼저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입니다.
그 과정이 때로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 일이 잘 마쳐지고나면 우리 귀에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고,
그때 우리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주저없이 대답하며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겸손히 사모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는다고 다 깨달아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눈으로 본다고 다 이해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겸손히 사모하는 자에게 열립니다. 자기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에게 열립니다.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는 자에게 열립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한 자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입니까?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잘 안 들어오고 마음에 잘 와닿지 않는다면, 지금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상태, 결코 그것은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지능의 높고낮음, 지식의 많고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얼마나 멀거나 가까우냐의 문제라 할 것입니다.
겸손히 사모하며 깨닫고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바로 이해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가버리셨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로 그냥 끝이 났지만, 그 중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홀로 계실 때 가까이 나아가 그 비유의 속뜻을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막4:11-12)
여기 이사야서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그 뜻을 아무나 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알고자 다시 한 발 더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 그들에게만 그 진리를 열어주고자 하심이라는 뜻입니다.
좀 의외지요? 모두가 구원받길 바라는 주님이시기에, 모두가 진리에 쉽게 접근하도록 그 입구를 활짝 열어놓으실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10:27)
구원은 그 마음이 겸손히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자에게 위로부터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2:9)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10) 말씀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내 눈에 잘 안 들어오고 마음에 잘 와닿지 않는다면,
혹시 지금 내 마음이 길 가와 같이 허술한 마음, 혹은 돌밭과 같이 완고한 마음,
혹은 가시떨기밭과 같이 분산된 마음이라서 그런 게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겸손히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람은 ‘거룩한 그루터기’에 대한 주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메시지를 전하는 자로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을 자꾸 겪으며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열심히 수고하여도 결실이 보이지 않는 일을 계속 열심히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사야가 그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 계속되는 황폐함 속에서도 끝끝내 그루터기는 남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난을 겪고 죽으셨지만 그 십자가 사랑은 우리 영혼에 박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기대를 져버리고 예수님이 왕궁이 아닌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하셨을 때, 사람들은 그가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다 생각했겠지만,
그분이 하늘로 가신 후 지상에 남겨진 그 열두 명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그루터기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거룩한 씨앗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람은 이 예수님의 본을 따라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남겨질 이 거룩한 그루터기를 바라보며 주님의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순례에 동참하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의 마음과 삶이 치유되고 정화되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겸손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그 진리 안에서 먼저 가신 주님의 길을 잘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를 당신께로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또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맡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세우셔서 우리를 정결케하여 주시옵소서. 겸손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말씀 앞에 서게 하시고, 그 뜻을 깨달아 순종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진리의 빛을 비춰주셔서 우리가 당신의 길로 행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