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1년 6월 13일)
- 야고보서 1:2-4, 5:11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인내하는 자의 복 - 욥1,2-4+5,11.docx
<야고보서 1:2-4, 5:11>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야고보서는 고난 가운데 있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해 쓴 편지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위협하는 박해와 순교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당시 그 공동체 구성원들은 경제적 압박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로 인해 교회 안에도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힘을 합하여 서로 도우며 더욱 하나되어 갈 수도 있었고, 반대로 세상과 타협하며 정체성을 상실하고 싸우며 갈릴 수도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야고보 사도는 ‘시험’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1:2-3)
그 고난과 시험의 상황이 주는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시련이 ‘인내’라는 덕성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4)
인내를 ‘이루라’ 합니다. ‘이룬다’는 말은 시작된 어떤 일이 잘 마쳐지게 하는 걸 말합니다. 우리 각 사람 안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진행해가시는 일이 잘 마쳐지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 이르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고난과 박해의 불 가운데서도 믿음과 인내의 덕성을 굳게 붙잡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성품 가운데 있는 불순물들이 타버리고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성품이 빚어집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12)
시험을 참는 자, 인내하는 자에게 예비된 복이 있습니다. 그 연단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된 자들에게 약속된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13)
하나님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끄시는 분이 아닙니다. 고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스스로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서, 그 모든 잘못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그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좋은 것들을 언제나 위로부터 풍성히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1:16-17)
이처럼 인내하는 자의 복을 말하며 야고보 사도는 욥의 인내를 언급합니다. 옛날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극심한 고난이 임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부당하게 여겨지는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겪은 고난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 때, 그가 이루어간 인내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 것입니다.
우선 그것은 상실의 고통이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소유물을 하루 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들도 잃었습니다. 건강도 잃었습니다. 온 몸에 종기가 나 고통 속에 하루 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욥은 또한 관계의 고통도 겪었습니다. 그에게 불행이 임하자 형제들은 그를 떠났고, 친척들은 그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그를 잊었습니다. 전에 그는 사람들의 존중과 존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종들과 어린 아이들에게도 무시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상황을 허락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에게서 철저히 얼굴을 숨기고 계시다는 사실, 그것보다 욥을 고통스럽게 한 것이 또 없었을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욥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껏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의롭게 살고자 애써 왔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이 악한 사람이 평안과 번영을 누리며 사는 모습이 눈에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따져 묻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었습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사실 욥이 겪은 고난은 그의 죄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가진 것을 다 잃어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욥이 온전함을 지킬지 시험해보겠다는 사탄의 요구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친구들의 해석은 틀렸습니다. 그들이 욥에게 하는 말들은 그 말만 떼어 놓고 보면 멋진 말이고 맞는 말 같지만, 욥의 상황에 대입하면 엉뚱하고 오류 가득한 말이 되어버립니다. 그 말들이 욥에게는 또하나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욥기를 처음부터 읽은 독자들은 뒤에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하는 말들을 들으며 깨닫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상황에 대해 보고 아는 것이 저렇게 제한적이구나! 우리가 저렇게 보고, 저렇게 아는 상태에서, 저렇게 말하며 살고 있구나!
욥이 솔직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하고자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의롭게 살고자 애쓴 것 아시면서 저에게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 너무하신 것 아니에요?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면 안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을 놓지 않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오랜 고난과 인내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말에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38:2-4)
이런 질문들이 그 뒤로도 쭉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변명하시지 않습니다. 욥이 겪은 일에 대해 해명의 필요를 느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행하신 일은 악이 아니라 선, 끌어내리는 일이 아니라 끌어올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깨우쳐주십니다. 피조물인 우리와 비할 수 없이 크신 그분의 지혜와 능력, 존귀와 위엄을.
하나님께 따져 묻고자 했던 욥에게 오히려 하나님이 따져 물으십니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하나님은 욥에게 사람이 하나님께 당연한 권리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일깨워주십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은 당연히 이렇게 하셔야 한다’ 말할 자격이 우리에게 없음을 일깨워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린다면 하나님께 먼저 받은 것으로 드리는 것이요, 우리가 의로운 일을 행한다면 하나님의 더 큰 의로움 속에서 우리가 그 일을 행하는 것임을 일깨워주십니다.
욥이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 그리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해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오랜 고난과 인내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욥은 ‘내 생각 속에서 좁아진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 그분 자신으로서의 하나님’ 앞에 서며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자리에 서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바로 이 고백에 이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바로 이 체험, 이 고백으로부터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회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만난 결과이지, 결코 내 스스로 억지로 짜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욥의 인내와 더불어 주께서 주신 결말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신 후에 그의 친구 엘리바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과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이 구절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너희는 내 이야기를 할 때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에 욥의 세 친구는 욥을 찾아가 명령대로 행하였고, 욥은 그들을 위해 번제와 기도를 드렸으며, 하나님은 욥을 기쁘게 받으셨다 합니다.
하나님 체험 후에 욥은 진실한 회개를 결단하였고, 그 회개는 친구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로 실천되었습니다. 욥이 그처럼 용서와 기도로 친구들과의 화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에 앞서 그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체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가 잃었던 다른 많은 것들을 회복시켜 주셨다 합니다. 그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시고, 새로운 자식들을 또 많이 주셨습니다.
또한 그에게서 멀어져있던 형제들과 지인들이 욥을 찾아와 함께 음식을 먹고 그를 위로하며 그에게 선물을 주었다 합니다. 깨졌던 관계가 회복되고, 잃었던 존엄과 명성이 회복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후 욥은 백사십 년을 더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다 합니다.
다시 아고보서로 돌아옵니다. 경제적으로 곤핍하고 사회적으로 무시받는 고난의 상황, 세상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야고보 사도는 믿음 안에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권면하며 다음의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는 자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더 온전한 모습으로 빚어가시는 분, 그 여정 중에 필요한 좋은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분, 그리하여 마침내 가장 좋은 결말을 이루어내시는 분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들의 어깨가 무거울 것입니다. 변화된 상황 속에서 앞으로 살아갈 일에 막막함과 부담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학업과 진로에 대한 많은 부담과 고민을 갖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룹시다! 어려움 속에서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히 합시다! 서로 차별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존중하며 서로를 세워갑시다! 늘 하나님 안에 거하며 인내하는 자의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의 자비와 긍휼 가운데 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이 우리 안에서 행하고 계신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