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7월 7일)
- 누가복음 4:40-5:11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일과 소명, 그리고 쉼 - 눅4,40-5,11.docx
<누가복음 4:40-5:11>
4: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5: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주님은 우리를 어떤 삶으로 부르셨을까?
지금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의미가 있는가?
만약 내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면 그건 어떤 부분에서일까?
어느 날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다른 복음서에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것은 단순히 ‘직업을 바꾸라’, ‘다른 일을 하라’는 의미였을까요?
그 어부 생활 때려치우고 이제 복음전도자로 살아라!
언제까지 그렇게 물고기만 잡고 있을래? 이제 나를 따라 좀더 고상한 일을 하자꾸나!
그런 뜻으로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를 부르신 걸까요?
그 날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찾아온 사람들이 많아, 모두에게 보이고 들리게 할 방법이 없나 생각하시다가,
거기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중 한 배에 오르셨는데, 그게 시몬의 배였습니다.
그에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거기 앉아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말하자면 그 시몬의 어선이 예수님의 임시 설교단으로 사용된 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배가 그렇게만 사용되길 원치 않으신 것 같습니다.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 말이 당시 시몬과 그 동료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전날 밤새 수고했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지쳐 돌아온 그 어부들…
그냥 바로 집으로 돌아가 몸을 씻고 밥을 먹고 바로 누워 자고만 싶었을텐데,
그 다음 과업을 위해 호숫가에 앉아 또 그물 손질을 해야만 했던 그들…
아마도 그때 그들은 자기들의 일이 싫었을 것입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하지? 이 일에 비전이 있을까? 사는 게 참 그렇다…
만약 예수님의 의도가 단순히 베드로의 직업을 바꿔주는 것이었다면,
그에게 그 물고기 잡는 일의 무가치함을 일깨워주고,
‘더 가치있는’ 다른 일로 그를 불러내는 데 있었다면,
아마 그 순간이 적기였을 것입니다.
이보게.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 참 덧없지 않나? 시간낭비 같네! 그 텅빈 그물을 보게나. 하나님의 복이 그 위에 내리지 않잖은가. 왜 그렇게 사는가? 아마 자네도 진짜 일을 원할 거야. 안 그런가? 내가 자네에게 하나님이 관심 두시는 진짜 ‘주님의 일’을 주겠네. 나를 따라오게. 이제부터 자네는 사람 구원하는 일을 하게 될 거야.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나요?
아니요! 오히려 그분은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죠.
자, 우리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갑시다!
그 말씀 앞에서 베드로는 아마 속으로 낑낑거리고 있었을 겁니다.
허… 우리가 이걸 해야 해? 이 일은 그야말로 진창 구덩이라구! 난 피곤해. 이 일 자체가 피곤해. 허탕치는 거 이제 지긋지긋하다구… 하지만 뭐 알겠습니다. 당신이 그리 말씀하시니…
그렇게 그들은 출항했고, 다시 그물을 내렸으며, 잠시 후 놀라움에 휩싸입니다.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세상에! 이보다 즐거울 수 있는 일이 있나! 오늘은 정말 최고의 날이야! 물고기 잡는 일은 정말 최고의 직업이야! 그래 이 맛이지! 난 정말 이 일을 사랑해!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일터에서도 늘 이런 일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날이 ‘월요일’이어도 뭐가 문제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아주 예외적이고 특별한 한 순간이라는 걸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갑자기 멈춰 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이어 그는 예수님 무릎 아래에 엎드리며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기 앞에 서 있는 분이 누구인지 비로소 실감하며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혹은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러자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다 합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시몬과 그의 동료 어부들을 말합니다.
시몬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본 그의 동료들도
기꺼이 예수님을 따라 새로운 삶의 여정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시점은
그가 자기 일에 더이상 의미와 가치를 느끼지 못하던 침체의 상황이 아니라,
그가 자기 일에서 모처럼 최고의 만족과 희열을 느끼던 절정의 상황이었다는 사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은 시몬이 하던 그 물고기 잡는 일을 결코 무의미한 일로 보시지 않았단 뜻입니다.
만약 그리 생각하셨다면 굳이 그의 배에 동승하셔서 그 일을 도우실 이유도 없었겠지요.
다만 이 과정에서 예수님이 시몬에게 알려주고자 하셨던 건 아마 이것일 겁니다.
아무리 지루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 그래서 마지못해 하던 일도
예수님과 함께라면…
완전히 다른 의미와 빛깔을 띠는 지상 최고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것.
예수님은 그저 베드로의 직종을 바꿔주려 하셨던 게 아니라,
그의 삶 자체, 그의 일 자체를
그 생기없음과 의미없음으로부터 구속해주려 하셨던 게 아닐까?
그저 물고기만 낚는 삶이 아니라,
그 일 속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와 행복도 건져올리는 삶,
그래서 나와 내 가족의 생존을 넘어 내 주위 다른 사람들도 구원으로 이끄는 삶,
그런 삶, 그런 일로 시몬 베드로를 초청하고 계셨던 게 아닐까?
그러므로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의 변화는
단순히 물고기 잡는 일에서 사람 전도하는 일로 옮겨간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 부르시는 곳에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곧 주위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이 되는,
그 일이 곧 사람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일이 되는,
그런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으로 부르시고 나아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의 이야기는 ‘소명’(calling), 즉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당신을 물고기 잡는 어부로 부르신다면,
마음을 다해 그 일을 하십시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분이 그러라 하셨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예수님이 당신을 다른 곳으로 부르신다면,
뒤돌아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그 새 일을 하십시오!
이유는 동일합니다. 그분이 그러라 하셨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그분이 부르시는 곳에서 ‘그분과 함께’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부엌을 청소하는 가정부는 기도하는 수도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녀가 청소하면서 찬양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깨끗한 바닥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신발제조공 역시 신발에 작은 십자가를 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좋은 신발을 만듦으로써 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무를 수행한다. 이는 하나님이 성실한 장인의 훌륭한 솜씨를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사실상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일 자체가 죄 짓는 일이 아니고, 그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정원사이자 농부이자 동물분류학자이자 시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이전에 목수로 사셨고, 전도자 바울은 천막 만드는 일을 겸하였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 쓰레기 치우는 분들이 없다면 우리 삶은 정말 끔찍할 것입니다.
시편 90편 17절에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이어 강조하려는 듯 한번 더 반복합니다,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평생 열심히 살았으나 자기 손으로 행한 일 중 어느 것 하나 서 있는 게 없다면,
그 얼마나 허무한 인생이겠습니까?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은총이 내린 증거 중 하나는
우리 손이 행한 일을 하나님이 견고케 하시고 이를 통해 그분의 뜻을 펼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하는 일에는 ‘거룩함’이 깃듭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와 믿음 가운데 먹고 마시는 단순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임재를 나타내는 거룩한 음식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일들…
요리를 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운전을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는 등의 일들도
그것이 성령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행해질 때 얼마든 거룩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와 같고,
다른 이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전도와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인식 속에서 성/속 이원론,
즉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기계적으로 구분하는 태도는 많이 사라진 듯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 세상은 속된 곳,
그래서 교회에선 고상하게 있어야 하고, 세상에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
목회나 선교는 거룩한 일, 다른 직업들은 세속적인 일,
그래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다른 직업인들은 세상의 논리를 따라도 된다…
주일은 거룩한 시간, 다른 날들은 속된 시간,
그래서 주일은 하나님만 생각하고, 다른 날들은 하나님을 잠시 잊어도 된다…
요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마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어야 할 곳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시간이 돼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모든 일이 하나님과 함께라면 얼마든 거룩한 일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HOW –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그 ‘거룩함의 선순환’이 실제로 우리 삶에 나타날 수 있는가입니다.
‘거룩’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은
그 거룩한 교회를 통해 세상도 거룩해지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교회가 세상의 흐름을 따라 속된 교회로 전락할 위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 또 신자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은
그 거룩한 사람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거룩해지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목회자와 신자들이 다른 이들을 따라 속된 길로 나아갈 위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은
그 거룩한 날을 통해 우리의 다른 날들도 거룩해지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안식일이 다른 날들의 연장이 되어버릴 위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함이 속됨에 삼켜지는 것이 아니라 속됨이 거룩함에 삼켜지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그분의 백성으로 부르신 목적일 것입니다.
나의 삶이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고,
나의 일이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역사하시는 거룩한 일이 되게 하려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거룩한 쉼’이 필요합니다.
창세기 2장 2-3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이 쉬셨다… 왜? 우리도 잠시 멈추고 쉬라고!
하나님이 그 쉬신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왜? 그 날에 복을 주시려고!
마크 부케넌의 <하나님의 휴식>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늘 분주함 속에 살았던 것을 가장 후회합니다. 이것저것 분주하게 사느라 단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그렇게 서둘러서 얻으려 했던 것과, 그래서 얻은 것을 하나도 생각해낼 수가 없어요. 대신 그 모든 분주함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과, 깨진 것들은 수없이 많아요.
분주함 속에 사는 것은 시간을 버는 일일까, 시간을 내던져 버리는 일일까?
분주한 삶은 우리의 마음을 죽이고,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정작 중요하게 다루지 못하게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무엇보다 분주함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서 앗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반대편에도 함정은 존재합니다.
요즘은 죽도록 일만 하며 사는 사람이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시대인 듯 합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어떻게든 레저를 즐기려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레저가 곧 안식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레저는 거룩함이 배제된 안식일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레저는 마치 독재자처럼 우리를 노예로 삼아 우리를 지치게 하고,
우리에게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고 누군가는 지적합니다.
우리의 분주한 삶은 우리에게 쉬어야 한다는 강박을 불어넣고,
더 멀리, 더 근사한 곳에서, 더 마음껏, 더 많이 누리려는 마음을 먹게 하지만,
막상 그러고 돌아오면 더 피곤하고 축쳐진 모습으로 일상에 복귀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참된 쉼’은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는 것, 시간을 떼어놓는 것, 그냥 존재하는 것…
지금 여기 현존하시는 하나님,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과 더불어 그저 존재하는 것…
그 존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느끼고, 감사하며 누리는 것 속에 있지 않을까!
안식일의 복은 무엇보다 그 참된 쉼 가운데 우리의 마음과 시각이 새롭고 온전케 되어
이어지는 다른 모든 시간들과 활동들에 하나님의 복이 흘러들게 하는 복이 아닐까!
두번째 출항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가운데 경험했던 것,
예수님과 그 자신과 물고기들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과 시각의 변화,
그것이 바로 안식일에 우리에게 예비된 복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 앞부분, 즉 4장 40-44절의 내용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어느 한 날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날 저녁 예수님은 그분께 나아온 온갖 병자들을 치유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예수님은 잠자리에서 나와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마가복음의 평행본문에 보면, “거기서 기도하시더니”(1:35)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기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동안,
마을은 다시 분주함에 들석이고 있었습니다.
그 날도 예수님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찾아온 수많은 무리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막1:37)
이 제자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갑자기 그곳을 떠나겠다 하시고,
이에 이를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그날 다른 동네로 이동하겠다는 결정은 미리 계획된 게 아니었던 듯 합니다.
그것은 그날 새벽 한적한 곳에 홀로 계시는 동안 예수님 마음 안에 생겨난 변화였습니다.
그 안식과 기도의 시간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신 뜻을 되새기셨고,
그 안식과 기도의 시간이 그분의 이후 걸음에 새로운 방향과 열정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 바쁜 공생애 사역 중에도 그처럼 의식적으로 짬을 내어 쉬셨습니다.
그 안식의 시간이 그분의 일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그 기도의 시간이 그분의 나머지 시간들을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거룩하게 하다’(sanctify)의 히브리어 동사는 본래 ‘약혼하다’의 뜻을 갖고 있다 합니다.
남녀가 약혼한다는 것은 이 남자 혹은 이 여자에게 자신을 헌신하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그 헌신의 약속을 끝까지 존중하며 지켜가겠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안식의 시간에 자신을 헌신하기로 선택하고,
이후 그 헌신의 약속을 계속해서 존중하며 지켜갈 때,
그 안식의 시간은 거룩해지고, 그로 인해 나머지 시간들 역시 거룩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 시간이 이어지는 시간들에 빛과 경쾌함을 부여하듯,
어떤 시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다른 모든 시간에 부요함을 더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 안식의 시간이 꼭 주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강제와 의무의 맥락에서 이 안식의 문제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축복과 은총의 맥락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할 수 없음’을 정당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혹은 반나절, 혹은 한 시간, 혹은 단 몇 분이라도,
예수님처럼 의식적으로 짬을 내어 잠시 멈추고 한적한 곳으로 나아갑시다.
그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시각을 회복시키시고,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이끄시며,
거기서 우리가 하는 일들을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거룩한 일로만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쉼으로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쉼의 시간에 특별한 복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잘 쉬는 사람이 일도 잘 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잘 쉬고 일도 잘 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를 주님의 일로 부르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나타내는 일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우리 주위 사람들을 섬기기 원합니다. 이를 위해 거룩한 쉼의 시간을 떼어놓을 수 있게 하시고, 그 시간에 주시는 복으로 다른 모든 시간을 복되게 하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