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6월 16일)
- 누가복음 15장 11-32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자유케 하는 사랑 - 눅15,11-32.docx
<누가복음 15장 11-32절>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예수님께서 비유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 미리 좀 떼어 주세요!”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며칠 뒤 둘째 아들은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갑니다.
다 모아 가지고: 그는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먼 나라에 :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곳으로…
가족들과의 관계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독립’ 혹은 ‘배제’시키려 한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의 행동을 ‘자유를 위한 투쟁’의 맥락에서 보면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그는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모든 간섭과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원하는 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하는 바를 현실화하려면 재력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구했고, 받아냈으며, 이에 미련없이 떠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과연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까?
아마 얼마 동안은 그렇다 느꼈을 겁니다.
거기서 그는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다가 결국 다 탕진해 버립니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면서 그는 궁핍해집니다.
이에 그는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가서 빌붙어 살게 됩니다.
주인이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했는데 먹을 것도 안 주며 일을 시킨 것 같습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주는 이가 없었다 합니다.
간섭 없이 ‘자유롭게’ 살겠다며 아버지 집을 뛰쳐나갔던 그가
오히려 외국 사람에게 예속되어 착취당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혼자 더 편히 누리며 살겠다고 가족들에게서 스스로를 배제시켰던 그가
오히려 타지 이웃들의 배제와 외면 속에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도 이 둘째 아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서만 벗어나면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텐데…
내가 저 환경에서만 벗어나면 정말 ‘나 답게’ 살 수 있을 텐데…
그래서 나의 세계에서 그 사람을 밀쳐내려 합니다.
그래서 그 관계와 그 공동체로부터 나 자신을 끄집어내려 합니다.
그 결과 어쩌면 당분간은 ‘자유’로워졌다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삶의 방식이 과연 진정한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을까?
자유를 찾아 떠났으나 오히려 더 부자유하게 된 현실,
그 자기 처지를 인식한 이 아들은 비로소 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가 자기 세계에서 밀쳐내고자 했었지만 여전히 그에게 속해 있던 존재,
바로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 아버지 : 그는 그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그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자기를 배제시킨 결과가 무엇인지를 뼈아프게 재인식합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지만 상황이 전과 같지 않다는 걸 그도 모르지 않습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관계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는 돌아가 아버지에게 할 말을 준비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늘에 죄를 지었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잘못한 부분,
자기 양심에 반하여 사람다운 도리를 다하지 못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며,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말은 그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잘못한 부분,
특별히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하고 가족 유대를 깨뜨린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그 지은 죄를 생각할 때, 이제 그는 더이상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그렇게 마음 먹고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돌아오는 아들을 그의 아버지가 멀리서 발견하고 달려가 맞이합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저 멀리 있는’ 아들을 먼저 발견하고 달려갈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 아버지의 마음이 저 ‘먼’ 곳에 있던 아들과 늘 함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들이 떠나는 것을 허락했던 아버지,
누군가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 날의 상황을 우리는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들이 떠나는 걸 허락했던 그 아버지가
그들 사이의 관계를 결코 놓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은 그 마음 속에서 아버지를 한동안 배제시켰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피해와 수치를 가한 그 아들을 밀쳐내라 부추기는 힘에 맞서,
그가 내 아들이고 내가 그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면서,
그 떠나가 부재한 아들을 마음 속에 계속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억 속의 아들을 붙들고 기다림 속에 먼 곳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발견하고 측은한 마음이 넘쳐흘렀습니다.
얼마나 힘없이 돌아오는 걸음이었겠습니까!
그냥 다시 돌아갈까, 흔들리는 마음을 수차례 다잡으며 온 길이 아니었겠습니까!
아버지는 달려가 두 팔로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마음 속에 아들을 품고 있지 않았다면 그처럼 선뜻 두 팔로 안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 ‘포용’이 이루어지기 위해 그 어떤 고백도 먼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먼 나라’에서 돌아왔다는 사실과,
아버지가 그를 자기 마음에서 떠나 보내길 거부했다는 사실,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아들은 ‘귀환 전략’을 세우며 이와는 다른 순서를 예상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감 – 고백 – 일꾼으로 받아들여짐’의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가 그 순서를 뒤바꾸었습니다.
아버지의 용납, 그리고 이어지는 아들의 고백…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사실 그 뒤에 더 하려던 말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가로막는 바람에 하지 못합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려는 참인데, 아버지가 가로막으며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어디를 봐도 그 집 주인의 아들이라 여겨질 수 없을 것 같은 그 사람을
다시 존귀한 그 집 아들 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합니다.
아마도 그 ‘살진 송아지’는 그 집에 기르던 가축 중 아버지가 제일 소중히 여기던 녀석,
그 녀석을 희생시켜 잔치를 벌여줄 만큼 이 아들이 그렇게 소중하다는 메시지였을 겁니다.
그런 다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내 아들’이라 부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가 이 탕자를 용납한 것은 그가 제 잘못을 다 깨닫고 참회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스스로 잘못했음을 뉘우친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이 아들은 자기 행동이 아버지에게 얼마만큼 해를 끼쳤는지 다 알지 못할 겁니다.
많은 경우, 문제가 된 악행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간에는 큰 온도차가 존재하고,
바로 그 차이가 서로간에 화해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아버지는 자기 죄를 고백하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되묻지 않습니다.
그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것만으로, 아니 그냥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아들을 끌어안을 이유가 이 아버지에겐 충분했던 모양입니다.
그 때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옵니다.
집에 가까이 왔을 때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연유를 묻습니다.
상황을 알게 된 그는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 즐거워하는 무리에 섞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공간적 거리두기는 내적 배제의 외적 신호입니다.
아버지와 동생 사이에 새로 회복된 관계로부터 자신을 배제시키려는 의지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와서 함께 들어가자고 권합니다.
이에 대한 맏아들의 대답이 29-30절에 나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여기 30절에 ‘이 아들’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NIV 영어성경에는 이 부분이 ‘this son of yours’로 되어 있습니다
그는 돌아온 탕자를 ‘동생’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이 아들’ 혹은 ‘이 당신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여기 ‘이’라는 지시형용사에는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내 동생’이란 말 대신 ‘당신의 아들’이라 표현한 것은,
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배제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철저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와 달리, 이 형은 동생이 멀리 있는 동안 그를 마음에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달리, 이 형은 죄로 더럽혀진 동생을 위한 공간을 자기 안에 마련할 의향도 없고,
이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재조정할 의향도 없습니다.
첫째 아들은 왜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걸까요?
자신이 더 바르게 행동했는데도 더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일까요?
물론 그 서운함도 있겠지만,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서운함의 호소를 넘어, 그는 아버지의 행동이 적절치 않다고 주장하는 듯 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분노는 ‘정당한’ 분노이며, 이유는 몇가지 기본적인 규칙이 깨어졌기 때문에…
삶을 파괴하는 억압적 규칙이 아니라 사회적 삶에 꼭 필요한 규칙이 깨어졌다는 이유일 겁니다.
일을 하는 사람은 허랑방탕한 사람보다 더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
충실하게 남은 사람이 다른 이들을 배제하고 떠난 사람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배제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것은 충실한 사람에 대한 암묵적인 배제다.
낭비가 노동보다 나은 것이 되고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충실한 것보다 나은 것이 될 때, 정의는 왜곡되고 가족은 무너질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지요? 누가 이런 논리에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가 한 말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한 말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노예처럼(slaving) 일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미 상속받은 사람으로서 그게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음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삼켜버렸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 ‘삼켜버린’ 재산이 그 동생에게도 속한 것이었음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점은, 그가 동생이 저지르지 않은 악까지도 동생에게 투사한다는 것입니다.
먼 나라에서 동생이 ‘허랑방탕하게’ 살았다 할 때, 그 원어 자체는 부도덕을 암시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동생이 ‘창녀들과 함께 재산을 삼켜버렸다’고 몰아붙입니다.
요는 이것입니다. 규칙에 대한 집착은, 아무리 그것이 유익한 규칙이라 해도,
자기 의를 내세우며 다른 이를 악마로 취급하는 태도를 부추기곤 한다는 것.
때때로 우리도 이 첫째 아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사람만 우리에게서 밀쳐내면 우리가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텐데…
저 사람만 이 곳에서 배제시키면 우리가 정말 ‘우리’다워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런 삶의 방식이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을까요?
다시 아버지…
이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인가?
철없는 아들을 모질게 대하지 못하고 갈등을 견디지 못하는 감상적인 늙은이인가?
그리고 그로 인해 가정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마는 무책임한 가장인가?
본문 31-32절에서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봅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그저 끌려다니기만 하는 나약하고 감상적인 노인이 아닙니다.
이 아버지가 한 일은 뉘우치며 돌아온 둘째 아들을 다시 기쁨 가운데 포용한 것이지,
그 둘째의 행동에 잘못이 없었다 말하는 것도 아니요,
그가 예전에 누리던 모든 특권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뜻도 아니요,
그 둘째를 포용하는 대신 그 첫째를 배제시키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끌어안은 일도… 이에 대해 첫째 아들이 분노한 일도…
그 첫째 아들이 ‘항상’ 아버지와 있으며, 그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이’이고,
아버지에게 속한 것이 ‘다’ 그에게도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가정’의 질서를 전적으로 폐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버지가 한 일은 그 질서의 ‘의무’ 안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의무’가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그 ‘가정’의 질서를 더 온전한 모습으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겐 유익한 규칙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 규칙을 깨뜨린 사람이 뉘우치고 돌아온다면 다시 그를 받아들여야 할 ‘의무’도 있다.
아버지의 이 ‘새 질서’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그것이 첫째 아들이 규정한 양자택일을 중심으로 구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규칙을 엄격히 지키는가 무질서와 분열을 택하는가,
혹은 규칙을 어겼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당신은 ‘안에’ 있거나 ‘바깥에’ 있을 거란 식의 태도를 거부합니다.
이 아버지의 태도를 지배하는 하나의 근본적인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관계가 모든 규칙보다 우선한다”는 믿음일 것입니다.
죄를 범한 아들도 아들입니다. 그 사실이 먼저고, 그의 죄는 그 다음입니다.
도덕적 공적은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만, 관계는 도덕적 공적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이 죄를 지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자기 세계에서 배제하지 않습니다.
이 아버지는 그가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탕자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걸 기꺼이 감수합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의 변하는 정체성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재조정하고,
그 새로운 포용의 질서 속에서 그들의 깨어진 관계를 재구축합니다.
무엇이 그럴 수 있게 했을까요? 당연히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 아버지가 만들어준 새로운 포용의 질서, 그 환대와 용납의 공간 안에서
그 아들은 ‘진정한 자기’가 될 수 있는 자유를 얻습니다.
자, 이제 남은 문제는 아버지의 권유에 첫째 아들이 어떻게 응답하느냐입니다.
본문에는 그 내용이 나와 있지 않은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 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이
바로 그 아버지 하나님의 권유에 반응해야 할 첫째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비유 속 아버지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을 들려주신 맥락이 누가복음 15장 맨 앞에 나옵니다.
그 부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비유 속 둘째 아들에 해당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
외세 침탈의 현실 속에서 동족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제 살 궁리만 하고, 책임이고 의무고 없이 제 멋대로 살던 사람들…
그런 자들이 무슨 염치로 다시 하나님을 찾아 나아온단 말인가?
더구나 이 예수란 이는 어찌하여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단 말인가?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모르는가,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율법에 정통한 자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참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해
민족의 해방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하던 사람들…
그들이 이 비유 속 첫째 아들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지연시키는 장애물들,
주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죄의 오염원들,
그래서 ‘참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배제’시켜야 할 존재들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그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 걸 보며 수군거립니다.
뒤에서, 밖에서 수군거리기만 할 뿐, 그 관계 속에 들어갈 의향은 없었습니다.
저들과 같은 부류가 될 수는 없지… 그게 그들의 속마음이었을 겁니다.
때때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호되게 질책하셨던 이유는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나쁜 짓을 더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괜찮은 사람인 체 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도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오려는 사람들도 그 하나님 가족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배제시켰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별명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였습니다.
이것이 그저 ‘사회적 약자들의 친구’라는 의미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별로’인 사람들의 친구라는 뜻으로,
그 모습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자들이 경멸조로 붙여준 별명이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들 중에 예수님께 마음 열고 나아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내치지 않으셨고, 그들과 기꺼이 함께 하셨으며,
그 관계 속에서 그들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과 더불어 그의 집에 들어가심으로써,
기꺼이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취급되는 걸 감수하셨습니다.
그가 참회하고 변화된 걸 보시고 그를 용납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예수님을 향해 있음을 보며 그를 부르셨고,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있는 중에 삭개오는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그처럼 한 영혼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바로 그 일을 위해 모두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삶이었습니다.
소위 ‘자유의 대헌장’이라 불리는 신양성경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를 죄의 굴레, 율법의 족쇄에서 해방하여
우리를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였는데,
다시 그들을 율법의 틀 속에 가두려는 자들을 경계하며 하는 권면입니다.
물론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어지는 13-14절에서 바울은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단순한 간섭의 부재나 자기 통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누리는 자유,
참으로 자유롭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자유,
참으로 자유롭게 ‘자기 사랑’을 넘어 ‘이웃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서 말미암는 것이며,
그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와 함께 흐를 때 충만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 그 자체가 목표가 될 때 우리는 온전한 자유에 이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관계가 규칙에 우선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사랑이 자유에 우선합니다.
사랑이 우리를 자유케 하며, 그렇게 참으로 자유로워진 사람이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늘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며 참으로 자유롭게 사랑을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당신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채우셔서 우리로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내 앞에 한 사람을 나의 세계에서 배제시키지 않으며, 사랑으로 품고 섬길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