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하라 고요하라

<마가복음 4:35-5:2> (개역개정)

4: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5: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바닷가에서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이 저물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여기서 ‘저편’이란 갈릴리 호수 반대편, 거라사인의 지방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떠납니다. 다른 배 몇 척도 함께 출발합니다.

그런데 항해 도중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폭풍우가 쳤습니다.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왔습니다. 필사적으로 물을 퍼내려 애써봅니다. 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끝없이 들어왔습니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에 예수님은 배 뒤편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분을 깨우며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당시 제자들의 상황이 오늘의 우리 모습 같지 않습니까? 코비드 판데믹이라는 큰 광풍을 만나 고생하는 우리 모습 같습니다.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옵니다. 끝없이 들어옵니다. 건강에 타격 입고, 생명에 타격 입고, 생활에 타격 입습니다. 벗어나려 애를 쓰지만,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좀 나아지는가 싶다가, 다시 또 시작입니다. 배에 다시 물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주무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날의 제자들처럼 누군가는 따져묻고 싶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돌보지 않으십니까?”

예수께서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바람과 바다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집니다. 그렇게 상황이 종료됩니다. 이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 순간 제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더이상 그것은 폭풍우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 폭풍우를 단번에 잠재우신 분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깨워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깨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위기상황에서 예수님을 깨우는 능력도 아니고, 예수님 없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내는 능력도 아닙니다.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해주고자 하시는 것은 다만 이것입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믿음은 예수님과 한 배를 타는 것이고, 그 배에 함께 계신 그분이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가는 사람도 인생에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죽을 것 같은 위기상황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서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 거대한 풍랑을 단번에 잠재우실 수 있는 분이 그 배에 함께 계심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문제는 풍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있느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배를 타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은 그 여정 중에 예수님을 더 온전히 알게 됩니다. 예수라는 분이 그들이 이전에 알던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분과 한 배를 타고 가는 여정 중에 있다면, 이 풍랑이 멎은 후에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지 더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그날의 항해는 이 예수님 말씀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 저편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더러운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그 고통에서 자유케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간다는 것은 이처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며 구원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는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가는 길에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해 갔습니다. <Řeč o míru>(평화에 관한 말)이란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확실히 두 가지 평화가 존재함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평화, 그리고 세상의 평화.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하나님의 평화는 덕에 기초한 마음의 평안을 의미합니다.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은 분명 그 죄로 인해 거룩한 교회의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욥기에도 말씀합니다: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욥9:4) 이 하나님의 평화는 세 가지 차원을 갖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자기 자신과의 평화,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 이 모든 평화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기초합니다. 첫 번째 평화, 즉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다면 다른 두 평화는 가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다른 두 평화도 얻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하나님의 평화, 덕에 기초한 마음의 평안, 자기 자신 및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온전케 하는 이 가장 본질적인 평화는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길 위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이 평화를 누리며 두려움 없이 예수님과 함께 나아가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폭풍우가 치는 배 위에서 그 배에 함께 계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그 평화를 누리며 하루하루 담대히 주님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