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7월 14일)
- 사도행전 8장 26-38절
- 설교자: 손신일 목사
- 19.07.14 전도의 필연성 - 손신일 목사.docx
구약성경 에스겔 34장 6절 말씀에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모든 높은 언덕에서 헤매고, 세계 각처에까지 흩어지게 되었는데도, 그 양 떼를 찾으려고 물어보는 목자가 하나도 없었다” (새번역)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는 목자가 없음을 한탄하고 계십니다. 그 상황은 에스겔의 시대나 오늘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길을 헤매고 어디로 향하면 좋을 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 시대에도 넘쳐나고 있으며, 우리 자신도 그 헤매는 양 때 가운데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양 떼를 찾아 나서는 목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일꾼이 필요한 데 응답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 하셨습니다. 그 뜻을 따르는 하나님의 일꾼이 필요한 데, 그 일꾼이란 하나님의 복음의 전도자일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는 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헤매는 영혼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봉독한 사도행전 8장의 말씀에는 전도자 빌립이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받게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립은 초대교회에서 뽑힌 7 집사/일꾼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의 지시를 따라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을 가더니 거기서 에디오피아의 내시와 만나게 됩니다. 그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고관이었는데, 내시란 궁전에서 일하기 위해서 남자의 기능을 빼앗긴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고, 다만 내시라고만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로 ‘간다게’도 여왕의 이름이 아니라 여왕의 호칭이라고 합니다.)
그는 애굽보다 먼 에디오피아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기는 길이었습니다. 이방인이면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수레를 타고 가면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빌립이 달려가서 물었습니다.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어떻게 보면 실례한 태도였습니다만, 에디오피아 내시는 빌립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같이 앉아서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읽고 있었던 구절은 이사야 53장 말씀이었습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새번역)
이사야서에 나타나는 ‘고난의 종’에 대한 묘사 중의 하나입니다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내시는 빌립에게 간청했습니다.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자기를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그래서 빌립이 이 구절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줍니다. 이 때에는 예수의 십자가가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기에, 이사야서에 기록된 고난의 종의 묘사가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었다는 해석을, 풀어주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실감나게 상기했을 것입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골고다로 끌려간 예수, 억울한 심판의 자리에서 입을 열지 아니한 예수의 생명이 이 땅에서 빼앗긴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십자가의 예수야말로 인생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였던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죄 가운데 헤매는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로서의 그 사명을 다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빌립이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바로 복음을 받아들인 내시는 서슴없이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게 됩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이처럼 빌립의 전도가 순조롭게 이루어집니다만, 그 계기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시작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빌립이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일도 내시가 세례를 받게 된 일도 다 성령의 역사하심이었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일의 성취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빌립과 내시의 만남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이냐 필연이냐 하는 의논이 있습니다. 당사자가 아닌 부외자의 눈으로 본다면, 어떤 만남이든 우연히 일어난 일이며,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일로 보게 될 수 있습니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눈은 운명의 만남 같은 것을 부정할 것입니다.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숫자는 확률로 계산되는 것이지, 기대하는 숫자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추락한 비행기의 승객은 우연히 그 비행기에 탄 것이지, 그 비행기에 타도록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혹시 내가 시간에 늦어서 놓친 비행기가 추락했다면,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명을 건졌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보면 우연히 비행기를 놓친 결과이지,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고 봄으로써, 마음의 평안과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하나하나의 만남이나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했다고 생각할 때, 자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이 우연히 정해진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끌어진 것이라고 받아들일 때, 안심이 생깁니다. 우왕좌왕하지 않고 마음을 정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에는 그러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확증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편에 거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세계를 우연의 연속으로 보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필연으로 보게 합니다. 믿음 안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되는 것이며, 내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정해진 필연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빌립과 애이오피아 내시의 만남이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고 하는 것은, 그 만남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정해진 일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구원의 복음이 전해져 갑니다. 빌립은 그 하나님의 뜻의 일꾼이었습니다. 빌립이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자유로운 의지, 우리 스스로의 결단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인지요? 우리의 경험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내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의지가 분명히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정해져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들어갈 여지는 없어집니다. 이 의논은 세계는 우연이냐 필연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됩니다. 이 세상, 나아가서 내 삶은 우연의 산물인 지, 필연의 산물인 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한, 우리가 우연이냐 필연이냐를 가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연과 필연 사이를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견지에서는 이 세계는 우연의 산물입니다. 어떤 필연적인 의미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주는 자연의 법칙의 지배하에 있습니다만, 그 법칙이 생긴 것도 우연이라고 합니다. 다른 법칙의 우주가 있을 수 있다고 과학은 말합니다. 지구라는 우연한 환경에서 나타난 생명은 유전자 DNA의 우연한 돌연변이로 진화해 왔다고 합니다. 목적이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긴 다음에 의미가 부여해지는 것입니다.
한편 주관적인 관점, 믿음의 입장부터는 모든 일이 필연으로 해석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정해진 뜻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모든 만남이나 사건은 뜻있는 일이 됩니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와 만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었고 에디오피아까지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보다 더 넓혀지고 깊어진 것입니다.
전도자는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필연을 심어가는 자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결코 우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복음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일은 만남을 귀하게 여기는 일입니다. 사람과의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거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만남은 필연적인 사건이 됩니다.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우연을 필연으로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연한 만남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만남으로 바꾸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만남을 귀중히 여기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만, 믿음 안에서는 모든 만남은 간증과 전도의 기회로 삼아질 것입니다. 주어진 만남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 하나님의 복음을 간증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전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는 우리에게 우연이라 아니라 필연이라 하겠습니다. 우연이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하나님께서 정하신 필연의 사건이 돼야만 합니다.
전도자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와의 만남 – 이방인이며 문화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과의 만남에서 편견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꼬빌리시교회도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간증하고 전해 가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우기 각자가 지금 여기 서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필연적인 일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되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