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12월 15일)
- 시편 1:1-6, 누가 3:1-6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주의 길을 준비하라 - 시1,1-6+눅3,1-6.docx
<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누가복음 3:1-6>
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이천 년 전 주님이 세상에 오셨던 것을 기념하며
그 때 경건한 소수의 사람들이 그분을 어떻게 기다렸는가를 생각합니다.
또한 대림절에 우리는 마지막 때 다시 오시리란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그 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할지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오심은 과거와 미래의 일만은 아닙니다.
현재에도, 지금도 주님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셔서 우리의 삶을 생명으로 채우시고 우리의 걸음을 진리로 이끄십니다.
이 현재에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기다리지 않고 또 맞이하지 못한다면,
과거에 오셨던 주님의 은혜는 결코 우리 안에서 역사할 수 없고,
미래에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일도 우리가 잘 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복 있는 사람’으로 사는 이가
주님 오실 그 날에도 ‘복 있는 사람’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가?
시편을 쭉 읽으면서 내리게 되는 결론은
결국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생각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길을 가는 사람,
그가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당장에 편하고 유리한 길을 좇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길이 아니면 가지 않습니다.
반면, 아무리 힘들어도 가야할 길이면 끝까지 갑니다.
그 길의 끝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최종 판결을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시편 전체의 포문을 여는 1편은 다음의 말로 시작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우리가 어떤 생각을 따르며 사느냐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느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
악인들의 꾀를 따르는 것은 당장엔 좋아 보일지 몰라도
결국 망하는 길을 택한다는 뜻입니다.
6절에,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악인들의 꾀’ 하면, 어떤 못생긴 악마의 속삭임 같은 걸 연상하기 쉽지만,
마귀가 그렇게 단순하고 허접한 존재가 아닙니다.
악인들의 꾀는 일부 악한들의 머리 속에만 들어있진 않을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의 상식 속에도,
많은 사람이 별 생각 없이 따라가는 세상의 흐름 속에도,
그 멸망의 씨앗은 얼마든 소리없이 침투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따르다 보면, 어느덧 ‘죄인들의 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의 끝은 망(亡)이므로, 내가 거기 서 있음을 알았다면 바로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는 내가 잘못 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그 즉시 돌이키는 일입니다.
‘참회’가 반성의 뉘우침이라면, ‘회개’는 실제적인 방향전환입니다.
그처럼 회개하지 않고 그 자리에 눌러앉는 사람이 ‘오만한 자’이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입니다.
5절에,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그렇다면 누가 ‘복 있는 자’인가?
그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을 따르지 않는 사람,
그 서지 말아야 할 곳에 서지 않는 사람,
그 앉지 말아야 할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을 가는 사람,
그가 바로 복 있는 자이며,
그런 사람의 삶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을 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자주 그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분별하며 거부할 수 있고,
죄인들의 길에서 결연히 돌이킬 수 있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결코 앉지 않으리란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시편 119편 130절에,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또한 11절에,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며 사는 사람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 합니다.
생수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디에 뿌리내리고 있습니까?
어디를 향해 촉수를 뻗고 무엇을 흡수해 마시며 살고 있습니까?
우물가에 물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3-14)
여러분은 이 영원한 생수의 원천이신 예수님께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까?
날마다 순간마다 그 물을 마시고 있습니까?
이 물샘 옆에 심기우고도 거기로 뿌리를 뻗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며 사는 사람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 닿아 있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는 그저 거기에 뿌리박고 존재하지만,
그의 몸을 타고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기에
그의 삶은 늘 넘치는 생명력으로 푸르고,
그의 품에는 작은 생명들이 와서 깃듭니다.
이와 대조되는 악인들의 삶은 ‘바람에 나는 겨’에 비유됩니다.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늘 부유하며 휩쓸려다니는 삶,
어쩌면 그것은 오직 자기 이익만을 위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모습일 수도 있고,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 속에, 여기 있으면서 저기를 생각하고,
막상 저기 이르면 또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속이 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청소년들은 ‘겨’가 무엇인지 잘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
“곡식의 낟알을 찧어 벗겨낸 껍질”을 보통 ‘겨’라고 합니다.
알맹이가 빠졌으니 가벼워서 이리저리 먼지처럼 바람에 날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겨’와 같은 인생을 살았더라도,
이제부터 얼마든지 ‘나무’처럼 살 수 있습니다.
내 존재와 영혼을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간다면.
이사야 40장, 광야에서 외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외치라 하십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40:6-7)
그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차 있는 사람,
그 영혼의 촉수가 하나님 말씀에 늘 닿아 있는 사람은
어느 곳에 있을지라도 거기서 주님께 뿌리를 내려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삶을 살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장성한 후 그는 광야로 나갔습니다.
이후 그가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는 요단강 부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었고,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세례 요한’이라 불렀습니다.
그가 그 빈 들에서 뭘 하며 지냈는지 자세히 알 순 없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대담한 구절을 접합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3:1-2)
그는 그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니, 그 말씀을 들으려고, 그는 광야로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 왕궁에 있던 사람들에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 성전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듣고자 빈 들로 나갔던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빈 들’, 말 그대로, 비어 있는 들판…
뭐가 없는 곳, 그렇게 비어 있기에 새로 채워질 수 있는 곳…
크신 하나님 앞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곳…
그분의 세미한 음성이 마치 천둥소리처럼 확실한 말씀으로 들리는 곳…
그래서 그 다음 발걸음이 올바르고 담대할 수 있는 곳…
말하기 전에 그는 들어야 했고, 베풀기 전에 그는 받아야 했기에,
그렇게 빈 들로 나가 그는 기다렸던 것입니다.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늘 내 옆에 두고 사는데도,
왜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할까?
이유는 하나, 들을 준비가 안 돼 있으니까!
내 눈과 귀는 다른 것을 향해 있고,
내 머리와 가슴은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고,
내 손과 발은 다른 것을 찾는 데 바쁘니,
어찌 그 곳에 하나님이 임하실까!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구름 아래서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는데,
어찌 우리는 하나님 만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하는 걸까!
광야를 향한 요한의 발걸음은 주님이 그에게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발걸음,
그분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는 길을 곧게 하는 발걸음이었습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지는 일,
그 일이 먼저 광야의 요한에게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가 준비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을 맡기셨고,
그 말씀을 들고 비로소 그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 요단을 향한 발걸음은 이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섬김의 발걸음,
주님이 그들에게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발걸음,
주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는 길을 곧게하는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광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 빈 들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광야로 가셨습니다.
그분의 공생애는 그 광야의 시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회심 후 그가 바로 한 일은 영향력 있는 사도들을 만나는 일이 아니라,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가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큰 사람 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다 못해 살벌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소위 명문대를 위한 교육 경쟁, 좋은 직장 얻기 위한 스펙 경쟁,
권력과 재력을 얻어 소위 특권집단 안에 들고자 하는 욕망의 몸짓들…
이 욕망이, 이 지향이, 교회 안에는, 여기 우리 안에는 없다,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먼저 하나님이 더불어 일하실 수 있는 사람으로 서지 못한다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행은 내가 원한 것을 얻지 못함에 있지 않고,
생명과 구원의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함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결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 영생의 말씀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기에
그 날에 그 누구도 그걸 듣지 못해 따르지 못했다 핑계치 못할 것입니다.
누가 진정 ‘큰 사람’인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마11:11)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주의 길을 준비했던 그 시간이 그를 진정 ‘큰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가 진정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빈 들에서 주님을 기다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 없이 사는 삶의 위험성을 자각하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과의 교제 없이 혼자 열심히 사는 사람은
설령 그가 하는 일이 좋아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위험한 사람, 위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은연중에 하나님 없이도 잘 해낼 수 있다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이룬 일은 그를 더욱 교만하게 만들 것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한번 더 권면드립니다.
성경을 늘 가까운 곳에 두고 틈날 때마다 펼쳐 읽으십시오.
여러분이 핸드폰을 가지고 하는 일의 반만이라도 성경을 가지고 하십시오.
성경을 읽으시되 그 내용을 한번에 다 이해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평생 계속 읽으면서 주시는 만큼 받겠다는 겸허함으로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쭉 읽어가시다가 눈길이 머무는 곳이 있으면 잠시 멈춰 묵상하시고,
거기서 기도가 나오면 기도하시고, 이어서 또 계속 읽어나가십시오.
주님께 나아갈 기회의 시간들을 최대한 놓치지 마시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짜투리 시간들을 광야의 시간으로 만드십시오.
주의 길을 준비하라
길을 준비하는 자에게 길이 열릴 것입니다.
주님의 오실 길을 곧게하는 자가 오시는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대림’(待臨)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임재, 주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빈 들로 이끄시고, 거기서 주님의 생수를 마시게 하옵소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주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고, 그 생명을 흘려보내는 삶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