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7월 5일)
- 로마서 2장 1-11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신다 - 롬2,1-11.docx
<로마서 2:1-11>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주일까지 로마서 1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잠시 짚어보면,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라 했습니다. 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함과 불의함에 대해 하늘로부터 나타난다 했습니다.
오늘은 2장의 첫 부분을 살펴볼 텐데, 6절 말씀을 따라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신다”를 오늘의 설교 제목으로 삼습니다.
1장 끝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악을 행하고 또 그런 일 행하는 자들을 옳다 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화나게 한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이죠.
2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또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1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3절에도 보면,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그러니까 바울은 1장에 나오는 그런 악한 일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거죠. 그렇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도 정작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다르지 않으면서 자기는 다르다고 착각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죠.
율법을 잘 아는 유대인 신자들 중에, 혹은 로마의 지식인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어느 시대에나 그런 사람들은 있기 마련입니다. 옳은 게 뭔지는 알아서 남의 잘못은 잘도 지적하지만 정작 자기는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합니다. 2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무엇이 옳은가 아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옳은 기준을 따라 각 사람의 행위를 달아 보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면서 교묘히 자기 잘못을 덮어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 호락호락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 모든 술책을 꿰뚫어 보시며 ‘그러면 너는 어떤지 보자’ 하실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은 너무나 좋은 분이므로 내 잘못을 그냥 눈감아 주실 거라 생각합니까? 처음부터 생각을 완전히 바꿔먹는 게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 맞습니다. 그러나 결코 만만한 분은 아니죠.
우리는 하나님이 자비로운 분임을 압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도록 내버려두는 자비가 아닙니다. 우리가 옳은 길로 돌이킬 수 있도록 인도하고 품어주며 기다려주는 자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자비를 마음껏 죄지을 핑계꺼리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말씀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오늘 본문 6절에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리라”
어쩌면 혼란스러운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모든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하지 않았나요? 우리가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왜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를 따라 갚으신다 말하죠?
이 부분에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울의 말에는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행함은 ‘구원의 근거’로서의 행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행함은 ‘믿음의 증거’로서의 행함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을 입증해주는 행함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들에서 계속 강조합니다. 우리는 내가 행한 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선행을 많이 쌓는다고 구원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 그 선행을 통해 뽐내며 구원의 커트라인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행하신 일로 구원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일을 받아들임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그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명백히 드러날 그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확인하시려는 것은 ‘믿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무엇을 보고 내 믿음에 대한 판단을 내리실까요? 내가 참으로 믿는다는 것을 하나님은 무엇을 통해 아실 수 있을까요?
복음에 대한 나의 믿음이 진짜라는 걸 입증할 수 있는 증거, 그 믿음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라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실 수 있는 증거, 유일하게 공개적인 증거는 하나뿐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 그 믿음을 반영하는 우리의 행위… 그 믿음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였는가… 그 믿음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
한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줄을 매달고 그 위를 건너가는 묘기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졸이며 그 아슬아슬한 곡예를 지켜보고 있었죠. 마침내 그가 무사히 곡예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 곡예사는 다시 몇 번에 걸쳐 여유를 부리며 그 줄 위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이윽고 줄에서 내려온 곡예사는 청중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몇 분이나 제가 이 줄을 타고 다시 저쪽까지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다고 말했죠. 직접 봤으니까요. 그러자 곡예사가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중에 이제 제 어깨에 올라타고 저쪽까지 함께 건너가 보실 분 있습니까?” 순간 정적이 흘렀죠. 아무도 손들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반응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감정으로 느끼거나 이해하고 증거를 찾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으로 시작되어 실제 예수님의 어깨에 올라타고 외줄 위로 함께 건너가는 일까지를 포함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관련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는 믿는다, 나는 믿는다’ 하면 뭐합니까? 믿을 때 나타나는 행동이 안 보인다면…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믿음에 따른 행함이란 뭘 말하는 걸까?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바울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구약시대 이스라엘 남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을 자기 몸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할례죠. 이 할례의 표는 눈에 보이는 것, 확인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그 할례가 더이상 효력이 없다 합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보고 그 사람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 수 있을까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이것이 바울의 대답입니다. 결국 믿음인데,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죠.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믿음이 보이는 사랑으로 표현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행하는 사랑을 보면 그 사람 속에 역사하고 있는 믿음을 감지할 수 있다는 거죠.
아시다시피, 그리스도인이 믿는 복음은 ‘사랑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사랑합니다. 사랑이 믿음의 증거이고, 믿음은 사랑의 동력이죠. 복음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른 이와 나누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의 삶은 이처럼 행해지는 사랑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행한 사랑이 그 사람이 가진 믿음을 입증합니다. 이 믿음에 의한 사랑의 실천은 결코 구원받기 위한 행함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삶의 증거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이 행하게 되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대해 알고 싶다면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좋습니다. 예컨대 2장에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복음은 차별없는 복음이기에,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으셨기에, 그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도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습니다.
이 외에도 많겠죠. 용납, 용서, 환대, 자비, 인내, 관용, 존중, 나눔, 섬김, 희생, 연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 전체가 이 믿음에 따른 사랑의 행동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 복음을 믿어 사랑으로 행한다는 건 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나도 행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4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16장 27절에서 또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니, 그렇게 천국행 티켓은 확보했으니, 이제 적당히 즐기며 살다가 천국 가면 그만이다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완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더이상 행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비로소 제대로 행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 ‘율법의 회로’가 아닌 ‘은혜의 회로’ 속에서, 하나님의 바르고 선하신 뜻을 더 온전히 분별하며 더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 우리가 참으로 무엇을 구하며 살아야 할지를 알게 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느냐가 우리가 무엇을 행하느냐를 결정하고, 결국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받느냐를 결정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이기적인 야망을 따라 진리 대신 불의를 따르며 사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맛볼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괴로움이 있을 것이라 합니다. 이 땅에서 그들의 몸은 편할지 몰라도, 그들의 영은 괴로울 것이며, 그들의 끝은 더욱 괴로울 것입니다.
반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다스리심을 사모하고 그분의 칭찬과 인정과 상급을 구하는 사람은 썩고 녹슬 것들에 마음 두지 않고, 고난 중에도 참고 선을 행하며 살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 즉 예수님의 생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모하고 구하던 것들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그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등을 두드려주시는 곳”이라는 C. S. 루이스의 말을 저는 좋아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똑같이 적용됩니다. 복음이 믿음을 낳을 것입니다. 믿음이 사랑을 낳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모든 것을 설명해줄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것임을 그 날에는 모두가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하여, 그 공정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십니다. 그가 어디서 살았고, 어떤 부모 밑에서 자랐고, 어떤 학교를 다녔고, 어떤 지위에 있었느냐는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그에 따라 하나님은 스스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각 사람의 행위 속에 담긴 진심과 믿음을 보시고, 그에 따라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행함을 따라 갚으신다면, 그리고 복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행함을 결정짓는다면,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복음을 제대로 알고 믿는 일… 이보다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요? 바로 그 일에서부터 우리의 다른 일들이 뻗어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행하신 일, 그것을 ‘복음’이라 합니다. 그 일 자체는 단 몇 줄로 요약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너무나 깊고 넓어서, 아마 평생을 배워가도 다 이해 못할 것입니다. 이 복음에 얼마나 잇대어 살아가느냐에 우리의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 앞에 섭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복음은 믿게 하고, 믿는 자는 사랑합니다. 다시 겸손히 하나님 앞에 서서, 참으로 알고 참으로 믿고 참으로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복음을 진정 이해하고 믿으며 사랑으로 행하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