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찾으라

<이사야 55: 1-3, 6-11>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와서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 … ]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 상황 중에 있던 유다 백성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당시 그들은 어떤 상황 속에 있었는가? 나라가 망했습니다. 죄의 결과였습니다. 타국에 끌려와 살아갑니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고 힘들었지만 점점 적응되어 갑니다. 비록 포로 신분이었으나 바벨론살이도 이제 나름 괜찮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칠십년이 흘러갑니다.

그 시점에 한 예언자가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이사야 40장부터 55장까지의 말씀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노역의 때가 끝났다. 너희 죄로 인한 벌을 충분히 받았다.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다. 그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다. 우상은 무익한 것,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 그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그가 이방 왕 고레스에게 명령하여 너희를 놓아주게 하리라. 이제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라.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라. 이방에 빛이 되어라. 그가 넘치는 진노로 그의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이제 영원한 자비로 너희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그리고 이 메시지의 결론격인 55장 첫 머리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초청하시는 음성을 들려줍니다.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물’은 생명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포도주와 젖’은 사람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 삶에 즐거움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그것들을 공짜로 주시는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초청입니다.

눈에 띄는 것은 “돈 없는 자도 오라”,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사라”는 말이 반복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 말은 현실성이 없게 들릴 수 있습니다. 돈 없이 되는 게 있나요? 돈 없이 필요한 것을 살 수 있습니까? 돈을 좇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나요?

그런데 그 시절 바벨론에 거주하던 유다 포로들도 그런 생각 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타국에서의 불안정한 삶, 누구도 나와 내 가족의 생존을 대신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생각 속에, 그들은 더욱더 물질에 집착하며 살아야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 순간 초점을 잃고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다른 어떤 값비싼 것들보다 물입니다. 그런데 그 물은 구하지 않고,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들에 집착하는 모습이 나타나곤 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하나님 마음 속 깊은 탄식입니다. 예언자는 그 바벨론식 삶에 어느덧 익숙해져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로 초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와 그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 속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은혜로 공급받는 삶입니다.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들으라’는 말이 계속 강조되며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살 길이 있고, 거기서 참된 만족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를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란 말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 익숙한 말이 되어 버려서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물이 필요한 사람에게 와서 물을 마시라는 말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끝을 알 수 없는 이 코로나 상황 속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해줄 수 있는 말도 이것 외에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나아가 들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살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하십니다.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야훼를 찾아라. 만나주실 때가 되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마음 열고 맞아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하나님이 우리를 늘 만나주실 거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예레미야 11장 14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고난으로 인해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듣지 않으시겠다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29장 12절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에서의 칠십 년이 차면 다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를 언급한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요건 또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마음 열고 기다리셔도 우리가 찾지 않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영어성경엔 ‘seek’란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보통 ‘구하다’, ‘추구하다’로 번역되기도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어떤 것을 추구해 보신 적 있을 겁니다. 추구하는 사람은 대충 한두번 해보다 끝내지 않습니다.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의 태도로 임하지 않습니다. 그 추구하는 것에 대한 간절함이 더할수록 노력과 인내의 강도도 더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부른다는 뜻이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전에 잘못 가던 길에서 돌이킨다는 뜻이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일, 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필요한 이유를 오늘 본문은 크게 세 가지로 얘기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고 부를 때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가 그분에게로 돌이킬 때 그분은 용서하시리라 합니다.

그가 누구이건간에, 악한 길, 불의한 생각 속에 있던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돌이키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자비하시니, 그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생각의 차이 수준을 뛰어넘는 큰 차이를 말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것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

은연중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복음을 듣고 성경을 가까이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일들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 말기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방 군대의 손에 내어주실 것이라 말했습니다. 당시 이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 예언자가 미쳤구나!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고 있다며 그를 죽이려는 반응이 대세였습니다.

바벨론 군대의 일차 침공으로 일부 유다인과 성전 기구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때 하나냐란 사람이 일어나 왕과 백성 앞에서 말합니다. “빼앗긴 사람들과 물건들이 2년 안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리라” 사람들이 듣기 좋은 예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 해에 하나님은 이 거짓선지자 하나냐의 목숨을 거두어 가십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하나님께서 유다 포로를 고국으로 되돌리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칠십년은 거의 세 세대에 달합니다. 이 말이 당시 유다인들 마음에 와닿았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긴 연단의 시간을 지나, 약속대로, 하지만 누구도 예상할 수 없던 방식으로, 하나님은 유다 포로를 되돌리십니다.

우리가 고난과 혼돈의 시기에 무엇보다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나아갈 길이 우리들 속에 있지 않고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작은 것 한 가지라도 계명을 따라 행위와 삶을 바꾸어나갈 때, 우리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차원에 내가 서 있음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길보다 높은 하나님의 길을 따라 그분이 계획하신 최선의 결말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의 길로 돌이켜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과 11절에서 예언자는 이것을 아주 인상적인 비유를 통해 말합니다.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 하늘로 되돌아가지 않고 땅을 적시어 식물이 자라게 하고 씨뿌리는 자에게 심을 것과 먹을 것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되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며 하나님이 보내신 일에 형통하리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의 활자 속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덮어놓고 무시하며 산다 해서 하나님 말씀이 거기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제 길을 갑니다. 성취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 말씀의 길을 따라 가는 사람은 그에 상응한 결말에 이르게 되고, 그 말씀의 길을 거슬러 가는 사람도 그에 상응한 다른 결말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닿는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집니다. 콩나물 시루에서 물을 흡수하며 소리없이 콩나물이 자라듯, 하나님의 말씀이 닿는 곳에서는 소리없이 사람이 자랍니다. 메말랐던 지면에서 생명의 싹이 올라오고, 가난한 농부의 빈 손에는 먹을 것과 심을 것이 쥐어집니다.

평생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투자하며 살았는데, 그 결과로 얻은 것이 돈뿐이며 사람은 늘 그 모양 그대로라면, 그 인생은 얼마나 불쌍하고 허망한 것인지요! 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날마다 더 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일보다 더 값진 내 인생을 위한 투자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로 돌이켜야 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가 서서 살아가는 길이 결국 우리가 다다를 곳을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우들과 함께 예레미야서를 읽고 있는데요, 여기 나오는 유다 왕과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참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세 가지 사례를 간략히 말씀드리고 설교를 맺으려 합니다.

첫 번째 사례는 예레미야 36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들이 기록된 두루마리가 유다 왕 여호야김 앞에서 낭독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범하는 죄를 지적하시며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아오라 하시는 말씀과, 그렇지 않으면 바벨론 왕의 손에 나라가 망하리라는 내용의 말씀이었습니다.

듣기에 좋았을 리가 없겠죠. 낭독되는 족족 왕은 면도칼로 그것을 베어 화로 불에 던져버립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었던 거죠. 신하들이 만류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 내용을 말하고 기록한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아오라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바룩을 숨겨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로 하여금 다시 다른 두루마리에 그 말씀들을 기록해 보존하게 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내 눈 앞에서 사라진다고 없어지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제 길을 갑니다. 그리고 결국 성취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며 사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두 번째 사례는 예레미야 34장에 나옵니다.

바벨론 군대의 침략을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유다 왕 시드기야는 모든 고관들 및 백성들과 더불어 동족 히브리 남녀 노비를 해방시켜주기로 하나님 앞에서 서약합니다. 아마도 그와 같은 율법의 실천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들은 마음을 바꿔먹습니다. 해방시켜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 다시 노비로 삼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말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거나 결단하고 행하는 일에 하나님은 관심을 두시고, 그 일의 신실함을 따라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 수반된 진실한 회개는 하나님의 긍휼을 불러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례는 예레미야 42장에 나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됩니다. 왕과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빈민들만 유다 땅에 남겨집니다. 바벨론 왕이 그다랴를 유다 총독으로 세웁니다. 주변 나라에 흩어져 있던 유다인들이 돌아와 그다랴 주위로 모입니다.

그런데 그다랴가 이스마엘이란 사람의 손에 암살됩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다시 요하난에 의해 타국으로 쫓겨납니다. 이후 요하난이 백성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요하난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더불어 애굽으로 가고자 합니다. 유다 땅의 그 혼란상황이 바벨론 왕의 보복을 부를까 두려워서였습니다. 하지만 먼저 그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열흘후 예레미야로부터 받은 대답은 애굽으로 가지 말고 유다 땅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하난은 그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까지 거느리고 애굽으로 갑니다. 이후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은 그들이 더 안전한 곳이라 여겨 피해간 그 애굽 땅에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요하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42:6)

하지만 막상 들은 말씀이 그가 내심 바라던 바와 같지 않자, 그는 하나님 말씀 대신 자기 마음이 지시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말씀을 따라 굳게 믿지 못하고, 순간의 두려움을 모면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요하는 길로 우리를 이끄실 때가 많습니다. 그 믿음의 여정 속에서 우리를 새로운 곳, 더 높은 차원에 세우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 안에 우리의 길이 있습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입니다(마7:8).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귀기울이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