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2년 6월 12일)
- 누가복음 5장 27-32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함께 먹는다는 것 - 눅5,27-32.docx
<누가복음 5:27-32>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부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은 세리 레위도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분의 가르침에 동의하는 것을 넘어, 그분이 걸어가신 삶의 길을 따라간다, 그분이 보신 것처럼 보고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레위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버린 것은 재산이나 일터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일어나 따르니라” 이전에 서 있던 삶의 자리, 이전에 취하고 있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서 일어나 미지의 새로운 땅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날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에게서 이 더 나은 삶을 향한 갈망을 “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부름받은 그날의 첫 발걸음에 의해 완성되고 종료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시몬도 야고보도 요한도 레위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이후 평생에 걸쳐 계속 배워 나가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부름받은 레위는 그분을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엽니다.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이 그 집에 들어가 식탁에 둘러앉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다 합니다. 이 자리에 초대받은 세리들은 아마도 레위의 동료 세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others)이란 누구를 말할까요? 그들이 누구였는지 알 수 있는 힌트가 30절에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누가가 “다른 사람들”(others)이라고 표현한 그들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정확히 알긴 어렵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 레위의 집 큰 잔치에 예수님 일행과 더불어 초대받은 그 사람들은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죄인”으로 인식되던 사람들, 그 종교인들이 내세운 율법적 근거에 의해 “죄”라 여겨지는 일들에 관여되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인”이라 여겨진 그 사람들 편에서 볼 때 그것이 다소 억울한 혐의였는지, 아니면 그들의 삶이 충분히 그런 만했는지 여부는 우리가 판별하기 어렵고, 본문의 초점도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잔치에 그들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을 예수님이 거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 속에서 세리는 경멸과 배척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 부역하며 동족의 혈세를 빨아 배불리는 존재들로 여겨졌고, 때문에 아무리 유대인이라 해도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방은 사실상 예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정결법은 바람직한 식탁교제의 요건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기준은 간단했습니다: 각 사람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순결함과 거룩함을 지킬 수 있다. 이 정결법의 틀 속에서 순수와 비순수, 깨끗함과 불결함, 거룩함과 속됨은 그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규정되었습니다. 부정한 것과의 접촉은 그 접촉된 사람도 부정하게 하므로, 부정하게 여겨지는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는 피해야 할 곳, 있어서는 안 될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정결법을 어긴다는 것은 오염에 노출된다는 뜻이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사회-종교적 활동들에 참여하는 일로부터 소외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나아가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할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에게 이 정결법은 외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그들의 경계선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결법이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환영하시는 듯한 예수님의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환대와 포용의 식탁교제 속에서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한 바 있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고 계셨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25장에서 선지자는 후에 하나님께서 만민(all peoples)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실 것이며,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all nations)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6-7).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그분 자신이 만민을 위한 기름진 양식이요 새 포도주이심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또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눅5:38)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과 새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 “세리와 죄인”이란 말로 표현된 사람들과 예수님이 함께 나누신 식탁교제는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 복음의 증거였습니다. 그 경계를 허무는 식탁교제의 실천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그분의 나라, 그분의 잔치에 들어오도록 초청하신다는 메시지를 삶 속에서 의식적으로 증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분이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1-32)
‘회개’(repentance)란 잘못 가고 있음을 깨닫고 바른 길로 돌이키는 것을 말하죠. 예수님이 죄인들을 회개로 부르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못마땅했던 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우고 있다는 점, 죄인들의 회개를 그분과의 공동식사를 위한 선결조건으로 내세우지 않으신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과의 식사 자리에 누구는 들어올 수 있고 누구는 들어올 수 없다는 식으로 경계선을 그어 놓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다만 누구나 들어와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환대의 공간을 창조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기에 누구나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리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며 밖에 남아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집에서의 식탁교제, 예수님이 창조하신 그 환대의 공간 에서 삭개오는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19:9) 회개는 은혜의 조건으로 요구된 것이 아니라 은혜의 결과로 체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소위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 식사하실 때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좀더 쉽게 용인될 만한 장소, 예를 들어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도 묘하게도 그분이 앉은 식탁 주위에는 거기 앉은 다른 사람들을 당혹스럽고 불편하게 만드는 어떤 사람이 꼭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눅8,14). 예수님이 그 사람을 용납하심과 동시에, 사람들이 기존에 그어놓았던 경계선들은 상대화됩니다.
예수님이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심으로써 다른 어부 제자들은 그와 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레위의 동료 세리들과 한 식탁에 앉으심으로써 다른 어부 제자들은 그들과 한 식탁에 앉아야 했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이 상황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달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 속에서 어부들과 세리들은 사실 같은 식탁에 앉을 이유가 거의 없던 사이였습니다. 어부들은 사회-경제적으로 밑바닥에 있었고, 외세의 압제 아래서 힘겹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제일 상종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로마군인들보다도 레위와 같은 유대인 세리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예수님은 그들을 한 공동체로 모으신 걸까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시몬을 부르신 예수님이 또한 레위를 부르셨기에, 시몬은 예수님과 가까이 있기 위해 또한 레위와도 가까이 있어야 했습니다.
낯선 사람, 혹은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던 사람과 가까이 있는다는 것은 물론 처음엔 달가운 일이 아니겠지만, 막상 함께 있다보면 마음도 생각도 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레위 혹은 마태의 전직이 세리였다는 이유로 시몬이나 요한이 그와 계속 거리를 두고 지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서로간에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안에서 한 공동체로 묶인 그들이 예수님의 본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될 때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들로 인식하고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요13:35;17:21).
하나된 모습 자체만 생각하셨다면 좀더 쉽게 하나될 수 있는 부류의 사람들로 제자공동체를 구성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죠. 왜요? 예수님의 궁극적 관심은 각 사람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 하나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죠. 나와 많은 것이 다른 낯선 존재와의 만남은 불편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마음은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 넓어지고 깊어진 마음으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삶으로 증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은 바라셨던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변화 과정이 이를 인상깊게 보여줍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는 능력있는 복음의 증인으로 변모하지만, 그의 시각과 마음은 여전히 유대적 틀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환상 중에 그에게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동물들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시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
베드로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 생각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20)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성령의 지시를 따라 고넬료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말하죠: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28)
이어 고넬료의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일임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4-35)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죠. 그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옵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이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랍니다. 이어 베드로는 예수 믿고 성령 받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들은 베드로 일행에게 며칠 더 머물다 가기를 청합니다.
후에 할례파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비난하는 말 속에서 우리는 베드로 일행이 그 이방인들의 요청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역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행11:3) 그들은 그 집에 며칠 더 머물며 그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먹고 교제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묘사된 예수님의 식탁교제가 당시 유대사회 속에서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포용하는 것이었다면, 이 베드로의 회심을 통해 가능해진 식탁교제는 당시 유대인 신자들의 사고 속에서 함께 할 수 없다 여겨지던 비유대인들에 대한 환대와 포용의 의미를 갖습니다. ‘베드로의 회심’이라 명명할 수 있는 그 일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분은 분명 하나님이셨습니다. 복음의 문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열릴 수 있게 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은 사도 베드로의 마음 속에 있던 이방인을 향한 장벽이 허물어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욥바에 여러 날 있으면서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죽은 짐승을 다룬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에 의해 부정하게 여겨지던 사람의 집에 그가 머물고 있었다는 것은 소위 “죄인”으로 여겨지는 유대인들을 향한 그의 마음이 전보다 많이 포용적이 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마음이 인종적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더욱 넓어질 수 있길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와의 만남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회심은 초대교회가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가로막지 않는 교회가 될 수 있게 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11:17)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니 교회는 모든 다른 말을 멈추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18)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렇듯,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과 삶 속에서 식탁교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증거와 긴밀한 연관성 속에서 실천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의 공동체 속에서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이처럼 경계를 허무는 환대와 포용의 선교를 실천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어찌보면 복음전파에 최대 장애물은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흘러들어온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를 향해 쌓아놓은 우리 마음속 장벽에 막혀 그 사람에게로 흘러가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 경험했던 것과 같은 회심이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할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는 함께 먹을 일이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함께 먹을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먹는 자리에 나와 더불어 주님이 함께 부르신 사람들, 그들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대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를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청하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우리 마음이 다른 사람을 향해 더욱 넓어지게 하시고, 그런 우리의 마음과 삶을 통해 주의 복음이 세상을 향해 막힘없이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