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교회, 꿈꾸는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각자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잘 선포되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함께 있을 때 유익하고 행복한 교회가 좋은 교회라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세상 속에서 제 역할을 잘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 생각합니다.

다 일리있는 말일 수 있지만 어느 한 가지만 정답이라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이 바라시는 교회, 예수님이 꿈꾸시는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주후 1-2세기 소아시아와 유럽에 세워진 교회들은 한 인종, 한 언어, 한 성별, 한 계층의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민족’ 개념이 그 때에는 없었으므로 그 교회들을 ‘다민족교회’라 부를 순 없겠지만, 그 초기 교회들 대부분이 다인종, 다언어, 다성별, 다계층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신약성경의 후반부에 나오는 서신서들, 즉 사도들이 그 시대 각 지역 교회들에게 써보낸 편지들을 통해 이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 교회가 유대인과 헬라인, 노예와 자유인이 함께 있는 교회가 아니었다면, 바울이 이런 얘기를 굳이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골로새서 3장 11절에서도 바울은 말합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처럼 교회 공동체가 다원성을 띨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인종, 모든 언어, 모든 성별,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로 초청하기 때문이며, 이것을 막을 권리가 그 교회 구성원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따라서 그분의 몸인 교회는 그 예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사람들로 구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제한하거나 획일화시키려는 시도는 그 시대에도 있었지만, 사도들은 교회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결코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원래 그처럼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로 묶인 공동체라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그처럼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사랑 안에서 힘써 지켜가라고 그들은 권면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장 1절 이하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린도전서에서도 말합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2-33)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 그 중에서도 그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교회를 그처럼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한 데 묶인 공동체로 창조하신 분이 그리스도 주님이시라 말합니다.

전에 그 둘의 관계는 ‘안과 밖’의 관계였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 때에 그 비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할례를 하나님 백성의 표지로 여기던 유대인들 시각에서 그들은 ‘이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 율법에 기초한 언약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 시절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안과 밖으로 표현되는 관계는 단절된 관계이며, 서로간의 물리적 거리가 아무리 가깝더라도 좀처럼 가까워지기 어려운 막힌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멀리 있던 그들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안과 밖으로 분리되고 대립되어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죠? 예수님께서 그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그들 사이에 놓인 적대감의 장벽을 허무셨다 합니다. 옛 언약의 율법을 폐하시고, 예수님 안에서 새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를 창조하시며, 그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 모두는 주의 십자가 은혜로 함께 하나님과 화목된 자로서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정체성을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요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새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이제 모든 인종적 차이는 상대화됩니다. 인종적 차이뿐 아니라 언어, 문화, 성별, 계층의 차이도 상대화됩니다. 그런 차이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또한 고려되며 존중될 필요가 있지만, 교회 안에서 그 차이들은 더이상 절대적 가치를 갖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계속 유대인으로 있고, 헬라인은 계속 헬라인으로 있겠지만, 그것이 그들이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사실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지 않습니다.

다민족 공동체인 우리 교회 안에는 체코 분도 계시고, 일본 분도 계시고, 콩고 분도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분들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시는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또 교회가 무엇인지를 안다면, 우리는 그분들을 ‘나의 가족’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 사이의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차이 때문에 서로 가까워지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압니다. 하지만 우리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가장 견고한 장벽, 우리를 하나될 수 없게 하는 장벽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희생을 통해 이미 허무셨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만 모인 교회라고 해서 하나 되는 일이 더 쉽다 말할 순 없습니다. 어쩌면 언어의 장벽보다 더 넘어서기 힘든 장벽은 우리 마음 속 편견의 장벽, 차별의 장벽, 독선의 장벽, 미움의 장벽일 것입니다. 이 장벽들에 막혀 복음은 우리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왜 하나됨을 노력해야 하는가, 내가 왜 굳이 우리 교회 체코 분들과 가까워질 필요가 있는가,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 사람과 우리 공동체가 더욱 예수님 닮은 모습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세상에 잘 나타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주위에 잘 흘려보내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다.

교회는 언제나 주님의 초청을 받아 나아온 낯선 사람들을 안으로 맞아들이며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됨’을 이루어가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주후 1세기 교회는 언약 밖에 있던 비유대인들을 안으로 맞아들이며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됨을 노력하였습니다. 중세말 개혁파들의 교회는 진리 밖에 있던 사람들을 차별없이 안으로 맞아들이며,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을 전하고, 계층과 성별의 차이를 초월하여 성만찬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보이는 교회가 교회다움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그 때에, 그 성만찬의 순간은 보이지 않는 참 교회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습니다.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이르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처럼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됨을 노력했던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복음은 그 어두운 시대에도 교회 안에 갇히지 않고 세상을 향해 흘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 21세기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 다전통의 사람들이 한 도시에 모여 섞여 살아가는 이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우리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며 어떻게 복음을 증거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후반부에서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서로 연결되며 함께 지어져가는 성전의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왜 여기 함께 있나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왜 사랑 안에서 하나됨을 노력하나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갑니다. 홀로 세워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갑니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 속에서, 용납과 용서, 이해와 사랑이 더욱 깊어져가며 우리는 함께 지어져 갑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복음을 흘려보내는 통로로 함께 지어져 갑니다.

2000년 1월, 새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이곳 꼬빌리시의 체코 형제자매들은 한국에서 온 이주민 형제자매들에게 그들의 공간 일부를 내어주며 함께하자 초청하였습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되어 간다는 것은 이처럼 나의 공간을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일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하는 자리에는 불편함과 어색함만 있는 건 아닙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교회, 이를 위해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 그것이 우리 모두의 꿈이 되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이 곳, 이 공동체가, 또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