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적인 신자

  • 한인 예배 (2004년 02월 15일)
  • 행17:1-15
  • 설교자: 이종실

040215 사순절전 두번째 주일

본문: 사도행전 17:1-15

제목: 신사적인 신자가 됩시다.

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쫓으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 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설교>

오늘 본문은 16장에 이어 그리스 도시들에서 진행된 바울과 그 일행의 선교이야기 입니다.

16장에서 빌립보 도시가 나오고 17장에는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도시 이름이 나옵니다.

이들 도시는 그리스 북동쪽 에게 해협에 위치한 항구도시들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터어키 쪽에서 올라와 만나는 첫 도시가 빌립보 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이그나티우스>라고 불리우는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여행을 합니다.

이 국도는 에게 해협을 따라 가는 해변가 도로입니다.

빌립보에서 160키로 미터 떨어진 곳이 현재에도 그 이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입니다.

데살로니가로 가면서 제법 큰 도시였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그냥 지나쳐 갑니다.

아마 그들은 당시에 수도이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을 하였던 데살로니가로 직행하였던 것같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유대인들의 생활 중심인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선교전략은 언제나 먼저 이 회당을 찾아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 유대인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입니다.”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유대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회당에 함께 모이던 이방인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르친 이후 바울은 자연스럽게 이방인의 전도자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2절과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습니다.)

“바울은 자기 관례대로 회당으로 그들을 찾아가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해석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여기서 “세 안식일”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에서 바울은 적어도 세번의 안식일을 데살로니가에서 체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기록한 바울의 선교행적 가운데 아마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의 체류가 가장 길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4장 16절에 “내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내가 쓸 것을 몇 번 보내 주었습니다.”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체류가 길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뒷바침 합니다.

데살로니가 체류가 길어진 이유는 바울이 단지 예수, 천당을 외친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그곳 사람들과 토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단지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증명하면서 성경을 토론하였습니다.

아마 같은 유대인들일지라도 마케도니아(그리스)의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성경을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증명을 하여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습니다.

저 역시 체코선교를 위해 바울이 이방인 지역에 있는 유대인 회당을 이방인 선교를 위한 전략지로 삼았던 것 처럼 직접적인 무신론 사회를 위한 복음 전파가 아닌 체코교회를 통한 복음의 무신론 사회접근을 하고있습니다.

무신론 사회 속에서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것이 체코교회입니다.

교회재정도 국가에 의존되어있고 사회의 소수파입니다.

처음에는 사회가 교회를 고립시켰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스스로 자신을 사회와 이웃에 대해 문을 닫고있습니다.

이것이 체코교회의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자폐증세 가운데 하나가 <소심한 믿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가문대대로 기독교 집안이면서 대학교수인 분이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조상들의 신앙을 맹목적으로 따를 수 없어 고민을 하다가 한국교회의 큰 인물인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이성으로 믿을 수 없는 자신의 신앙의 문제들을 다 듣고 난 후에 한마디 하신 말씀이 “그냥 꾹 믿어 두라우!” 였다고 합니다.

유럽의 합리주의와 기독교 비판을 경험한 체코교회에게 만약 “그냥 꾹 믿어 두라우” 라고 권면을 한다면 아마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을 누구도 강요해서는 안되는 것은 사회의 불문율처럼 되어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강요하면 바로 나오는 반응이 “사람은 믿을 자유도 있지만 동시에 믿지 않을 자유도 있다.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 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가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한번은 체코교우들과 연합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설교를 했을 때 우리 한인교우들은 “목사님, 오늘 말씀 참 좋았습니다.
은혜받았습니다.” 저를 격려하였는데 체코교우들은 “오늘 목사님 설교는 매우 선동적이었습니다.”라고 반응을 한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설교를 놓고 체코와 한국 교우들의 서로 각각 다른 반응의 원인에 대해 연구를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교인은 설교를 직관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성경의 해석과 증명보다 말씀의 적용을 통해 성경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야 한국교인들은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코교우들은 설교를 직관이 아닌 이성으로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성경을 해석하고 증명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성경을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문제는 청중인 교인들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그것을 설교자가 간섭하면 그 설교는 선동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성경을 해석하고 증명하였습니다.

그의 설교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의 전달 방법은 토론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7절에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토론이 곧 선교이고 말씀 선포였습니다.

그 결과는 오늘 본문 4절에서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승복하여 바울과 실라를 따르고, 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 보다 이방인들 사이에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게다가 소위 “귀부인들” 즉 권력을 가진이들의 부인들이 회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방해가 여기서도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5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시기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다가 소요를 일으켜서, 성을 혼란에 빠뜨리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끌어다가 군중 앞에 세우려고 찾았다.”

왜 똑같이 앉아서 성경 해석하고 증명을 듣고 함께 토론을 했는데 이방인들 사이에는 믿는 사람들이 생기고 유대인들은 거부자들이 되었는가?의 문제입니다.

히틀러 시대 때 체코교회에서 예수와 그의 복음을 반대하는 성경의 유대인들을 부각시켜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합리화시키려는 일부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을 극단적으로 끌고 가면 복음에 반대하는 유대인종의 문제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데살로니가 사건과 함께 연속되는 이야기로 베뢰아 사건을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그 베뢰아에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찾아갑니다.

이 기록으로 베뢰아의 유대인들과 데살로니가의 유대이들이 자연스럽게 서로 비교가 됩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의 사건과 베뢰아의 사건을 연결시킨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의 의도입니다.

모든 이방인들은 복음을 수용하고 반대로 모든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였다면 우리는 인종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과 전혀 다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11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 보다 더 고결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 하였다.”

이에 반해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에 대해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그러나 (데살로니가) 유대 사람들은 시기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다가 소요를 일으켜서, 성을 혼란에 빠뜨리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끌어다가 군중 앞에
세우려고 찾았다. 그러나 그들을 찾지 못하고,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을 성읍의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큰소리로 외쳤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5-6)

저자 누가는 두 도시의 사건을 연결시켜 자연스럽게 베뢰아의 유대인들과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베뢰아 유대인들은 <고결한 사람들>인데 데살로니가 유대인들 <시기와 질투하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두 유대인들의 차이는 성품입니다.

좋은 성품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쁜 성품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성품은 사람됨됨이를 뜻합니다.

신앙생활 잘 하면 좋은 성품의 소유자로 바뀝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는 곧 신앙의 성품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면 사랑의 사람, 기쁨의 사람, 평화를 만드는 사람, 잘 참을 줄 아는 사람, 친절한 사람, 착한 사람, 맡은 책임을 잘하는 신실한 사람, 온순한 사람 그리고 절제를 잘 하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해 설명을 한 갈라디아서 5장 22절 말씀을 거울로 삼아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자주 들여다 보아야합니다.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오래되고 보기 좋고 나뭇잎이 무성해도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소용없습니다.

10년 20년을 믿어도 성품이 바뀌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매일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사람들끼리 살다가 새로운 얼굴이 한인사회나 교회에 나타나면 반갑고 해서 한인사회와 교회와 사람에 대해 많은 정보를 줍니다.

해외생활에서 남의 이야기를 하지않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저 역시 새롭게 오는 분들이 사람들에 대해서 가급적 편견을 갖지않도록 이런 저런 평들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 하지만 꼭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수 없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대체로 좋은 이야기보다는 주로 부정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힘드는 것은 새로운 분이 교회에 올 때 그 분을 환영하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기존의 교우들이 돕는 일로 새로 오는 교우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동시에 다른 교우들에 대해 그리고 교회에 대해 객관성이 결여된 부정적인 정보를 주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편견을 갖게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기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정보를 받는 새로운 교인도 아무래도 부정적인 시각에 영향을 받아 교회생활과 그리고 다른 이웃들과의 교제를 이루어가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고국을 떠나 해외 마케도니아(현재 그리스) 수도 데살로니가에 정착하며 사는 이민자들인 유대인들은 성품들이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온 방문자들을 적대하고 부정적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 사회가 부정적인 것은 데살로니가의 이민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됨됨이가 부정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려 그런 사회에서는 교회도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해외의 한인교회가 왜 칭찬을 듣지 못하고 욕을 먹습니까?

해외 한인교회는 말 많고 피해야 할 곳으로 사람들이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람됨됨이의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의 사람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 보다 사람됨됨이가 더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과 윤리와 양심의 잣대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높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똑 같은 욕을 여러분들과 목사인 제가 한다면 당연히 제가 비난을 더 받게 될 것입니다.

이유는 여러분들은 평신도이고 저는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인 기준이 목사와 평신도가 같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통념으로 신자와 신자가 아닌 분들과의 도덕과 윤리의 잣대가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이 자주 이러한 사회적 책임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한발자국 더 나아가 해외이민 사회에서 교인들은 교회의 문제를 사회화 시킵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 자신의 정당성을 교인들에게 알려 자신의 지지자를 얻으려고 하고 더 나아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알립니다.

오늘 데살로니가 유대인들과 바울의 문제는 신앙의 문제, 회당(교회)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6절과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 그 사람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을 합니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 내용을 이슈로 삼지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설교한 복음을 국가반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즉 사회문제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 선동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와 신앙의 문제를 사회의 이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마케도니아)의 소수 민족입니다.

자신의 교회 문제, 자신의 민족 문제를 이방인 사회까지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 밖의 사람들 이방인들이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처음부터 아예 <예수의 예>자도 그들에게 말을 꺼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2장 16절에서 “그들은 우리가 이방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려는 일까지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죄의 분량을 채웁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이르렀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들이 교회 안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허물과 실수를 서로 감싸고 덮어주는 마음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신자의 자세입니다.

반대로 허물을 들추고 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방해하는 일로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해외 이민 생활의 성공을 누구나 꿈을 꿉니다.

여러분, 무엇이 성공입니까?

사업하는 분들은 돈 많이 벌고, 공부하는 분들은 학위 받아 한국가서 교수로 임용되면 성공한 것입니까?

돈은 벌고 교수는 되었는데 그것을 담을 만한 인간됨의 그릇이 미치지 못하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돈과 명예가 적어도 3세대 이상은 유지되어야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과 명예가 3세대 이상 유지되려면 그것을 담을 만한 인간됨의 그릇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돈과 이름을 조급하게 얻으려고 애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와 하나님이 주시는 명예를 담는 그릇을 준비하는 일을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가난한 과부에게 축복을 하기 전에 먼저 집안에 그릇을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준비한 그릇 만큼 기름이 채워졌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시기 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되지만 동시에 이해하는 마음을 넓히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의 씨앗이 어떤 밭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말라 죽을 수도 있고 새의 먹이가 될 수 도 있고 조금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

표준새번역에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 보다 더 고결한 사람들이어서…”

한국어 번역의 <신사적이다> <고결하다>는 단어가 좀더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체코어 성경에는 „přístupný“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přístupný člověk“ 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신사적인 사람, 고결한 사람>이란 결국 <속이 좁거나 편견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기와 질투하는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편협하고 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는 해외 이민생활과 신앙생활을 성공하기 위해 마음의 장벽을 자꾸 무너트려야 합니다.

특히 시기와 질투가 생산하는 마음의 장벽을 무너트려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베뢰아 유대인들 처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는 마음을 키워감으로써 극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에게 있는 하나님의 달란트를 발견하는 놀라운 사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공동체안에 있는 우리는 나의 형제 자매를 더 이상 내가 갖지않거나 나보다 더 가진 소유자가 아닌 하나님의 달란트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체험이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 저와 여러분들은 베뢰아의 유대인처럼 신사적이고 열린마음을 가져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을 체코의
한인사회에 그리고 체코의 무신론 사회와 폐쇄적인 체코교회에 드러내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기업을 감당하고도 남는 신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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