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03년 06월 08일)
- 출 17:1-16
- 설교자: 이종실
030608 (성령강림주일)
출애굽기 17: 1-16
여호와 닛시
<본문>
반석에서 물이 나다(민 20:1-13)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아말렉과 싸우다
8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1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설교>
오늘은 교회달력에 따라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에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요한복음 14장 26절과 27절의 말씀을 예배시간에 낭독을 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보혜사 성령의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시며 우리를 가르쳐서 근심과 두려움이 많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평안은 세상의 평안과 다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유월절 명절 음식을 나누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장)
우리는 사람들이 원치않는 고난과 시련을 피하고 평안을 누리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것을 종종 보게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평안을 세상의 평안이며 그것은 자신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전혀 원치 않는 환란을 세상에서 우리는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세상의 문제들을 피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와 동행하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시련을 도피하는 방법을 일깨워 주고 있지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시련의 길을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고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한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 광야(시나이 반도 – 현재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반도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반도)를 떠도는 유목민들이었습니다.
광야의 거친 환경에서 살면서 그들은 물과 식량의 부족에 늘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곳에서는 유목민들 사이에 물과 식량 확보를 위한 전쟁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아말렉이 르비딤에 이르러 거기서 이스라엘과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말렉 사람들과의 전쟁의 원인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지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물을 뺏기위해 공격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시면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신 광야에서부터 만나를 먹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르비딤이란 곳에 이르러 진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우물을 갖게 된 과정이 오늘 본문의 전반부인 1-7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멀리서 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이 있고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지도자를 원망하고 심지어 돌을 들어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또 목이 말라 거반 다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해서 우물을 빼앗는것은 시간 문제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 대한 모세의 평가가 후에 신명기에 나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신 25:17-18)
오늘 본문 9절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합니다.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에서한 모세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위해 훈련된 사람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두 달 전에 그들은 노예들이었습니다.
손에 들고 나갈 만한 무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보듯이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아말렉과의 전쟁에 나갔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 전반부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는 매우 다릅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불평을 하였습니다.
3절에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어서 4절을 보시면
이일로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그들은 모세를 향해 돌질을 하여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향한 하늘을 찌를 듯한 원망과 분노의 상황이 지금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말렉이 그들을 공격하였을 때 그들은 아직 피곤하였고 직감적으로 파멸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들은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돌질을 하여 죽이고 싶을 정도 원망과 분노가 풀릴만큼 상황이 완전히 해결되지않았지만 아말렉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타인에게 원망과 분노를 쏟고 자기 자신은 살짝 비켜 설 수 있는 삶의 문제가 있지만 때론 누구에게도 탓을 돌릴 수 없이 우리 자신에게 직접적인 결단을 요구하며 우리를 시험하는 삶의 문제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이야기가 여호수아와 그가 지도하는 군대의 싸움에 초점이 맞추어지지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느냐 죽느냐는 긴박한 긴장감이 감도는 전쟁터 대신에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 꼭대기에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그곳은 모세와 아론과 훌이 있는 곳입니다.
이야기는 더 코믹해집니다.
11절을 보시면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전쟁의 승패가 전쟁하는 장군과 용사들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와 동떨어진 곳에 있는 모세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어떤 결과가 직접적으로 우리로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와 분리되거나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세상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어떤 이슈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다른 장소에 있더라도 우리들은 상황에 영향을 받고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많은 예가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작은 아이성에서 패배하는 이유는 아간 이란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수 7장).
솔로몬 왕국이 분열되는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솔로문의 불신앙 때문입니다.(왕상 11장)
예루살렘이 앗수르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히스기야가 성전에 올라가 예루살렘 구원을 위해 기도하였기에 앗수르를 물리쳤습니다. (왕하 19장)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경은 오늘날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의 문제는 2천년전 전혀다른 민족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의 사건과 연결되어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이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고 일하지 않는 사건은 하나도 없음을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이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시시각각으로 환란을 겪었습니다.
환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절망을 뚫고 열리는 길들을 걸었고 광야의 바위로부터 쏟아지는 물을 마셨습니다.
지금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전쟁의 실재상황에 하나님은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있고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였습니다.
산꼭대기 서서 손을 들고 있는 모세의 모습은 저와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이세상의 모든 환란들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손을 들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식으로 풀이합니다.
분명히 이 장면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만 본문은 모세가 기도하는 상태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히브리말로 기도하는 동작을 손과 관련시켜 말을 할 때 보통 손을 뻗쳤다. 펼쳤다고 합니다.
손
을 높이 든다는 표현은 창세기 13장 22절의 맹세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오늘 본문의 손을 높이 든다는 표현의 경우는 이사야
26장 11절과 신명기 32장과 미가서 5장에 나오는 어떤 힘보다도 강한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성서
학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모세는 하나님이 환란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신다고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패배한다는 이야기를 모세가 어떤 마술적인 능력을 가진 것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온갖 기적을 체험하고도 환란을 겪을 때 마다 원망을 하고 분노하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모세는 손을 들고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메시지를 온 몸으로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기도 없고 전술도 없고 전쟁의 경험도 없는 자신들이 모세의 손이 들려있으면 이깁니다.
그런데 그 손이 내려가면 무참히 패배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모세의 손을 통해 그들은 지금 자신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망투성이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쟁이라는 보다 더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시련들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깨닫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느끼게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오만과 자만과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를 하는 자기 자신을 만나게 하려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은 굳은 살처럼 딱딱하여 왠만한 자극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대신해서 싸우신다고 고백한다면 오늘 모세의 모습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여기서 다툰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려 싸움을 걸어와 따지고 든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이 싸움을 걸어 모세가 답합니다.
여러분들은 나와 다투어 어찌하자는 겁니까?
여호와를 시험하여 어찌하자는 겁니까?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아마 모세가 노무현 대통령처럼 조리있게 설명을 잘하고 언변이 있어 토론을 잘했더라면 공개토론회도 열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모세는 언변이 어눌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의 경험에 의하면 언변이 어눌한 사람이 대체로 화를 금방 잘 냅니다.
모세도 성격이 급합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불평하고 모세는 하나님에게 달려가 불평을 할만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제가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 이제 그만 이 노릇 하고 싶지않습니다.
다시 미디안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양을 치며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모세는 이처럼 백성들이 자신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 처럼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지않았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틈만 있으면 불평과 원망을 터뜨릴 때 마다 모세가 한 유일한 일은 백성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등지고 보이지도 않는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완벽하게 소극적인 태도로 어린아이 처럼 하나님께 의존하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의 무능이 아니라 유능함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한 만큼 강해지고 무능한 만큼 유능해지는 비밀을 사도 바울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을 합니다.
내가 구태여 자랑을 한다면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 (고후 11:30)
그
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12:9-10)
지워도 지워도 끝없이 날아오는 스팸 메일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뚫고 나아가야할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모세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아말렉 전쟁처럼 쉽게 끝나지않고 오래 걸립니다.
모세가 계속 손을 들고 있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함께 간 아론과 훌이 돌을 하나 가져와 모세를 그 위에 앉게하고 모세의 두팔을 양쪽에서 떠받칩니다.
이렇게 하루종일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아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말렉을 쳐부숩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여정에 그 길을 방해하는 무서운 세력들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친히 그 세력들과 싸워 이기시지만 우리 모두는 제나름대로 서로 도와야함을 또한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교역자, 집사님 그리고 봉사자들이 제 나름대로 맡은 일들을 충실히 하면서 서로 도와야 교회가 부흥발전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모세는 전쟁의 승리로 여호수아를 칭찬하지않았습니다.
대신 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닛시는 깃발, 승리의 깃발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진실로 승리의 깃발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환란과 인생의 문제를 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환란과 인생의 문제들 속에서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우리가 이미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우리들이 추구하고 기대하는 세상의 평안과 다른 그리스도의 평안을 체험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승리의 깃발, 여호와 닛시라 고백하는 생의 체험으로 날마다 가까이 다가오는 약속의 땅의 희망안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