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03년 08월 10일)
- 출25:1-9
- 설교자: 이종실
030810 (삼위일체 여덟번째 주일)
본문: 출애굽기 25: 1-9
제목: 예배, 출애굽의 대단원(大團圓)
<본문>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4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5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설교>
오늘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위해 여호수아를 데리고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출애굽기 25장 처음부분을 읽었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31장까지 계속됩니다.
한번 책장을 넘기며 대충 빨리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막과 성막에 따른 물건들을 만드는 방법이 매우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읽다가 보면 이런 이야기도 성경의 일부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글짓기 숙제를 하는 학생이 원고지 매수를 채우기 위해 요령을 부리듯이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한번 통독해야겠다고 마음잡고 성경을 읽는다면 이 부분이 첫번째 걸림돌이 됩니다.
읽기에도 지루할 정도로 성막과 그 딸린 물건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저자의 뜻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볼 만 합니다.
여기서 성막과 성막에 딸린 물건들이 정확히 하나님의 명령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저자는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을 출애굽의 저자는 9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9)
성막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천막입니다.
성막에 딸린 물건들은 예배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려 하나님은 자신이 경배와 섬김을 받는 예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온 모세에게 예배 장소와 필요한 물건 제작에 대해 세부적인 방법을 지시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모두 40장입니다.
25장부터 마지막 40장까지 출애굽기 전체 가운데 삼분의 일이 넘는 내용이 예배장소와 예배시 사용될 물건에 관해 기록되어 있음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 이야기 하면 저와 여러분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애굽에 내린 하나님의 재앙, 홍해의 기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출애굽의 중요한 내용은 바로 오늘 본문으로 읽은 25장부터 40장 마지막 부분까지 대단원을 이루고 있는 성막을 중심으로한 예배의 섬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출애굽의 이야기의 중요한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고된 노역으로 부터의 단순한 해방이 그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단순이 그 법에 복종하도록 하려는 것이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닌 바로가 통치하는 나라, 바로의 통치아래에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우상이 지배하는 삶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출애굽의 이유였습니다.
그뿐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삶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된 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수 있도록 그들 가운데 하나님은 그 예배 처소와 예배에 사용될 물건을 만들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자신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예배에 대한 가르침이 출애굽의 대단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과 성막에 딸린 물건들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종교적 취향에 따라 자신들의 방식에 따라 만들도록 버려두지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것을 만들도록 엄하게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경배를 받는 예배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관련된 모든 것은 하나님 의중을 따라야지 예배자 이스라엘의 뜻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번에 묘지를 향해 떠나는 관과 유가족을 가득 실은 지나가는 장례차를 구경을 하고 뒤따라는 가보았지만 상주가 되어 그 차에 타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영정을 안고 가는 상주가 바로 저였습니다.
주일이 끼어 4일장이 되었습니다.
빈소에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이 저였습니다.
상주로 입관부터 삼우제까지 복잡한 장례절차를 치르면서 저는 장례예식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장례예식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자들을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산자들의 가슴에 맺힌 실수와 잘못과 원망과 산자들 사이에 뒤틀린 인간관계가 죽은 자 앞에서 치유되고 회복되는 예식이 장례식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장례식에는 엄중한 절차가 있습니다.
그것을 조금 간소화 하려면 상주들과 친척들이 의논을 해서 합니다.
일방적으로 누구 한 사람에 의해 그 절차가 좌지우지되지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예배에 하나님 자신의 요구가 있습니다.
예배는 인간의 필요와 희망의 성취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이 그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예배의 우선순위를 자주 잊습니다.
우리의 뜻과 소망들이 예배에 나타나는가 아닌가가 늘 살펴야 합니다.
(* 광고시간에 생일 축하 케익을 자르고 폭죽을 터트린다.)
잘못된 예배, 실패한 예배의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는 구약성경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얼마든지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모세가 한 달 열흘씩이나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 사이에 조바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불안을 의지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들을 위한 예배는 우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제단을 세우고 미쳐 날뛰었습니다.
아
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출 32:4-6)
자기 자신을 우상화한 예배는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소외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소외된 자신을 더욱 정당화 하려는 자기 암시로 우상화된 예배는 더욱더 격렬해집니다.
제단을 세우고 그 앞에서 미쳐 날뛰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그 예배를 여호와의 절일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체코어 성경에 Zitra bude Hospodinova slavnost 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이것은 Hospodinova slavnost (여호와의 페스티발)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페스티발이었습니다.
이것은 반복해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나는 잘못이었습니다.
출애굽 오늘 말씀에 예배 처소와 예배에 사용되는 물건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길게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오늘날에 이 말씀대로 똑 같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변치 않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경배 받아야 하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장소를 거룩한 장소 즉 성막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막은 원래 <살 곳> 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주할 곳 즉 살 곳을 찾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손으로 짓게 될 거주지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설계도와 일치된 건물은 거대한 신전이 아니었습니다.
성막은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조립형 텐트였습니다.
그걸 펼쳐서 세우면 가로 15미터 세로 5미터 높이 5미터 정도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계명을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계명대로 따라 살기로 엄숙히 다짐을 하였습니다.
계명을 주고 받고 그리고 다짐을 주고 받았으면 충분하지 또 성막을 세우도록 따로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거처를 찾는 이유가 분명하게 설명되고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생활공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거처를 필요로 하지않습니다.
이사야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 66:1)
유한한 인간이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거주하실 집을 짓는 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운반 가능한 거처를 짓도록 이스라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나는 그들 가운데 거할 것이다 하십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된 확실한 체험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시내산은 아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광야의 여행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죽은 자 앞에서 산자들의 관계가 회복된다고 하지만 그 회복이 늘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제사 또는 추도예배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을 견주어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전민족적인 체험이 닥쳐올 광야의 굶주림과 목마름과 전쟁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시내산의 언약이 타인의 죄로 전민족이 고통을 겪게되는 일도 막을 수 없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의 미래의 불행을 예방하는 부적이 아닙니다.
시내산 이후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광야의 캠프생활의 수고를 고스란히 겪어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캠프생활 한 가운데 성막이라 불리우는 텐트에서 함께 살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성막이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것입니다.
조금 질문을 바꿔 우리에게 예배당이 왜 필요한가? 질문해 보겠습니다.
예배당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지속시키데 도움을 줍니다.
의사가 처방한 약이 병을 낫게 하고 보약이 약해진 곳을 강하게 해주지만 밥처럼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 세끼식사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것이 우리들의 건강을 지속시킵니다.
별
로 뜨거운 체험도 없고 은혜도 느끼는 것 같지않지만 일주일에 한번 이날을 기억하고 교회당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육신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지키고 승리하여 약속의 하늘 축복을 누리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이 시간 고린도전서 3장 16절의 사도 바울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6)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처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신자의 삶을 함께 노력하십시다.
온갖 우상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 행복을 이 땅 위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을 우리 하나님은 지금 원하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