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부터… 비로소…

  • 한인 예배 (2001년 10월 28일)
  • 마 4:12-17
  • 설교자: 이종실

01/10/28(삼위일체후 스무번째 주일)
설교본문: 마태복음 4장 12-17절
설교제목: “이때부터 … 비로소 …”

<공동기도>
회개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복음의 빛으로 우리 어두운 모든 것을 비추어주시사
우리들을 진심으로 회개한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들이 받은 복음의 빛을 체코교회와 함께
이방의 갈릴리와 같은 체코사회에 비추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리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집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앚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설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여행경로를 매우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있습니다. 13절 14절 15절 16절을 여행 경로를 빼고 본문을 다시 읽으면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입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마치 때를 기다리던 사람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게 됨을 오늘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인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 탄생 때 멀리서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메시야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찾아오고, 들녘의 목동들이 천사의 구세주 탄생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메시야 탄생을 경계한 헤롯이 베들레헴 지역의 갓 태어난 아기들을 무참히 죽이자 주의 천사의 보호로 그 죽음의 터널을 지나 구사일생을 합니다. 장성하여 성인이 되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이 임하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이미 충분히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이룰려고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요즈음 체코 의회에서 국가 예산심의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 체코의 재단법인에 대한 국가재정 지원심의가 있었습니다. 하벨 대통령 이전 부인이 세운 “올가 재단” 그리고 침례교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아드라” 그 외 해외 단체들이 세운 유수한 재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도 짧고 단체 사무실이라야 별도로 없이 우리 꼬빌리시 교회로 공식적인 주소로 되어있고 유급직원도 없이 몇 몇 자원 봉사자들을 조직하여 슈토렉 목사님이 직접 단체를 운영하는 “디보께 후시”가 의회로부터 최고의 평가를 받고 의회가 이 단체의 활동 지원으로 천이백오십만 꼬룬 (미화 약 35만불)을 예산 편성키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이 결정이 바로 언론에 알려 지고 여기 저기서 슈토렉 목사님께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고있다는 이 이야기를 제 아내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제 아내가 “당신은 언제 슈토렉 목사님 처럼 그렇게 일을 성취할 수 있겠느냐?” 부러운 마음이 들었던지 제게 물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 이룰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무엇이 되려고 하고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평가 받고 인정 받고 싶어합니다. “20대 30대는 사랑으로 살고 40대는 돈으로 살고 50대는 명예로 산다”고 하는 세간의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타인으로부터 무엇인가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준비를 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익혔습니다. 키가 자라고 성장하면서 더욱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회당에서 지내기를 즐겨하셨고 그리고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단지 자신을 단련하고 준비할 뿐 무엇을 하려고 그리고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 비로소 …”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데뷰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거나 모든 사람들이 혹할 만한 메시지를 준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헤롯 정권의 탄압을 받아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의 빈자리나 매꾸려는 듯이 요한이 선포하던 똑 같은 설교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 시작에 대한 성경의 기록에 1500년대의 종교개혁을 위해 투쟁을 하던 체코 개혁파들은 “사탄이 악으로 신실한 종들을 거두어갔지만 하나님은 선으로 자신의 약속에 따라 곧 바로 다른 곳에서 다른 것을 준비하셨다.” 라고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혜성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성장시켜 열매 맺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이십니다. 이땅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뿌려진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우리들이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장시켜가십니다. 하나님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고백하는 삶으로 준비된 교회와 신자들을 우리 하나님은 세례 요한의 빈자리를 채우듯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 처럼 일하게 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어떤 존재인지 질문도 하지않고 하나님의 뜻에 기대어 일하는 일꾼들이 들판에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꾼들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되어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를 우리들은 체험합니다.

예 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요지는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너가 너 힘과 능력으로 한번 너의 사명을 감당해보라고 요청을합니다. 너가 메시야라면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이고, 저 예루살렘 꼭대기에서 번지 점프를 하듯 뛰어내려 천사가 보호해주는 이벤트를 너의 데뷔전에 선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너를 알아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 비로소 …” 오늘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이 두 단어가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들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나라의 증언입니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합니다.

한 국에서는 교회의 삶 과 세상의 삶을 따로 살아도 감출 수 있지만 이 해외에서는 감추어 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호구지책을 위한 세상의 삶이 곧 신자의 삶이며 교회의 삶이됩니다. 세상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사업과 학업과 인생의 가치관을 성공적으로 성취하기위해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두움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받으면 내 자신이 얼마나 어두운 존재였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회개가 나옵니다.
자 신을 바라보는 눈이 한번 열리면 닫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더욱 더 성장합니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조그마한 어두움까지도 발견하게 됩니다. 끝없이 밀려오고 생성되는 자기 자신의 어두움의 근원을 결국 찾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들은 하나님앞에 그리고 사람들앞에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의 짐을 벗어버리고 자유하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빈자리를 단지 대신할 뿐이었습니다.자신의 주장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선포하라 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은 그대로 전할 뿐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듯이 똑같이 한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 물어 보았을 때 예수님이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선지자라고 한다는 것 입니다.   

이 제 우리는 예수님의 여행경로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지리는 제일 남쪽에 유대 그리고 북쪽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사마리아 그리고 갈릴리가 있었습니다. 가장 남쪽에 위치한 유대에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인 예루살렘과 성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광야에 계시다가 세례 요한이 탄압을 받는 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기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반대 방향인 북쪽 갈릴리로 향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는 약 100키로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갈릴리는 이처럼 이스라엘의 북쪽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보통은 게네사렛 호수, 또 나중에는 디베랴 호수라고도 불리는 갈릴리 호수와 지중해안 평야 사이에 있는 지역입니다. 이 갈릴리에서도 고향동네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호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는 호수를 끼고있는 평야지대여서 부유하고 인구밀도가 높았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갈릴리 지역에 204개의 부유한 마을과 15개의 요새도시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토지가 비옥하고 북방에 위치하다 보니 이웃 강대국들의 시달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구약성경 열왕기하 15장에 언급되어있습니다. 주전 743년 앗수르 임금 디글랏빌레셀이 갈릴리를 점령하여 앗수르 제국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켰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앗수르로 사로잡혀 가서, 갈릴리 주민들 가운데 유대인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전 8세기 이사야의 시대에 이 지역을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렀습니다. 헤롯 왕조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교적인 헬라 주민층이 다시 늘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역사적 상황으로 갈릴리는 종교적으로 혼합신앙이 매우 성행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무시를 당하였고 경제적으로 중앙정부와 지방 관리들의 과도한 세금착취로 언제나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유대 광야를 떠나 북쪽 갈리리로 오신곳 이곳은; 인구 밀집지역으로 온갖 신앙이 혼합되어있고, 이교적인 헬라주민과 유대주민들간의 갈등도 많고 과도한 세금착취로 백성의 원성이 높은 온갖 문제들이 놓여있는 인간 사회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는 세례 요한 처럼 광야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이면서 신앙적으로 이미 이방의 땅이 된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방향을 잘 이해한 사도 바울은 이방의 땅 지중해 도시들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문화 종교 사상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설교를 하였고 회개를 요청하였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인간의 무질서와 죄악이 득실거리는 땅을 피하지 않고 사기꾼들이 있는 곳에 술집이 있는 곳에 사창가가 있는 그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저희와 같이 해외에 있는 우리 한인교회 공동체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걸어가신 예수님의 여행의 방향을 잘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으로 우리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동떨어진 세계 속에 남아있는 것이 익숙하고 편합니다. 이것은 유혹입니다.  광야에서 은둔하여 하나님 나라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의 마태는 가버나움 세관의 세리였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은 당시에 로마 통치자의 앞잡이자 같은 동족을 착취하는 착취자였습니다. 죄인을 대표하는 예로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죄인 마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빛을 보았습니다. 회개와 함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빛은 죄인과 억압과 착취자의 가슴에 까지 비쳐지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를 만난 자신의 체험을 오늘 본문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놓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복음은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춰집니다. 사람의 눈을 피해 한적한 시간에 물길러 나온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자 그는 동네 안으로 뛰어들어가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회개가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이 됩니다. 우리들은 우리들만의 만족을 위해 그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회개하여 거듭난 자들을 통해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빛을 비취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이 세상 속에서 점점 성장하게 됩니다.

<설교 후 기도>
오 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일을 어떻게 시작하였는지 살펴보면서 오늘 저희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한 존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 해외에서 문화와 언어의 장벽으로 우리들만의 믿음의 동굴 속에 머무르는 유혹을 이기게 하셔서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방의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저희들로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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