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현실사회주의 아래서의 교회 정체성을 위한 투쟁 1977년 – 1989년
77헌장 지지자들과 절대 권력에 맞선 저항자들의 용감한 투쟁의 도덕적 깊이는 올바른 신학 경향을 위한 체코형제개혁교회 내부 토론의 중요한 반응을 일으켰다. 마치 급진적인 따보르파와 함께 온건한 프라하 신학자들에 의해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던 후스 시대 처럼 현실사회주의의 억압 아래 체코형제개혁교회 안에서 두개의 중요한 논쟁이 형성되었다: 1. 교회활동의 보장된 합법적인 가능성을 통해 평화적이고 분쟁 없는 방법을 추구하는 – 온건한 대다수 그리고 2. 고백교회의 의미에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어려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비타협 정책을 지지하는 – 급진적인 소수 그룹. 모든 총회 때마다 급진적인 목소리는 신학적 토론에서 언제나 흘러나왔다. 총회의 지지를 받는 교회 지도자들이 정부 당국자들과 파트너 관계를 열기위해 노력하였다. 지속적으로 교회의 존재와 활동을 보장 받을 수 있도록 대화와 협상을 통해 야기된 모든 문제들과 위협적인 분쟁을 해결하기위해 노력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회 안에서 십자가 아래서 교회의 고백과 증언으로서 옛날 형제단의 경우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일반적으로 우세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인권 문제는 체코형제개혁교회 안에서 많은 교인들의 주장이기도 하였다. 1977년 5월 교회의 31명이 단체로 국가회의에 신앙과 교회 차별에 대한 문서와 모든 종교의 자유의 실질적인 보장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서명자는 주로 정부에 의해 교회활동이 중지된 젊은 목회자들 그리고 교회의 몇 몇 명망 있는 평신도들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불의를 반대해야 하는 책임과 권리를 가지고 있는 실제 교회 지도자들이 이 문제에서 모순을 일으켰다. 총회는 활동 중에 있거나 아니면 국가로부터 목회 활동이 중지된 서명자 목회자들에게 경고로 질책하도록 결정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다. 당시 54명의 체코형제개혁교회 목회자들이 목회 활동이 금지되었고 많은 신학생들이 제적되었다. 총회는 국가 기관들에게 교회의 법과 시민의 권리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각각 다른 것임을 환기시켰다; 총회는 “합법적인 저항” 과 “공식적으로 금지되지 않은 것은 허락된 것”으로 해석 결의를 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디아코니아 활동의 갱신이 이루어졌다. 동시에 몇 몇 설교가들은 목회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고 제적된 학생들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지역 관청의 차원에서 국가는 구체적인 범법 사례와 특별히 어린이와 청소년 종교교육 그리고 문서 사업의 제한된 활동을 공지하였고 노회와 총회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기위해 국가 정보기관과 감시기관의 반복되는 도청과 감시, 교회 봉사직의 선출에 대해 소위 “사전 국가동의”라 불리우는 승인과 “국가의 불신임”의 조건에 의한 동의의 거부를 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올바른 신학경향에 대한 토론은 정규적으로 목회자 컨퍼런스와 특별히 총회 프로그램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대부분 근본적인 신학적 차원에 대한 개방된 토론은 의견의 일치를 이루었다. 때때로 심지어 심각한 논쟁이 있지만 각각 다른 신학 경향의 사람들은 성만찬에 그리고 교회의 영적일치의 보호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을 확인하는 화해의 형제의 영으로 언제나 함께 모일 수 있었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총회 협의방식은 개방성 – 전체주의 통치의 중심에서 – 민주주의 의회의 방법들을 반영하였고 국가 기관의 주의 깊은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80년대 중반 소비에트 연방에서 고르바초프(M. Gorbacov)가 “글라스노스뜨(개방)”과 “뻬쩨스뜨로이(개혁)”의 토대 위에서 정치적 경제적 개혁의 새로운 길을 선언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민주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불행하게도 공산주의 권력자들은 일반적인 선언에 집착하였고 전체주의 정책의 과정과 무기력한 경제구조의 변화를 실천적으로 시도하지 않았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의 제1공화국의 민주주의 전통을 잊지않고 있던 “침묵하는 대다수”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자유와 민주의 회복을 위해 다양한 “시민운동”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국가 기념일에 공산당의 인민 군대와 경찰에 의해 진압된 대중집회와 시위들이 발생하였다. 1987년 제25차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 후 교회 지도자들은 종교의 자유와 시민의 권리에 관한 “법 개정안”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안이 1988년 말에 국가 행정기관에 제출되었다. 1989년에 법무부와 국방부와 협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 봄 민주적인 자유의 회복을 위한 대중 서명 운동인 “몇 개의 문장” 이라는 새로운 시민운동이 조직되었고 모든 교회 많은 교인들이 이 서명운동에 참가하였다. 위기의 상황이 정치적 변동을 성숙시켰다. “진리와 자유의 삶”(하벨의 구호)에 대한 요구가 점점 더 분명해지기 시작하였다. 1989년 11월 16-18일 프라하에서 열린 제 26차 총회기간에 이 요구가 표명되었다. 11월 17일 총회의 저녁 회의때 혁명적인 사태의 소식이 전달되었다.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나로드니 트지다(Narodni trida)거리에서 경찰의 잔인한 진압에 의한 대량학살 소식을 전달 받고 총회 회의는 중단되고 침묵 기도 후 이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움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당시 총회의 선언은 모든 사태를 발생시킨 전제정치에 대항하는 첫번째 공개적인 저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