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사]13. 생존 투쟁 1949 – 1977

13. 전제주의 통치사회에서의 생존 투쟁 1949년 – 1977년

“공산당의 지도력 아래서의 노동계급에 의해 정부의 모든 권력이 이양되었다.”는 공식적인 선언이 있었던 1948년 2월 정치적 구테타 이후 교회들도 새로운 상황을 직면하게 되었다. 체코 개혁교도들은 자신의 민족의 진보적인 사회주의적 노력에 동감하였기에 사회제도의 올바른 건설에 대한 사회주의적 사상과 포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괴롭혔던 전제주의 통치의 폭력과 불법으로 체코개혁교도들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정치적 반대자로 간주되면 처형되거나 갖히거나 노동수용소 또는 군부대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친척들은 범죄자들이 되었다.

체코형제 개혁교회 뿐 아니라 전 교회적으로 영적 지도자였고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던 요셉 르믈 흐로마드까 (J. L. Hromadka)교수의 활동에 의해 많은 교인들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신들의 사명의 새로운 이해를 위해 노력 하였다. 기독교 공존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총회에 몇 차례 성명서에서 밝혀졌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정치적 변화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증언을 해야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외적으로 확산되는 무신론주의 그리고 점증 되는 교회에 대한 차별을 기독교 증언의 무관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도움이 제거 되어야만 하는 교회의 시련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자신의 존재 – 그루터기가 되는 것 – 의 새로운 외적 조건을 받아들였다. 복음 전파와 교회의 사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종교개혁의 정신적인 단체 (후스파 종교개혁과 형제단 종교개혁)의 이전 활동과 관련된 “종교개혁의 정신의 연맹(SCED)”이 1952년부터 체코형제개혁교회안에서 활동을 확산시켰다. 목회자들의 신학교육을 지원하고 국내 국제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등을 숙고하였다. 외부의 압력이 강화되는 시기에 어려움을 겪는 목회자들과 그 가족들을 지원하였다. SCED의 활동은 강제적으로 1974년 내무부의 결정에 의해 막을 내렸다.

60년대에 몇몇 맑스주의 철학자 – 특별히 마호베쯔(M. Machovec)교수 – 교회들 에게 환영을 받은 기독교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대화의 가능성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당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새로운 현대의 형태의 자신의 “헌법”을 갱신하여 1966년 총회에서 결정하였다. 불행하게도 대화의 희망과 정의롭고 인도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 어느 하나도 성취되지 못하였다. 맑스주의 이데올로기가 통치원칙으로 선언되고 유물론주의의 무신론이 유일하게 유효한 삶의 관점으로 정착되는 현실이 당시 새롭게 선포된 “사회주의 공화국(CSSR)”의 시대에 많은 교인들에게 사회주의 국가 정책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불신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것도 변화 시킬 수 없다는 무력감은 그 당시 생존을 위해 많은 교인들을 “국내의 이민자”로 그리고 수동적인 “은둔자들”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존재의 순수성과 올바른 기독교의 경향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지속되는 이중적인 노력은 숨김없이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에서 발표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총회는 각종 교회헌법의 정관과 구체적인 탄원과 청원으로 국가 행정기관과 지속적으로 접촉을 하였다.

1968년 공산주의 체제의 민주적인 개혁을 위한 두브첵(A. Dubcek)의 시도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대해 새로운 희망을 교회에 불러일으켰다. 불행하게도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려진 짧은 기간이 쏘비에트 군대와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군대가 체코로 진주하면서 1968년 8월 21일 끝이 났다. 1969년 2월에 열린 체코형제개혁교회 16차 총회가 “우리 민족의 총회”라는 특별 메시지에서 이 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고수하였다. 그 다음해 전제주의 통치자의 가혹한 형태의 무자비한 정치적 숙청이 공식적으로 “정상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되었다. 그러나 이 무자비한 억압은 교인들을 포함한 잠복중인 반 공산주의 계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교인으로 1969년 1월 16일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한 얀 빨라흐(Jan Palach) 학생의 희생은 젊은 세대의 내적 저항의 강렬한 표현이었다.

체코슬로벤스꼬 공화국 정부가 서명한 1976년 헬싱키 시민 권리에 대한 국제협정 선포이후 민주화 운동 “77헌장(Charta 77)”의 지지자들이 모든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실현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77헌장의 일차 서명자들 가운데 체코형제개혁교회의 19명의 목회자와 많은 평신도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어지는 정부의 탄압으로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일터를 떠나야 했다. “77헌장”은 시민의 책임 운동으로서 자유와 민주의 회복을 위한 꿈을 민족적으로 각성 시킨 유명한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힘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인들은 내적 힘의 새로운 필요성과 자신의 교회의 확고한 토대 위에서 영적 방향을 위한 도움을 자각 하였다. 여기서 신실한 목회자들과 장로들이 복음의 자유로운 선포와 기독교 목사의 다양한 형태의 목회를 위해 투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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