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까지 이르러/ (25) 빠벨 호이까 목사와 삐섹 오픈 하우스 (체코편7)
빠벨 스메따나 체코 총회장과 이규호 총회장 양 교단의 대표 두 분을 모시고 개회 예배까지 열고 시작한 쁠젠 꾸란두브 교회에서의 오픈 하우스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당 회원들과 교인들의 지속적인 반대로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하였다. 자신의 성 안에서 고요하게 살던 교인들 사이에 이 일로 금방이라도 교회 분열로 치달을 것 같은 내분이 일어났다. 나와 뜻을 같이 하던 그 교회 목회자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2003년도 여름 모라바 지방에 200여명 모이는 시골 교회로 옮겼고, 당시 신학생이었던 실무자 한 사람은 같은 도시 안에 있는 카톨릭 디아코니아에서 자신의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그 목회자와 2년 후에는 목사안수를 받을 실무자와 지금도 우리는 서로 연락을 하고 만나고있다. 그리고 우리들을 지지하는 꾸란두브 교회 교인들과도 교제가 끊어지지않고 있다. 교회의 사명에 새롭게 눈을 뜬 이들의 마음 속에 “오픈 하우스”의 꿈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당회와 교인들을 어렵게 설득해서 모든 절차를 밟아 추진한 일이 좌절되면서 실망한 나는 쁠젠과 같은 행정구역에 있는 삐섹(Pisek)에서 까페 형태를 띈 오픈 하우스를 설립하였다. 까페 이름은 “벨리바” 이다. 욥을 삼킨 큰물기를 체코어 성경은 “벨리바”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큰물고기” 또는 “고래” 이다.
오픈 하우스 선교 프로그램을 쁠젠에서 삐섹으로 옮기면서 아시아에서 마케도니아로 방향을 선회하던 바울의 마음을 느껴보려고 애쓴 것은 지금 돌이켜 보면 아마도 나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던 쁠젠에서의 좌절이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의 상처로 크게 남아 스스로 치유해 보려는 몸부림이었던 것 같았다. 한편 “오픈 하우스” 선교정책이 체코선교에 적합한지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같은 행정구역인 삐섹(Pisek)으로 자연스럽게 눈을 돌렸다. 왜냐하면 1995년부터 크고 작게 관여하던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교회 목사 이름은 빠벨 호이까였다. 그는 체코 개혁전통의 한 갈래인 만 여명의 교세를 이루고 있는 형제교단 (필자가 소속된 체코형제개혁교단과 다른 교단) 소속이었다. 그는 전현직 수상이 졸업하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정치가를 배출하는 프라하 경제학부를 졸업한 경제학자이기도 하였다. 1989년 공산정권이 물러나고 자유국가가 되자 경제적 자립 없이 신앙의 완전한 자유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이 섬기던 삐섹 교회를 재정자립을 위한 시도들을 하였다. 이것이 논쟁이 되어 결국 그는 교단을 떠나 가족들과 그리고 몇몇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새롭게 교회를 개척하였다. 1995년 봄 어느날 그가 교회당 설립을 위해 한국 목사인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교회당 설립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의 실천으로 주제가 바뀔 만큼 마음이 서로 통하였다. 그도 교회당 설립보다 더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거리에서 배회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해서 일할 것을 조언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30여명의 교회가 지금은 예배시간에 150명이 모일 정도가 되었다. 1999년 7월까지 거의 매주 한번 이상 그와 만나 전도상황과 과정을 점검하고 전도 전략을 세우며 교회의 미래를 설계하던 논의를 매번 회의록으로 기록하였다. 그 기록의 분량이 적지않다. 그리고 이 기록을 토대로 전도경험을 신학화하고 전도방법을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론화하는 작업을 하여 기존의 전통교회가 무신론 사회에서 전도를 실천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그 해 쉰 한 살이었던 그는 급성간암으로 1999년 9월 24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서로를 의지하는 신앙의 동지였던 그를 대신해서 나는 그의 양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울타리 역할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저는 한국 누가회 선교부의 김창환 형제입니다. 지금 프라하를 여행중에 이 글들을 읽고 있습니다. 귀한 수고를 감당하시는 모습이 아름답고 좋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http://www.kcmf.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