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04년 05월 16일)
- 눅18:1-8
- 설교자: 베네쉬
Text: Lk 18,1-8
형제 자매 여러분
여기 누구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기만을 위하고 거만하고 오만한 그런 재판관을 아직 만나 보지 못해 보신 분 계십니까?
그 재판관은 자신의 원한을 풀지 못했던 불쌍한 과부가 끊임없이 그를 찾아 오는 데도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마 2천년 전에도 그런 냉소적인 관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이해할 만 하며 아주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재판관을 비유로 들어 즉, 보다 더 쉽게 기도에 관한 한 하나님은 재판관에 비유됨을 들어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 것을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오늘의 비유를 설명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분들의 기도가 공허한 것이 아니며 귀머거리의 귓전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가끔 그렇게 생각될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당신들의 모든 기도들은 들려지고 있습니다.
다만 낙망 치 말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모임에서 집에서 성경공부 중에 수업 중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 또는 저 문제에 대해서 최소한 열 번, 스무 번 이미 기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들은 수 십 년 간을 모임들에서 기도해 오셨습니다.
또 계속 똑같은 일 만 일어나고 전혀 변화가 없으며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 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선물들에 대해 기도 중에 감사 할 수 있고 위기의 순간들 속에서 고통의 순간들 속에서 부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를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으십니다.
유혹의 순간들에 의심의 순간들에.
저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 „아십니까! 다만 기도 덕택에 저는 저의 병을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보십시요. 기도가
없었더라면 제 아들들은 아마 어느 곳에서 탕자들이 되었을 것 입니다…. 다만 항상 기도하고 낙망 치 마십시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떤 곳에서 설명을 해야만 된다면, 당신들은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일반적으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라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따르면 기도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그의 백성의 원한을 풀어 주시도록 하기위한 끊임없는 싸움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도록, 우리와 이 세상이 처해있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시도록 하는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간청은 애굽 노예생활로부터 하늘까지 상달 하였습니다.
사무엘 상 2장에 보면 이렇게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했던 한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끈임 없는 간청을 재판관의 모습 을 통해 설명하십니다.
재판관, 그는 아주 불쌍한 여인이었던 과부, 아무것도 없는, 기댈만한 그 무엇도 없는, 설혹 어떤 도움을 받았을지라도 그 도움에 수수료나 감사함을 표시할 수 없는 이 과부에 대해 이 재판관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과부에게는 아무 것 도 없습니다. 다만 부르짖음과 간청이 있을 뿐입니다.
과부는 매일 재판관에게 갑니다.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재판관은 오랫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과부는 재판관의 의지를 꺾고야 말았습니다.
거기에 과부가 재판관을 신뢰 했다 든가 재판관이 과부를 이해 했다 든가 하는 말은 없습니다.
또는 재판관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든가 의무감을 느꼈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말은 전혀 없습니다.
그 재판관은 말하였을 것입니다. „과부가 나에게 평안을 주도록, 갑자기 나에게 들이 닥치거나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나의 사무실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도록, 이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리라“
형제 자매 여러분, 이 간절하고 끈질긴 여인이 당신들의 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점에서 본이 됩니까?
기도 속에 무엇을 놓고 이렇게 끈질긴 싸움을 해야 됩니까?
과부는 요구하였습니다.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우리는 어디에 우리를 못살게 구는 원수들이 있는지 잘 압니다.
우리의 원수들이 꼭 밖에 있는 그 누구일 필요는 없습니다. 악한생각, 부족함, 배신, 죄책감, 슬픔 또는 질병이 우리의 원수 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더욱 괴롭힙니다.
이것을 없애고 싶지만 되지 않습니다.
변화를 원하지만 오지않습니다.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오래 전부터 이 외침은 교회의 외침이었습니다.
교회와 각 개인의 외침입니다. – “원한을 풀어 주소서“
어느 누구도 과부를 변호해 주지 않습니다. 그녀는 버려졌으며 심지어 위협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과부에게는 대적자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우리와 함께 하소서.
우리가 감당치 못 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믿음 없음으로 넘어지기 잘하며 얼마나 우리의 앞날에 대해서 걱정할 때가 많습니까.
도대체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숨어 버리셨습니까?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으시는가“라는 생각이 우리 내면 속에 피어 오를 때가 많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무관심한 존재들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만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아시며 우리가 우리의 아픔과 고통으로 인해 온 힘을 다해 밤낮 부르짖다가도 낙망 하기 잘 한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병든 자연에 대해서, 우리의 정치나 세상의 다른 나라를 위해서 끈질긴 기도를 쉬지않고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 제목들 속에서 낙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 제목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신문이나 방송이나 홍보를 위한 특별한 행사를 위한 것에 해당 되어야 하는 것 처럼
생각되고 달리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기도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아느냐 그렇지 않는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당신 주위의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분이 당신을 들으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중단하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즉, 이미 기도 했는데 전혀 변화가 없다고 생각할 때 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다른 사람을 위해 세상을 위해 무엇을 가져 왔는가?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만두지 마십시요. 낙망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가지는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께서 비유속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매일 자기의 원한을 풀어 주도록 이 거만한 재판관에게 왔던 과부를 기억하십시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매일 반복해서 간청했던 과부의 요구에 대해 아마 불합리하거나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과부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낙망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판관이 그의 의지를 굽히고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비유를 마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기도에 대해서 의심이 들 때 이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며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이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무시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사람 중에 한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기를 원치 않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속에서 낙망 할 때 기도를 의심하게 될 때 또 누가 그러함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은 여호와 그 이름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신뢰할 만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끔 예수님의 말씀은 질문으로 끝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우리는 늘 묻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신가? 큰 불행 중에 그리고 큰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은 의지할만한 분이신가?“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점에 대해 두려워 말아라.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신다“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대들은 신실한가?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돌보시도록 기도하며 원하는가? 그대들은 신실한 종들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세례를 통해 이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불편함과 불이익으로 인해 오히려 여기 계신 분들이 순종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실려는지요.
예수님은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그의 주권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치 않고 끊임없이 기도 했던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으실 것인지요?
모든 어려움에 주님의 신실 하심으로 극복한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으시겠는지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예수님을 기다리며 맡기신 사명을 감당한 모임들과 교회가 이 땅에 있을 것인지요?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 지기를 낙망치 않고 간청한 사람들이 이 땅에 일을 것인지요?
포기치 않고 꾸준히 끈질기게 우리와 교회와 그리고 이 세상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간구한 사람들이 이 곳에 있을 것인지요?
우리는 ‚인자가 올 때에 이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가복음 9장 24절 말씀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