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우리의 목자

  • 연합 예배 (2004년 05월 02일)
  • 요10:22-30
  • 설교자: 드로빅

040502ek

요한복음 10:22-30 /  (설교: 드로빅)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진짜 양을 치는 목자를 제 눈으로 딱 한번 본적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트랜스카파시언 산자락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노인이었습니다.

색 바랜 비옷을 입고있었고 큰 지팡이를 짚고 이리 저리 다니면서 양들을 에게 무언가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의 하루의 모습을 길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목자와 양떼들이 어디에선가 나타났었고 잠시 후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길을 갔습니다.

멍멍짓는 양몰이 개가 짓는 소리와 양들의 울음소리로 양떼들은 길을 안내 받습니다.

부유한 서방 문명의 사람에게 이것은 낯설은 장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이 장면은 매일 일어났던 일이며 이 장면으로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첫번째 우리의 반응는 왜 양들인가? 질문 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아주 바보 같은 짐승 양에게 비교하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빠르게 변하는 오늘날에 탄력성있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현대 개신교 기독교인들은 아마 다른 짐승에 비교해야 되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사자입니다.

사자는 우렁찬 목소리, 힘이 있고 빠르고 날렵해서 스스로 먹이를 취합니다.

자신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저는 눈으로 보통 자연 속에서 사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양은 떼를 지어 삽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입니다.

중세 교회의 권력으로부터 신자들을 해방시킨 종교개혁은 많은 교파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회 안에서 교회 일치와 연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정도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목자의 말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목자의 말씀입니다.

교회에 대한 그리고 교회를 위한 말씀입니다.

해방의 말씀입니다.

정복하려는 욕망으로부터 그리고 더 빠른 템포에 적응하도록하는 채찍으로부터 인간 자신의 독재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자인 것을 아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우리를 부르는 목자의 음성입니다.

속에서 우리를 부르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 음성은 우리 인생의 첫 출발부터 지금까지 있었습니다.

그 음성에 대한 응답이 오늘 자신의 자녀들이 세례받기 원하는 부모님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세례를 원하는 삶일 수 있습니다.

이 목자의 음성에 우리는 모든 방법으로 응답을 합니다.

신자의 삶으로 이 음성을 분별하는 것을 배웁니다.

어떤 지도자의 음성이 아닙니다.

종교 지도자의 음성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를 부르는 음성은 우리를 아는 선한 목자의 음성입니다.

우리 자신이 자신을 아는 것 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이 음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각계 각층 모든 민족들에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과 양 무리들의 그림이 사용되고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안내하도록 부르심을 듣고 선한 목자를 뒤따르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는 동서남북에서 자신의 교회를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두번째, 자신의 손에 있는 우리를 빼앗기지 않는 목자의 안전함입니다.

성경에서 손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능력의 비유입니다.

의지할 수 있는 안정되고 견고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는지 아닌지 불확신에서 오는 흔들림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님의 안정성과 견고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모든 인간을 수용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불완전한 사람도 받아들입니다.

이 본문을 처음으로 읽은 독자들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였는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디오클레스 황제시대에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적들로 둘러쌓였습니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아는 교회의 양들의 확신과 자기이해의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유럽의 우리 기독교인들은 1, 2세기의 기독교의 전환의 시기와 같은 그러한 박해로 위협을 받지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다른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이웃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는 목자에 대해 다양하게 왜곡되고 뒤틀린 우리들의 이해입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다른 희생들에 대해 단지 한가지만 선택하고 강조하거나 아니면 다른 것들을 거부하던 당시에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종류의 수박겉핥기식의 지식과 우리 목자의 음성에 건성으로 순복하는 것이 우리를 위협하고있습니다.

우리가 오직 한분 목자를 뒤따르는것을 아는일에 대한 게으름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내 옆에 검은 양이 있을 때 그리고 다른 울음소리로 양이 매애애 울 때 그때 우리는 위협을 받습니다.

세번째로 목자는 크신 분입니다.

교사와 도덕가의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19세기에 있었던 신앙고백의 논쟁은 바로 오늘 본문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에서 발전된것입니다.

양과 양떼들과 관련해서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은 곧 하나됨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하나이십니다.

이 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되심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우크라이나 트랜스카파시언 산의 목자가 양떼를 이끌 때 이리 저리 아무데나 데리고 가지 않습니다.

언제나 목초지에서 목초지로 옮겨다닙니다.

양들이 배고프지않도록 데리고 다닙니다.

안전한 목초지에서 쉬도록 데리고 다닙니다.

우리의 목자는 우리들을 어디론가 인도합니다.

배부르게 합니다.

우리들의 목자는 하나님 나라의 길을 아십니다.

우리들은 그의 양들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압니다.

그러나 목자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길로 언제나 인도하실 것입니다.

어두운 미래와 좌절을 경험케하는 것들과 대면하면서 우리는 기독교신자들로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 나라로 가고 있음을 압니다.

부활절기에 사도행전을 봉독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초대교회가 경험한 염려와 기쁨들은 우리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섬김과 예배와 증언의 공동체가 결국 승리함을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배웁니다.

하나님의 손이 강함을 초대교회로부터 배웁니다.

초대교회에 임한 그 능력의 손이 바로 우리에게도 임하고 있음을 우리들은 배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마음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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