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교회의 선교

  • 연합 예배 (2001년 10월 07일)
  • 벧전 3:15
  • 설교자: 이종실

01년 10월 07일
설교본문: 베드로전서 3장 15절
설교제목: 디아스포라 교회의 선교

<설교본문>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설교>

늘 본문은 2천년 전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을 위해 쓰여졌지만 오늘날 우리 상황에도 여전히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소수 종파의
체코개혁교회를 만난 이후에야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1세기의 그리스도의 제자들 처럼 자신들이 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인 것을 알았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신자를 얻는 한국교회의 분위기에서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저처럼 한국
기독교가 디아스포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한국교회는 기독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땅에서 복음의 실천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200년 전 복음이 한국에 전해질 당시 한국사회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지 못하였습니다. 여성, 어린이, 노동자,
농민, 기술자, 그리고 남의 집에서 일하는 종들은 사회의 낮은 계층이었습니다. 당시 선교정책은 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자 병든 자 죄인 창녀들과 어울리신 예수님과 쉽게 동화되었습니다. 서양의 현대식 기독교 학교와 병원을
세워 가난하고 소외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돕고 가르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도 복음의 실천인
사회를 섬기는 일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업들이 자신들의
기업홍보를 위해 기독교 병원보다 훨씬 좋은 시설과 의술을 갖춘 병원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업들이 학교를 세우고
그리고 양질의 인적자원을 얻기 위해 대학도 세웁니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일반 세상 단체들의 사회 봉사를 위한 노력이 교회보다
앞서나가고 있습니다.

이미 체코교회 여러분들은 오래 전부터 이러한 현상들을 체험하였습니다. 더구나 사회주의 시대를
경험하면서 교회의 복음의 실천의 공간이 매우 제한되어 있고 무신론적인 사회분위기는 국가에 의한 교회의 재정지원으로 오히려 교회에게
더 많은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과 소망의 가장 구체적인 선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기독교의
실천은  이미 기독교인들만의 독특한 영역이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만의 개인적인 또는 사회적인 의미 있는 이슈가 있지 않기
때문 입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상황은 기독교의 실천이 타 종교와 인도주의적인 세속적인 행동가들과의 실천과 협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실천으로 우리는 더 이상 믿음을 권면하고 복음을 설명할 수 없는 이와 같은 디아스포라 상황에 대해 체코
개혁교회 기독교인들은 잘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체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회의 실천과 전도 집회에 의해 교회가 자동적으로 새로운
신자를 얻는 기독교의 시대가 서서히 끝나 가고 있음을 압니다.

현재 체코 개혁교회 교우들은 새로운 자기 확신과 자립을
이루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체코형제 자매들은 자신의 신앙의 생명력, 진실성, 생존은 종교적인 사회적 관습과
가족의 전통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끄는 믿음의 능력에 의존해야 함을 사회주의 시대를 극복 하면서 알았습니다.

지역사
회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해 슈토렉 목사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을 의논할 때 그는 언제나 카톨릭 교회와 지역
관청 그리고 인도주의적인 사회 단체들의 활동 관계를 고려하였습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믿음을 권면하고 복음을 설명하기에 한계가
있는 무신론적인 분위기의 다원화된 사회에서 슈토렉 목사님은  소위 코이노이아로 불려진 친교를 통해 믿음을 권면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그의 생각을 이해했습니다.

친교는 단지 우정이 아니라 예배와 성만찬의 교회론적인 삶입니다. 이것은 복음으로
불리우는 새로운 계약, 삶에 대한 모든 관점의 변경, 다른 태도와 존재양식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실존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새로운 존재에 대한 증인이 될 때까지 우리들은 혼란스러운 존재들로 살아갑니다.

특히 오늘 이 말씀을
듣던 청중들은 박해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 서신은 박해를 받은 것은 로마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올바른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서신의 이러한 정보는 박해를 받던 사람들은 범법자로 수치를 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해의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실하고 착실한 삶 대신에 충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열광적인 종말론에 빠지기 쉽고 외부와
교통이 없는 폐쇄된 공동체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사회와 단절이 된 공동체는 섹트입니다. 이것이 1세기 때 흩어진 기독교인들인
소수 무리들에게 편지를 써서 베드로 전서의 저자가 훈계한 이유입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민의 한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정치가들 마저도 업신여기는 힘없는 교회 공동체 일지라도, 재정적으로 국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약한 교회 공동체 일지라도, 특별한 전통을 가진 가족들의 모임 같은 특별한 소수로 여김을 받는 교회 공동체 일지라도, 병든자 노인
가난한자 죄인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일지라도 교회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를 들었기 때문에 지금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가 현재와 미래에 대해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와 미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것 궁극적인 것을 소망하기에 일시적인 고통과 고난 중에도 소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소망을 보고 찬양한 여인들 한나(삼상2,1-10)와 마리아(눅1,46-55)의 모습이  디아스포라 교회가 찾아야 할
모습입니다.

사회의 지원이 전혀 없는 디아스포라, 게다가 혼란스러운 존재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이들에게 믿음,
사랑, 친교, 예배와 기도를 언급하지 않고 소망을 말한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소망 없이 존재하는 것은 상실하는 것이고
내적으로 죽는 것이며, 슬픔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것은 자포자기, 파멸에 가장 가까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인류에게 소망을 줄 어떤 것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지금까지 종교적인 관습과 전통에 기대온 우리 교회들이
우리가 희망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해야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의 소망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그 소망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
보여져야 합니다. 복음의 소망 안에 세워진 디아스포라의 교회가 바로 선교의 전선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초대교회로 탄생한 것
처럼 우리 체코와 한국의 형제 자매들이 복음의 소망을 전하는 교회로 탄생하는 것, 이것이 선교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아멘)

<파송의 말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마가복음 10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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