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립 체코교회의 미래
– 파벨 스메따나(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장),
코스트니츠께 이스끄리 (1997. 8. 30), 기독공보 (1997. 10. 4)
이질문뒤에 매우 구체적인 염려가 있다. 개교회들이 모든 인건비와 운영비를 지불해야만 될때 많은 우리 개교회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된다는것을 의미한다. 개교회들은 서로 연합해야만
되고 그들의 일은 무기력하게 될것이다.
개교회가 물질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보장받아야 된다는 의식은 매우 낡은것이다. 중세시대에는 후원하는 귀족이 재정을 책임졌고, 건물 관리와 개인비용을 위한 사용이 가능한 넓은 땅과 산림을 교구와 특별한 수도원은 소유하였다. 교인이든지 아니든지 부과된 세금을 지불해야만했다. \"똘레랑스 허락\"(역자의 주 – 1781년 오스트리다 카톨릭이 체코 개신교도들에게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으로 100가정 500교인의 개신 교회가 생겨났고, 이 숫자는 목사와 교사의 인건비를 지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였다. 1차세계대전 이후 \"연합된 교회\"(역자의 주 – 오스트리아로 부터 독립되면서 장로교회와 루터교회가 연합을 하게됨 이것이 현재 체코형제개혁교회가 되다)는 모든 경비를 지불할 수 없는 개교회 설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은 개교회 상황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특별히 작다는것은 반드시 약하다는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소금과 누룩에 비유하셨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대규모의 사회로써 개교회를 묘사하지않았다. 처음 교회의 토대를 만든 예루살렘 공동체를 제외하면 비교적 작은 청중의 구룹이었다. 하찮은 숫자(매우 적은 무리) 그 자체가 교회를 불안하게 만드는것이 아니다. 신약은 기독교의 믿음이 인간 실존에 스며들도록 그리고 믿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보여주기위한 사도들과 그의 제자들의 노력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즉 양이 아니라 질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향을 받고 있는 도시와 각 지방을 보았다. 그들 도시들에는 이제 기독교 공동체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처음에 교회의 물질은 가난한자,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데 필요하였다. 초대교회의 운영비는 최소한이었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고 큰 예배당과 교회의 건물들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비용은 헌금으로 모았다. 하나님의 것에 대해 헌금하는것은 오늘날 기독교인의 생활이 되었다. 교회 수익으로된 모든 재산은 특별하다. 이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가 그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헌금에 대해서 각자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할때 자신의 헌금은 감사함과 즐거움으로 바쳐야 한다.
디아코니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개교회의 연합안에서 서로 돕는것이다. 그예가 고린도후서이다. 사도들은 관대함과 기꺼운 마음으로 헌금하도록 믿는이들을 일깨우고 있다. 말씀의 능력안에서 믿음의 삶,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도움안에 있는 믿음(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그리고 사랑의 사역에 동참하는 즐거운 마음을 그들은 믿었다.
오늘의 상황
<어떻게 큰교회가 되나?>
카라피아트(역자의 주 –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목회자)는 모든 성인 교인들이 주님의 성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권고 하였다. 나에게 교회의 크기는 두가지 관점을 준다. 목회에 대한 관심이며, 그리고 부분적으로 교인 숫자를 의미한다. 개교회안에서 평생사역을 한다는것이 목회자의 신념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어린이들과 청년들이 모이지 않는곳, 신자들이 성경공부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곳, 교인들이 기대하지 않기때문에 목회가 이루어 지지 않는곳에 갈 수 있고 자립이 불가능한 교회도 가치가 있게된다. 외로운 형제 자매들 그리고 늙어 교회에 나올수 없고 교회의 일군이 될 수없는 형제 자매들을 진심으로 돌보게 된다.
<언제 개교회가 자립이 되는가?>
개교회가 자신의 설교자를 세울 수 있다. 반면 개교회가 원한다고 해서 목사와 관리자를 세울 수 없다. 자립교회를 위한 결정은 당회의 기능이다. 복음에 대한 나의 이해에 따르면 설교자는 장
로들 가운데 특별한 사명을 가진 한 사람이 된다. 동시에 다른 은사를 받은 나머지 장로들이 봉사를 함께 해야한다. 미자립 교회뿐 아니라 큰 교회의 장래는 장로들의 열성적인 봉사에 달려 있다.
교회안에서의 희생
희생에 대해 아주 드물게 논의 된다. 희생이라 하면 대개 경제적인것을 이야기 한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교회의 결정자는 경제적인것이 아니라 영적인 지도력을 자진자였다는것을 증명하고 있다. 역대 총회장 가운데 한분이 재치있는 농담으로 : \"믿음은 휙소리가나고 믿음아닌것은 땡그랑소리가 난다.\"라고 했다. 교회는 자기보호 본능으로 자신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신을 위하는것 보다 주느것을 더 생각해야한다.
<개교회간의 연대를 발전 시키기>
개교회간의 파트너십은 \"연대 기금\"(역자의 주 –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끝나는 내년 이후 교회가 재정적 지원을 하기위해 개교회들이 일정한 분담금을 총회로 보내는것)을 이룩한다. 만약 어느 정도 힘있는 몇몇 개교회가 다른 교회를 지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과시 그리고 자만이 아니라 감사가 된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기때문이다.
<건물들이 큰 문제이다>
교회는 세워짐으로 이해된다. 성경의 모델은 단지 천막으로된 순례 여행의 모델이다. 혁명이후 지금까지 우리들은 주거지역에 한곳의 선교지도 세우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믿는자가없는 장소에 예배당을 세워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협력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교회들과 협력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분열된 교회는 소비적이다. 기독교인의 연합은 경제적이 된다.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왕국을 찾자. 교회는 정부에 의지하는것이 아니다. 믿는자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보며 주님에게 희망을 두는 사람이다. 우리들은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본다. 지상의 교회는 끝에서 두번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