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유산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유산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 개강 세미나 강연, 1997. 3. 10.
강연자: 파벨 스메따나 ( 체코형제 개혁교회 총회장), 통역(번역) 홍지훈 교수
이 강연은 후에 호남신학대학에서 출간하는 신학이해 15 (1997) 397-407에 발표되었다.

1. 보헤미아 종교개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보헤미아 종교개혁은 얀 후스라는 개혁자에 의하여 특징지어질 수 있는 15세기의 영적인 전쟁을 가리킨다. 얀 후스는 아마도 1371년 남부 보헤미아의 마을인 후시네츠(Husinec)에서 태어나 프라하 까렐 대학 신학부의 교수요 학장을 지낸 사람이다. 동시에 그는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자였다. 그는 자신의 설교와 작품들에서 당시의 세속화된 로마 교회, 특히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교황은 그를 출교하였고 결국 그는 콘스딴쯔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1415년 7월 6일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후스의 후예를 후시텐 (Hussiten) 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저들의 개혁 운동을 지속하였다. 그 개혁 프로그램들은 1420년에 나온 \"네 가지 프라하 조항\" 으로 표현되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로이 그리고 이해되도록 선포할 것. 2.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양종의 성찬을 나눌 것. 3. 사제나 감독은 세상의 권력을 포기할 것. 4. 심한 죄를 지었다면 성직자를 불문하고 모든 계층을 처벌할 것.
1414년에 프라하의 \"벽속의 성 마틴 교회\"에서 처음으로 양종성찬이 시행되었다. 이것 때문에 전 유럽의 영적. 세속적 권세는 보헤미아의 후스파 개혁을 심하게 반대하였다. 심지어는 반후스파 전쟁까지도 치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12년이나 진행된 후에 1433년의 바젤 공의회에 이르러서야 타협점을 찿아 전쟁을 마감할 수 있었다.
얀 후스와 후스파 개혁자들이 15세기 전반에 보여준 종교개혁적인 노력들은 (이것은 독일의 루터보다 100년이나 앞선 것이다) 훗날 \"보헤미아 형제연합\"이라는 이름으로 1457년 동부 보헤미아의 쿤발트(Kunvald)에서 후스파의 영적 후예들에 의해 결성된 보헤미아 종교개혁 운동이 새로이 진행되는데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하였다.
이 시대의 영적인 투쟁과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보헤미아의 정치적인 역학 관계를 조금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4세기의 후반부는 보헤미아의 왕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룩셈부르크 가문의 까렐4세의 전성기였다. 그는 유럽의 십자로 중심부에 위치한 프라하를 상업의 중심지요 문화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이미 1344년에 그는 교황의 허락을 얻어서 프라하에 대주교좌를 설치하였고 1348년에는 대학을 중부 유럽의 최초의 대학으로
설립하였다.
그는 경건한 군주로써 당시의 중세적인 후기 고딕 양식에 맞추고 있었다. 세상 적인 삶을 즐기고 좋아하고픈 생각은 참회하는 포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더 높은 교육을 희망하는 마음은 기적 신앙과 결합되었고 이성적인 스콜라주의는 거의 마술적인 힘이 가미된 성례를 위하여 신비적인 열광과 연결되었다.
황제 스스로는 그의 보헤미아 왕국과 신성로마제국의 발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는 새로운 승단을 국가에 두었고 성자의 유물들을 수집하였으며 수도원과 새로 짓는 교회를 풍부한 헌금으로 후원하였다. 사제나 수도사 가운데는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는 자도 있었다. 교회는 점점 물질적인 풍요와 세속적인 특권에 의하여 세속화되어 갔다. 까렐 4세와 그의 세력(프라하 대주교를 정점으로 하는)들은 이러한 과정을 여러 가지 생각으로 따랐고 새로운 입법을 통하여 사제와 수도사들을 위해 폐단을 제거하도록 시도하였다. 1378년 그가 죽은 후에 전 로마 교회는 역시 교황청이 분열되는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체코의 교회와 공공의 삶 가운데는 이러한 상황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시작하였다. 교회의 모습을 개선해 보려는 신학자와 설교가들은 결국 메아리만 발견할 뿐이었다.

2. 얀 후스의 선배들

14세기 후반에 개혁적인 신학자를 거론할 때 우리는 우선적으로 크렘니에르의 요한 밀리츠(Kremsier의 Johann Milic)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는 정치적인 역량을 쌓았으며 프라하의 시의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였다. 새로 생긴 까렐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후에 그는 교회봉사국의 최고 .자리에 올랐다. 이 자리는 자기 교구의 사제단을 감독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그는 이 직분을 매우 성실하게 감당하였고 그래서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해당 사제들을 권고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 아주 깊은 회심을 느꼈다. 그의 깨어난 양심은 그 동안 자신이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살지 못해 왔다는 의식을 가져다주었다. (그 역시 자신의 교회적인 위엄과 직분을 큰돈을 지불한 대가인 교황의 보호에 의하여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교회 직분을 사임하기로 결심하였고 스스로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바치기로 하였다. (아마도 프란치스칸 수도회 중심으로 진행된)갱신 운동에 따라서 그는 기독교 금욕 운동에 가담하였다. 이 사람은 휴매니즘 문화의 사람이요 (배운 사람의 언어인)라틴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제 부터는 체코어로 설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타협할 줄 모르고 교만한 자들과 음란한자들과 탐욕스런 자들을 크게 질책하였다. 로마 교회의 고위 성직자라고 해서, 또는 왕이라고 해서 보호해 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높은 계층에도 동료가 있었다. 그의 웅변술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계속적인 성서 해석과 공적인 생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통하여 천년왕국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적그리스도의 힘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그의 정신적인 혼란을 위한 신학적인 답을 찿아서 교황 우르반5세를 만나러 로마로 갔다. 그는 거기서 이단의 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로마에서 프라하로 돌아온 후에 그는 라틴어와 독일어로 설교하였다. 그의 주위에 모여든 학생들과 젊은 사제들을 규합하여 공동체를 결성하였다. 그의 회개 설교를 들은 프라하의 윤락여성들은 크게 감동을 받았고 회개하였다. 그녀들을 위하여 밀리츠는 1372년 도피성을 건립하여 예루살렘이라고 명명하였다. 거기서 그는 협력자들과 함께 그녀들이 다시금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 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적인 교육을 하는데 헌신하였다. 많은 이 들이 자기의 가정으로 돌아갔고 어떤 이들은 결혼하여 정상적인 가정을 꾸몄다.
그는 말년에 자신이 이단으로 판정 받아야 했던 아비뇽 교황청의 심판대를 경험하여야 했다. 그는 거기서 1374년에 죽었다. 그의 업적은 외적으로는 마감되었지만 그의 유산은 이제부터 다가올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열매맺는 씨앗이 되었다.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장을 처음으로 연 밀리츠의 정신적인 유산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되어 질 수 있다. 1.무엇보다도 교회의 설교 직분과 설교 선교에 대한 강조이다. 내적인 확신에 가득치 성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곳에 청중이 변화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2.둘째는 경건한 설교가의 사회 봉사이다. 그는 죄지은 여인이 설교대 아래에서 회개하는 것으로만 만족치 않았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3.셋째 그의 유산은 신앙의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찿을 수 있다. 그의 금욕적인 생활은 그 안에서 특별한 안목의 능력을 일깨워 주었다. 뿐만 아니라 선포하고 선교하는 힘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 하는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살아 있는 교회의 참된 성장을 보았던 것이다.

3. Jan Hus

모든 개혁교회는 그의 정신적인 유산과 연결이 된다. 그는 1371년에 태어났다. 까렐4세 황제가 죽었을 때, 후스는 7살이었고 막 학교 공부를 시작하였다. 남부 보헤미아에서부터 그는 더 훌륭한 교육을 받고자 프라하로 왔는데 이것은 신학 수업을 받게 하려는 경건한 어머니의 소원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사제가 되기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매우 열심히 성서를 연구한 결과 그의 마음에는 변화가 찿아왔다. 까렐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이제 철학 과목의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1402년에는 새로 생긴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가가 되었다. 프라하에 있는 교회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을 의미하였다. 이 교회는 밀리츠의 제자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거기서는 잘 이해할 수 있는 체코어로 설교되어지기를 희망하였다. 여기서 후스는 두 가지의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그가 대학생들을 교육하는 대학교회와 프라하의 모든 계층 앞에서 거룩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민, 학생, 수공업자, 사제와 궁정 신하 심지어는 왕비까지도 모여들었다. 후스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청중이 그의 선포를 잘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이해랄 수 있도록 해석되고 설교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성서를 새로이 번역할 필요를 느꼈으며, 고대 교회의 신조를 해석하고 예배의식에 체코식의 찬양을 넣을 필요도 느꼈다. 후스는 교사요 설교가일 뿐만 아니라 상담자요 고해성사 사제 역할도 하였다 그의 목회적인 영적 자질은 벤젤(Wenzel)4세(까렐4세의 아들)에 의하여 높이 평가되어서 그는 마치 프라하의 대주교와 같은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점점 성직자들의 삶을 비판하기 시작하자 많은 그의 친구들은 떨어져 나가서 오히려 그의 적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대주교 츠에서 그의 설교직을 박탈하자 그는 이 직분이 그리스도로부터 수여되었다는 근거로 대항하였다.
후스의 대적들은 후스의 사상이 영국의 개혁자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과 연결된다는 점을 들어 그를 공격하였다. 위클리프의 작품은 이미 당시에 이단으로 판정 받은 바 있었다. 위클리프의 서적들을 불태우라는 요구를 거절한 뒤에 대주교는-곧 뒤이어 교황도-그를 출교하였다. 후스가 교황의 면죄부 판매는 네아플 왕과의 전쟁 비용을 위한 것이라는 비난을 하기 시작했을 때 저들의 상황은 더욱 더 심각해졌다. 출교는 이제 프라하에서의 성직금지 명령으로 강화되었고 모든 교회적인 의식이 금지되었다. 이제 후스는 프라하를 떠나야만 하였다. 그러나 시골에서 그는 아직도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보호 아래 교회의 개혁을 위한 설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자신의 저술들을 발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 해제, 십계명 해석, 주기도문 강해, 성직 매매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그러는 사이에 교황청의 분열을 해소하고 이단을 박멸하며, 교회의 갱신을 시행하기 위하여 남부독일의 콘스탄쯔에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역시 후스도 미신이라고 여겨지던 자신의 가르침을 취소하도록 그 회의에 소환되었다.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의회 앞에서 성서에 근거하여 자신이 이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르게 따르는 사람임을 증거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콘스탄쯔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체포되어 심문 받았고 감옥에 수감되어 고문당하였다. 반
년 가량이 지난 후에야 후스의 친구들은 그의 공개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후스의 대적들은 어떠한 신학 토론도 하기를 원치 않았다. 오히려 후스를 공의회의 결정에 순종하도록 강압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기독교 교훈의 진실성 여부를 묻는 질문의 가장 높은 판단 기준은 교회 정치가의 모임이나 회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후스는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즉 콘스탄쯔 종교회의의 기본적인 논제는 교회의 참된 권위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교황을 중심한 교회 공의회가 그 정점에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인가? 교회의 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말씀인가? 결국 후스는 다음과 같은 선택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공의회, 즉 인간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생명을 구하던지(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판 대가이다)아니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던지(이것은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의 선택이었다. 이것은 물론 후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내적인 갈등을 야기하였을 것이다.-이것은 지금까지 수집된 후스의 서신이 증거 한다. 후스는 죽음의 공포가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신뢰해 온 청중과 동료들을 그릇된 길로 다시 빠뜨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코 그리스도의 진리을 배반할 수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콘스탄쯔의 감옥에서 겪는 그의 영적인 투쟁은 그를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인물로 만들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수호하려는 그의 모습은 콘스탄쯔 공의회 참석자들에게는 심한 이단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1415년 7월 6일 화형을 선고받고 장작더미 위에 올라야만 했다.
후스는 한 시대를 연 인물이었다. 비록 그의 신학에는 스콜라주의의 신앙적 유산이 남아 있기는 해도 그는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영향을 행사하였다. 가장 지존하고 능력 있는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심중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담고 있었다. 교회란 인간의 공동체이지만 복음을 믿고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따르는 공동체이다. 교황이 스스로 그리스도의 진리에 복종하는 한 후스도 교황에게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후스는 교회의 봉사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모범을 보이는 삶을 기대했었다. 그의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의 진리를 더 깊이 깨달아 가는 것인데, 이에 대하여 그는 그의 신앙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리스도를 신뢰하여라, 진리를 애써 찾고,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를 가르치라! 진리를 사랑하고, 죽기 까지 진리를 수호하여라! 그러면 그 진리가 너희를 죄와 사탄과 영혼의 죽음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다.\"
후스의 처형은 체코민족에게 커다란 동요를 불러 일으켜 강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후스의 후예들은 까렐 4세의 둘째 아들로 형 벤젤(Wenzel)이 죽자 보헤미아 왕으로 등극하려던 황제 지그문드에게 반기를 들었다. 보헤미아의 지방 영주들도 그를 왕으로 환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후스의 신변을 보장하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헤미아에서는 후스가 심판 받고 처형되자 지그문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심각한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보헤미아의 반항은 처음에 소위 후스파 전쟁으로 불렸는데 이 전쟁은 약 20년간이나 황제와 교황의 십자군에 대항하여 지속되었다.
후스파는 거의 모든 전쟁에서 우위를 점거하였다. 그들에게 이 전쟁은 적그리스도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보헤미아에 커다란 고통과 황폐함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참된 그리스도인은 비록 적대자(통치자)가 하나님의 법을 훼방해도 결코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헬치체의 뻬뜨르(Petr z Chelcice) 같은 사람인데 그는 교황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가인 동시에 후스파가 무기를 들고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반대하였다. 이 민족 사상가는 훗날 보헤미나와 뫼렌 형제단 결성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4. Petr z Chelcice
1380년에 태어난 그는 후스보다 몇 살 어렸다. 그는 보헤미아 종교개혁이 시작된 남부 보헤미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체코어로 된 작품들을 읽고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훗날 왈
도파의 신앙과 위클리프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그는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거의 모든 논쟁에 참여하였다. 하나님의 의지는 성서를 통하여 계시되며 인간 행동의 기준이 되므로 그는 교회 안에 어떠한 인간적인 권위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모든 공동체에게, 세상과 교회에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고 선포하였다.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여야 하며 자신의 실존을 이 세상 적인 권세의 보호 아래서 구하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주님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신앙으로 헌신하며 사랑과 소망의 길을 따라야 한다. 믿는 사람을 심판하고 성서를 반대하도록 허락된 법정은 이 세상에는 없다. 참된 평화와 자유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왕국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교회의 생활 가운데 어떠한 것이든지 그리스도의 말씀과 맞지 않는 것이 있거든 모두 포기해야만 한다.
헬치체는 심판자로써의 교황과 주교권의 권위를 부정하였다. 그는 성지 숭배나 성물숭배에 반대하였고 연옥설을 거부하였으며 면죄부 판매나 화려한 생활 그리고 수도원 고행 등도 반대하였다. 사제들에게 기대하는 바로는 진실한 신앙, 예배 때에 순수한 정신과 모범적인 생활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보조 도구로써 엄격한 교회 훈련을 실행시켰다.
또하나 그의 중요한 사상은 그리스도에의 복종과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전쟁은 영적인 전쟁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즉 죄와 악마를 대항한 싸움이다. 그는 결코 국가권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당시에 사람을 귀족, 성직자, 평민 세 가지로 나누는 것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민족은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까지 사라져가는 소수자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당시의 교회는 임무를 잘 감당할 수 업는 타락한 집단이었다. 그의 비유에 따르면 그리스도 교회의 그물은 두 마리의 고래에 의하여 찢겨졌는데, 그 고래는 교황과 황제라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잡은 고기를 다 놓쳤다.
헬치체 역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체코어로 된 것으로 그 가운데는 중요한 것으로 \"영적인 투쟁에 관하여\" , \"세 가지 계층에 관하여\", \"설교집\", \"진실한 신앙의 그물\" 둥이 있다.

훗날 후스파의 대주교인 프라하의 얀 로키차나(Jan Rokycana) 헬치체의 작품들을 그의 진실한 청중들에게 소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결국 남부 보헤미아 출신의 기독교 사상가는 보헤미아 형제단으로 이어지는 운동의 영적인 아버지로 부각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 나라에는 유일한 교회 공동체가 성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들인 프라하의 루까쉬(Lukas z Prahy), 얀 아우구스따(Jan Augusta), 얀 블라호슬라브(Jan Blahoslav),얀 아모스 꼬멘스끼(Jan Amos Komensky 일명Comenius) 같은 개혁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밀리츠의 경우에는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인간 영혼의 구원이 모든 회개자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특징이 있다.
후스의 경우에는 모든 신앙의 영역에서 죽기까지 그리스도의 진리에 순종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헬치츠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법이 모든 교회 적인 기관과 전통 위에 권위를 가진다는 강조가 특징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사는 신앙은 자유롭게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교회에로 부르심은 이미 사랑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어떠한 폭력도 거부하고 인간 사회를 구분 짓는 사회적 계급도 타파하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의 길, 그 길을 가신 주님을 따라 순종하며 걷는 것 거기에 승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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