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 한인 예배 (2001년 09월 09일)
  • 눅7:11-17
  • 설교자: 이종실

01.09.09 (삼위일체후 열세번째)
누가복음 7장 11-17절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공동기도>
슬퍼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연약함으로
눈물을 흘리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타인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슬퍼하여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존경하고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리 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잘 알고 그것을 삶에 적용을 시켜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심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많은 모습이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우리들의 시각을 모아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에 “불쌍히 여기사..”라는 말씀을 인용해서 설교제목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으로 정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긴 사람은 죽은 자를 뒤따르는 과부 여인입니다. 그 죽은 자는 자신의 독자 였습니다. “죽음은 사람에게 정한
이치(히9:27)”로 누구나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여인이 뒤따르는 죽음은 우리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14절 예수님께서 죽은 자에게 말씀하실 때 “청년아…”한 것을 보아 그 여인의 하나뿐인 아들은 아직 결혼도 하지않은
젊은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어도 세상을 떠나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인간의 수명을 다한 죽음은 정을
떼는 아픔은 있지만 그리 억울하지 않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기력이 왕성하고 미래가 있는 젊은이의 누구도 예기치 못한 죽음을
우리들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하나님께 그 이유와 뜻을 질문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죽음에 직면해야 됨을 알기에 안타까운 죽음의 슬픔은 우리들의 가슴에 빠르게 전달됩니다. 오늘 이 젊은이의 죽음의 모든 슬픔은 그 죽음을 바라보는 한 여인의 눈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음을 뒤따르는 장례가 이 여인에게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여인을 과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나누던 남편
그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하나를 얻고 이제 아장 아장 걸음마를 걷고 말을 하기 시작하는 아이를 사이에 두고 더 사랑이
깊어져 갈 때 그 아들 하나를 두고 먼저 훌쩍 저 세상으로 가버린 남편의 죽음을 뒤따르면서 다시 평생 느껴 보지 못할 사랑의
이별에 어린아이 등에 업고 애통한 눈물을 흘려본 여인이었습니다. 그 비통함은 누구도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러나 이 여인은 지금 그 보다 더 비통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오늘 장례행렬을 뒤따르며 이 여인은 자신의 가슴을 파고 그 안에 아들을 묻고 있습니다. 이 아들은 먼저 떠난
남편의 사랑의 징표였습니다. 그 아들은 자신의 슬픔의 위로였습니다. 힘들었지만 훌륭하게 장성한 아들은 그녀의 미래이자 의지할
보호자였습니다. 그녀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 아들의 관을 앞에 두고 뒤따르는 여인의 울음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애간장을 태웠습니다. 이 보다 더 슬픈 울음소리는 없었습니다. 그녀의 슬픔을 함께 나누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장례행렬을
뒤따랐습니다.   

이 장례행렬의 큰 무리와 마주하여 한 사람의 뒤를 따르는 또 다른 무리의 행렬이 
다가오고있었습니다. 이 다른 무리는 장례행렬에 동참하기 위해 이웃 마을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장례행렬과는 전혀
무관한 무리의 행렬이었습니다. 마주 다가오는 두 무리의 조우는 마치 접촉점이 없이 교차하는 공간의 선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전혀 상관없는 두 무리가 애절한 여인의 울음소리로 만나게 됩니다.
이 장면을 오늘 성서는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수님은 지금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고 나인성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백부장 하인의 치유방법에 사람들은 많이
놀랬습니다. 하인을 만나지도 보지도 않고 백부장이 보낸 사람들을 통해 백부장의 사람됨과 믿음을 보시고 그의 소원인 하인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며칠 후 예수님이 나인성으로 갈 때 뒤따랐던 것으로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국회 위원들이 선거 때는 코가 땅에 닿도록 백성들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금배지를 달고 나면 백성들
위에 군림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겸손히 신앙생활 잘 하던 분들이 조금 성공을 했다 싶을 때 교만하여 남을 교훈 하려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처럼 표리부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할 때나 사람들이 비정하게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를 요청 할 때나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홀로 걸어가고 계십니다. 죄인과 고통 받는 삶들을 위해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비록 환호하는 무리에 휩싸여 있을지라도 그의 눈은 슬픔을 당해 애통해 하는 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환호하는
백성에 그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그녀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여인의 울음은 단지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희망과 모든
의지가 되었던 아들을 잃자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절망에 눌려 나오는 신음소리 였습니다. 그 여인을 예수님은 불쌍히 여겼습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의 절망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불행을 당한 욥을 찾아온
친구들은 욥이 불행을 벗어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에게 지은 죄를 발견할 것을 욥에게 권고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권고는 욥의 위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욥을 괴롭히는 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여인의 울음소리에 다만
같이 마음 아파하시며 그녀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슬픔을 해석하거나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이해 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슬픔을 겪는 자에게 가장 큰 위로는 백마디 말보다 슬픔을 함께 느끼는 마음입니다.

누가의 복음서를 읽던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은 고통 받는 자 절망에 빠진 자의 슬픔을 같은 마음으로 나누고 계시는 이 예수님의 모습에 말할 수 없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은 유대사회의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던 소수의 흩어진 자들이었습니다.
열성 유대인들은 이들을 찾아내어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한때 사도 바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회의 질서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것은 삶의 뿌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힌두교의 사회에서 그리고 이슬람의 사회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그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는 일입니다. 체코의 개혁 교도들은 카톨릭으로부터 4백년이 넘게 삶의
뿌리가 뽑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고통과 절망을 느끼는 것 뿐이었습니다. 생명의 위협
때문에 추적자들의 눈을 피해 산속에 아니면 신분을 감춘 채 비밀리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미래가 없는 이들에게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 받고 절망에 빠진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 하나님을 시편으로 찬양하며 기억했던 것입니다.
에큐메니칼 예배 때 마다 부르는 시편 68편 찬송가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찬양하라 주님께 한 없는 사랑의 주님
고아들의 아버지, 경배하라 주님께 한없는 사랑의 주님 과부들의 보호자, 그 크신 사랑의 주님 우리의 고통 아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 그 크신 사랑의 주님 우리의 고통 아시고 응답해주신 주님”

유대인들의 박해 아래 하루 하루 불안에 떨며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처지였던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위로이자 아직 꺼지지 않은 희망은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롬8:35-37)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삶의 근거와 의지를
송두리째 상실한 사람의 고통과 절망과 슬픔과 애통함을 아십니다. 뿐만 아니라 불쌍한 마음으로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이 고백이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삶의 희망의 불씨였습니다. 기독교의 역사가 지구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박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2천년
동안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완전히 꺼져버린 등불이 되지않고 그것을 극복하게 된 힘은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깨달아 오늘의 어려운 우리들의 삶을 극복해 가는데 큰 힘과 용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래서 먼저 삼위일체후 열세번째 주일 아침에 들려주시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들은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고백을 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와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젊은 죽음을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라 삶의 희망과 토대를 상실해 슬퍼하며 애통해 하는
여인을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렘9:1) 하며 진심으로 슬퍼할 줄 알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삶의 많은 장벽으로 알게 모르게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는 해외생활에서 우리
교우들이 그리고 우리 한인들이 서로가 서로를 위하며 오손 도손 살아가는 세상을 우리 모두 누구나 간절히 소망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망과 달리 한국 사람인 제 자신부터 한국사람을 회피하려는 이중적인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 한국사람을
만나면 피해를 받게 되고 결국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개인에게 잠재되어 있던 왜곡된 경쟁심리,
질투심, 열등 의식들이 해외생활의 삶의 장벽들을 만나면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은폐 시키고 가면을 씌워
다른 사람에 대해 거짓과 우쭐함과 분노와 원망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을 관계로 만나지 못하고 수단의 대상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관계가 서로가 서로를 경원시하는 황폐한 삶을 만들고 있습니다.

달리 말씀 드려 해외생활에서 우리들의 삶이
황폐하게 느끼는 것은 우리 각자가 인생의 도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할 줄 모르기 때문 입니다. 대신 우리들은 분노와 원망을 하나님을 향해, 남편을 향해, 아내를 향해, 자녀를 향해,
부모를 향해, 이웃을 향해 쏟아놓을 뿐입니다.  자기 자신의 상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문제이며 그리고 인간 불행의
원인으로 많은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지금 돌아가면서 독서를 하고 있는 김형준 목사님의 “가시지 않는
상처라면” 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김형준 목사님이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방을 하나 준비해놓고 선생님들을 한분 한분 그 방에 5분 동안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선생님들에게 “저
방에는 여러분 자신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살아왔던 사람, 가장 위해줘야 함에도 가장 학대한 사람, 가장 사랑해야 함에도
미워했던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그 사람과 5분 동안 대화를 나누고 나오십시오. 그리고 나서 느낌을 나하고 나눕시다.” 그래서
40대 갓 넘긴 여선생님이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분은 존경 받는 가정 주부에 자녀들도 훌륭하게 자라고 있어 다들 부러워하는
사람으로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였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잡담을 하며 그 선생님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방안에
들어간 그 선생님는 5분이 넘어도 나오지 않아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그만 안에서 황소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선생님이
처음에 방에 들어가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벽에 대형 거울 하나만 있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자 갑자기
방에 들어오기 전에 하신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자기를 기다리던 사람은 거울에 비친 자기였습니다.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거울에 비친 자신이 그렇게 멀리 느껴질 수 없었습니다. 아름답던 모습이 늙어가고 있었고 자식과 남편을 위한 성실한
삶이 자기의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온 날들이 떠오르자 그만 그 자리에서 그 선생님은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것과 원망하는
것은 다릅니다. 모세를 따라 애굽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인도하는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위험한 일을 겪을 때,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를 때, 무언가 불편을 느낄 때, 무언가 뜻대로 잘되지 않을 때 그때마다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모세를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결국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자기 자신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 출애굽기는 16장 8절에서 모세를 향한 그들의 원망과 한탄은 모세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원망을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현재 인도함을 받는 자기 자신의 상실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슬퍼하고 애통해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상실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리고 자신의 죄를 아파하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자신에 대해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애통한다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애통을 모르는 사람의 삶은 희망이 없는
삶입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슬퍼할 줄 그리고 애통해 할 줄 아는 사람 만이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체험이 있게 됩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는 체험은 삶의 의지가 모두 무너지고 사라져버린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의지가 새순처럼 돋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울고있던 여인에게 “울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눈물을 멈추게 하였을 때 도움이 시작됩니다. 오늘 여러분 곁에 오셔서
“울지 마라”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으시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후 기도)
남편과 하나뿐인 아들 –
자신의 삶의 토대를 잃어버린 여인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 인생의 도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상실하며 살아가는 저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슬퍼하거나 애통해 하지 못하고 타인을 향해 원망과 분노를 보내며 살아온
저희들입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절망하고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곳에 주님의 눈길이 닿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을 만나는 참된 희망을 발견하는 저희들의
매일의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울지 말라”는 주님의 위로로 살아가는 저희들의 삶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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