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03년 08월 24일)
- 눅19:1-10
- 설교자: 다빗 유레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에 여리고라는 곳에 들르셨습니다.
여리고에는 세상적으로 성공한 부자였던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그 뜻으로 볼 때 사가랴 라는 이름과 똑같이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달성할 수 있었던 삭개오는 아마도 굉장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에서 그는 존경을 받거나 인기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거리를 지날 때에도 겨우 몇몇 사람들만이 그에게 인사를 나누었고, 그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그랬을까요? 삭개오는 바로 로마의 관청에서 세리로 일을 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세금과 여러가지 수수료를 걷어 로마정부에 바쳤습니다.
같은 동족을 배반하고 침략자의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다른 유대인들은 그를 자기 민족을 떠나버린 매국노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이란 의미가 민족과 함께 종교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삭개오는 로마정부의 세리라는 직업을 갖기위해 이스라엘의 종교사회를 떠난 것이기도 했습니다.
삭개오는 유대인을 불결하게 여겼던 로마인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과 명예를 포기했습니다.
그렇게해서 돈과 지위를 따져볼 때 그는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세리에서 여리고 전체의 모든 세리들의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들이 어떻게 세금을 걷어들였는지 여기서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세금을 걷어들이는 방식은 사실상 세리들에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방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사람들로부터 일정한 구역의 세금 징수권을 돈을 주고 샀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자신이 투자한 금액을 되돌려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자신들의 권한이 있는 납세자들보다 더 많은 수의 납세자들에게 세금 독촉을 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돈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부당한 일이 자주 일어났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세리들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세례 요한이 세리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 그러한 부당한 상황이 있음을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눅3:12b-13) 하고 대답했습니다.
삭개오는 바로 그런 부정직하고 신중하지 않은 세리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부당함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삭개오를 가장 많이 판단하고 증오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시민들 사이에서 완전히 소외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삭개오와는 어떤 관계도 맺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졌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라는 그 이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신실하시며 죄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셨으며,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부르셨고, 그리고 여리고까지 오셨습니다.
여리고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순례자들 중에 나사렛 예수도 있다는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던 여리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거리는 예수님을 보려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기이한 일을 일으킨다는 예수님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기위해 사람들은 서로 밀치고 끼어들었습니다.
삭개오도 마찬가지로 집에서 달려나왔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들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어쩌면 에수님은 아무도 경멸하거나 얕보지 않으며, 열등한 사람들과도 한 식탁에 앉아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외로운 삭개오는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앞으로 가지 못하게 했고,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밀쳐냈습니다.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수많은 군중 앞에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뿌리가 튼튼하고 가지가 넓게 뻗은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가지 속에서 몸을 숨겼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꼭 그 분을 볼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주위를 지나가실 때 삭개오가 전혀 생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뽕나무 아래서 멈추시고 가지위로 우러러 보시며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은 나무 가지 속에 있는 삭개오를 아신 것 뿐만이 아니라 그의 이름까지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유하신다는 것은 그 집의 손님으로 밤을 보내신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삭개오는 재빠르게 나무를 내려와 정말 커다란 기쁨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집까지 모셨습니다.
예수님이 지명한 사람이 그 라는 것은 삭개오에게 있어서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행복으로 가득한 삭개오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대접해 드릴까 무척이나 고민했을거라는 것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여있던 군중들에게 그 일은 달갑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 어떻게 예수님이 여리고의 가장 큰 죄인의 집에 가실 수 있단 말인가?!“
선지자라면 삭개오의 집에 절대 발을 들여 놓지 않으실 텐데, 모인 사람들 중에 정말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합당한 바르고 존경받는 사람들의 집에 가셔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모인 군중들은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원래 정통 유대인은 이방인이나 죄인, 불명예스러운 사람,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면 안되었습니다.
물론 삭개오도 예수님의 친절이 그에게 과분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선택하셨을 때 이러한 예수님의 은혜는 협박이나 질타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삭개오의 양심이 깨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모습을 진심으로 부끄러워했습니다.
부를 통한 모든 자신의 인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대접함에 있어서 맛좋은 것들보다 더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 주여,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법률이 규정해 놓은 것보다 더 많은 양을 보상해 주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나온 것 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피해액의 20% 내지 100%를 더 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는 2배의 보상에다 다시 두배의 보상을 더해서 4배의 보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삭개오였지만 어떻게 부자들이 보상하고 회개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인 무리들도 다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변화된 삭개오의 너그러움은 그 구원의 선물을 받았다는 증표입니다.
더 나쁜 사람들이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큰 죄인이라고 보았고 그를 쉽게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을 지라도, 하나님은 삭개오를 기억하셨습니다.
이렇게 길을 잃은 죄 많은 사람도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도 선택된 백성에게 주셨던 약속의 말씀이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야만 했습니다. 그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명이었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그 집으로 구원과 용서, 새로운 인생이 함께 들어간 것입니다.
삭개오는 변화되었고 회개를 했습니다.
이전까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무엇보다 부(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모아둔 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전 시민 앞에서 삭개오를 인정할 때 그러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로 다가가셨던 사랑으로 삭개오를 회개 시키셨고 바르게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잃어버린, 순종하지 않는 어린양이 죽지 않도록 찾아나서는 선한 목자처럼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모든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세리와 죄인들 같이 자신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떠나버리고 그 약속의 말씀 또한 상실해버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자비롭게 다가가심으로 삭개오 또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들을 안전한 우리로 인도하듯 그들을 찾으셔서 다시 우리로 돌려보내십니다.
세리장 삭개오 이야기의 가장 주된 주제는 예수님의 은혜와 구원의 시작입니다.
죄인을 찾으시고 부르시며 그의 손님이 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삭개오가 다시 돌아온 것과, 그의 회개와 지금까지 행해왔던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그의 노력은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방법에 가장 올바르게 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례길의 의미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러한 삭개오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몇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장 큰 죄인이라도 구원하시려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지금까지의 전 인생을 다시 되돌아보고 새로운 인생길을 떠날 때 가능합니다.
아무도 그러한 행동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삭개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기독교인들은 <우리> 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 올바른 쪽에 있는 사람이 우리입니다. 좋은 우리, 선택된 우리입니다.
그리고 주위 세상을 의미하는 <그들>이라는 말을 씁니다. 불행하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삭개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올바른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볼 때에 „분명히“ 잃어버린 죄인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삭개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는 한가지 사실이 더 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과 자신의 재산을 그의 민족과 종교사회보다도 더 우선시 생각했습니다.
부의 축적과 사회적인 지위를 위해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났었습니다.
삭개오는 우리들의 소유가 우리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돈이란 우리가 다른 이웃들의 고통과 빈곤을 덜어주기 위해 나누어 줄 수 있을 때만이 정말 자신을 위해 쌓아 놓을 수 있는 영원한 재산이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신에 대한 걱정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걱정은 자유함을 준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베푸는 사랑 안에 하나님이 생겨나고 그 사람의 참 존재를 실현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삭개오를 기억하셨고, 그에게 다가가셔서 올바른 길을 보여주셨고, 그렇게 그의 인생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잘 따라가는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다른 이웃들을 용납하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