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 한인 예배 (2003년 08월 31일)
  • 출32:1-14
  • 설교자: 이종실

030831 (열한번째 삼위일체주일)
본문: 출애굽기 32:1-14
제목: 아!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본문>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설교>
저의 아버님은 조그마한 채굴광을 하나 세내어 일한 영세한 광산업자이셨습니다.
광맥을 찾고 그 맥을 따라 감추어진 석탄과 동과 같은 지하자원을 채굴하셨습니다.
광산촌의 아이가 바로 어렸을 때 저였고 여름에 갱 입구에 앉아 불빛하나 없어 깜깜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 시커멓고 끝이 없어 보이는 구멍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를 쫒는 경험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출애굽기를 죽 설교하면서 저는 광산촌의 어린시절을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지하에 감추어진 엄청난 노다지인 것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도 그냥 제눈에 드러나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실날 같은 말씀의 광맥을 찾아 조금씩 깊이 내려가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났습니다.
저는 말씀의 광맥을 찾아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과정을 가급적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설교로 전달함으로써 여러분들께서도 스스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기쁨의 체험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지속적으로 만났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나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깨닫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잊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느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내가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은 내 병든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 일에서 근거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씀드려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그 마음과 영혼으로 우리는 바른 찬송과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는 모두 40장인데 저는 오늘 설교까지 13번으로 일단 출애굽기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지나간 12번의 설교를 돌이켜 보면서 대체로 저의 설교가 무엇이 왜 우리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가? 라는 질문을 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시켜 그들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안에 임재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질병과 환란과 불행의 온갖 사탄의 어두운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하게 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시고 무능한 존재로 남아 계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죄가 겹겹히 쌓여 하나님을 그 가운데 가두고 그 하나님을 우리들 스스로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들의 마음은 어두워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일하시고 우리들의 죄의 사슬을 끊어주시는 하나님을 저는 출애굽에서 지속적으로 만났습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이토록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누구시길래 나를 끝까지 이처럼 관심을 기울여 주십니까?
눈물을 쏟고 목놓아 울고싶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저와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 속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않자 백성들은 함께 모여 아론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1절)
모세가 얼마나 오랫동안 산 위에 있었습니까?
출애굽기 24장 끝부분에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18절)고 합니다.
그러면 모세는 무엇하러 산에 올라갔습니까?
그에 대한 정보가 25장부터 오늘 본문 이전인 31장까지 계속됩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전건축법과 성전 인테리어 방법을 구체적으로 일러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31장 18절)

성전과 십계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살기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총회를 열어 아론에게 요청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요청에 아론은 송아지 형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형상 앞에 세워진 단에 봉헌을 하며 축제를 열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3절에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알립니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그들은 일구이언을 하였습니다.
이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에 찔리는 것이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합니다.
아니 지키고 싶습니다.
어느날 말씀을 듣고 기도와 찬송을 하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결심합니다.
이제부터 주일도 성수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결심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결과는 우리들의 결심과는 전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을 늘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와 여러분들이 생각할 것은 우리들의 문제가 단지 하나님과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에만 우리들의 관심을 집중해서는 안됩니다.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두기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우 자기 합리화의 습관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란것은 원래 그런거야!
내가 신이 아닌데 어떻게 마음에 감동이 될 때 마다 하나님 앞에서 한 결심과 약속을 다 지킬 수 있는가?
하나님도 우리가 못 지킬 줄 알면서 그렇게 마음으로 결심하는 줄 다 알고 계실거야.

신앙생활은 당연히 그러는 것으로 이제는 습관처럼 되어버립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의 이러한 습관처럼 되어버린 신앙생활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 보도록 여러분들에게 도전을 주고싶습니다.

왜 우리는 신앙의 결심과 스스로 자신에게 한 것이든 하나님과 한 것이든 그 약속을 번번이 어깁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질문은 이 원인규명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원인이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 것을 요구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위한 신을 요구하면서 덧붙여 한 말입니다.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이것이 그들이 자신의 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걸림돌의 첫번째 이유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을 필요로하게된 원인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대상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였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모세를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리고 광야 여행 길에 그들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출애굽기 19장 4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선택하여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신 분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분도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이 관계는 모세라는 한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그 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그 관계를 보지 못하고 단지 모세를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모습이 오랫동안 그들의 시각에서 사라지자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 자신들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은 허울뿐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복종과 질서가 그들 사이에서 날마다 무너져 갔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문제는 신앙의 대상이 아닌 사람을 보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고 교회를 다니기도 하고 다니지 않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유럽에서 한인 목회를 오래 하신 분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가장 마음이 아프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이 누구 보기 싫어서 교회 나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라는 것입니다.
이 좁은 해외의 한인사회에서 조금만 살다 보면 집안에 수저가 몇 벌인지 다 알 수 있는 이런 사회에서 사람을 보지 않고 교회를 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고 교회를 나간다면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일깨워 주고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그것 때문에 교회를 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의 모임과 다릅니다.
예배라는 모임의 형식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모임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의 모임과 다른 것은 신자들의 모이는 목적과 바라보고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임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세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교회로 모이기에 자연스럽게 그 모임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기에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 행동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신자들이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이제 신앙생활의 장애의 가장 근본적인 또 다른 원인을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자 그들은 자신들을 인도할 다른 신을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지도자 모세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다른 지도자를 요구하는 것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론에게 모세의 역할을 해주거나 아니면 모세와 같은 다른 지도자를 선출 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을 여러분들은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자신들을 인도할 다른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은 정말 신이 아니라 금으로 만든 송아지 우상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말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 우상이 자신들을 인도할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본문에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하였는데 이 말씀은 공동번역 성경에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라고 되어있습니다.
체코어 성경은 <우리보다 앞에서 걸어갈 신을 만들어 주시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 우상이 자신들 보다 앞서 뚜벅 뚜벅 걸어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우상은 그렇게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앞장 서서 걸어가는 우상을 따르며 그의 말에 복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그 우상을 데리고 다니면 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복종의 종교행위라면 우상숭배는 복종할 대상이 사라져버린 불복종의 종교행위 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한가지라도 지켜 복종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신앙의 깊은 맛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내면 속에 언제나 원하는 종교는 불복종을 요구하는 우상숭배의 종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뿌리깊은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장애입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이것은 기독교인의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기준이 내 안에서 형성되는 단계입니다.
다음단계로 세계관이 변화되면 영의 눈이 열립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싸울 영적싸움의 과제들을 구체적으로 발견하고 알게 됩니다.
바로 이 근본적인 신앙생활의 장애들과의 싸움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진정한 의미의 신앙수련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뼛속과 혈관 속에 그리고 존재 속에 불복종을 요구하는 종교를 희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그들은 이 우상 앞에서 여호와의 축제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희생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 말씀은 <그들이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논다는 단어가 성적인 뉘앙스가 있다고 합니다.
체코어 성경은 한국어 성경보다 좀 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인 것 같습니다.
놀더라 – nev&aacute;zan&aacute; hra 이며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nev&aacute;zan&aacute; 라는 뜻은 한계도 규범도 절제도 없다는 뜻입니다.
축제에서의 그들의 놀이는 문란하고 난잡하였음을 의미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합니다.

중근동 지방의 고대의 예배에서 농사 신을 섬겼기에 송아지 우상 앞에서 하는 축제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어떠한 신앙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들도 내 마음에 닿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여기는 경우는 없는지 이 시간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이제 시내 산 꼭대기 이야기로 화제를 돌립시다.
산에 있는 동안 하나님과 모세가 서로 대화를 하는 장면이 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7,8절)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모세는 온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고 손끝하나 움직일 힘을 잃은 상실감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가 깨어진 하나님의 말씀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백성이라 하지않습니다.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에 모세는 커다란 소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백성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9, 10절)

모세는 와락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강력하게 어필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1절)
그리고 간청합니다.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2절)
이와 같은 모세의 중재로 여호와께서는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14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 없애버리실 마음이 정말로 있으셨다면 굳이 모세를 산으로 내려 보내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분노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언자들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도 그 유사한 패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호세아 미가 선지자들에게 백성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선포하고 그 메시지를 주면서 그들을 보냅니다.

시내 산 꼭대기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성전 건축법을 일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여호와는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런 백성들 가운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25장)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백성들이 돌이켜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예언자 에스겔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우리를 향한 극진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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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겔 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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